[안보칼럼⑬] 국가보훈과 국립묘지(7)

오피니언·칼럼
“보훈의 궁극적 목적은 기억을 통한 국민의 연대”
서울 국립현충원 장군1묘역

장군 제1묘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오르면 현충탑과 잔디광장과 한강, 그리고 멀리 남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포토맥강을 가운데 두고 워싱턴DC와 마주하고 있는 미국 알링턴 국립묘지와 입지가 비슷하다고 한다. 강 건너 저편을 바라보며 언덕 위에 누워있는 이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국립묘지에 온 시민들을 보면 슬픔이나 숙연한 느낌을 찾아보기 어렵다. 산책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간혹 유가족들도 소풍 나온 것과 같은 모습이다. 그때 배 속에 있던 자녀가 지금 70대 노인 세대가 되었다.

현충일을 전후해서 우리가 가장 많이 듣는 가곡은 비목일 것이다. 이름 모를 계곡에 홀로 선 비목이 원한을 달래고 있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진다. 비목의 노랫말에 진한 외로움과 슬픔이 묻어난다.

‘(1절)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 녘에/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먼 고향 초동친구 두고 온 하늘가/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2절) 궁노루 산울림 달빛 타고 달빛 타고 흐르는 밤/홀로 선 적막감에 울어 지친 울어 지친 비목이여!/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파/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가사의 한 소절처럼 슬픔은 돌이 되었고 그리움은 이끼가 되었다. 언젠가는 잊히고 흔적마저 사라지겠지만 산자의 책임은 잊지 않고 이들을 기억하는 것이다.

1914년 영국의 시인 로렌스 비니언의 ‘전사자를 위하여’의 한 부분이다. ‘우리는 이렇게 늙어 버렸지만 그들은 늙지 않을 것입니다. 나이가 지치게 하지도, 세월이 정죄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해가 넘어가고 또 아침이 올 때 마다 우리는 그들을 기억할 것입니다.’

제1차 대전 때 캐나다군의 존 맥클래 중령의 종군 추모시 ‘플랑드르 들판에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강하게 메시지를 던진다. ‘만약 당신들이 죽은 우리와의 신의를 깬다면/우리는 잠들지 못할 것입니다.’ 존 맥크래는 자신들의 희생으로 지켜진 자유가 계속 지켜지기를 염원했다.

자유대한민국의 자긍심을 격정적으로 표현한 공중인 시인은 ‘진혼의 노래’에서 말한다. ‘그대 민국의 것이,/영원히 사랑의 그 이름을 수호함이니/어머니인 우리의 산하는 자손들이/역사에 기록한 님들의 혈맥, 겨레의 언어!/죽음으로 휘어 올린 자유의 깃발은,/우람한 종속에 새벽은 펄럭이도다.’

6.25 때 종군기자로 활약한 조지훈 시인은 ‘다부원에서’라는 시를 통해서 희생의 의미를 담담하게 표현한다. 시인은 ‘현충일의 노래’를 지었다. ‘조그만 마을 하나를/자유의 국토 안에 살리기 위해서는/한해살이 푸나무도 온전히/제 목숨을 다 마치지 못했거니/사람들아 묻지를 말아라!/이 황폐한 풍경이 무엇 때문의 희생인가를....’

현충원 제54묘역에는 장군과 소위의 묘비가 나란히 서있다. 그런데 소위의 비석에는 이름이 없다. 1950년 8월 25일 황규만 장군(당시 소위)은 안강 지구 전투에서 지원을 나온 김 소위의 이름도 알지 못한 채 치열한 전투에 함께 투입되었다. 이틀 후 8월 27일 김 소위는 전사하였다. 6.25전쟁이 끝나고 제1군 사령부에 근무하던 황규만 대령은 가매장되었던 김소위 유해를 어렵게 찾았지만 인적 사항이 확인되지 않아서 국립묘지에 안장할 수 없었다. 수차례 청원을 내고 애쓴 끝에 1964년 5월 육군소위 김ㅇㅇ의 묘로 안장할 수 있었다.

1976년 예편한 황규만 장군은 신원 확인을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마침내 1999년 유가족과 연락이 되고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의 이름은 김수영이었다. 현충원 측에서는 전쟁의 아픔과 전우애를 기리기 위해서 유가족의 동의를 얻어 비석은 그대로 두고, 묘석에만 이름을 새겼다. 황규만 장군은 2020년 6월 자신의 소원대로 김소위 곁에 묻혔다.

제50묘역에는 강영만, 영안 형제의 묘가 있다. 1949년 입대한 동생(영안)에 이어, 1951년 형(영만)이 자원입대하였다. 동생 영안 이등상사는 옹진전투, 인천상륙작전, 태백산 지구 토벌작전에 이어 1952년 10월 저격능선 전투에서 전사했고 국립묘지에 묻혔다. 형 영만 하사는 횡성 전투, 호남지구 토벌작전에 이어 1951년 8월 제2차 노전평 전투에서 전사했다. 2014년 인제 1052고지에서 그의 유해가 발굴되었고 동생과 나란히 묻히게 되었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6월 6일은 현충일이었다. 보훈의 본뜻은 국가 공동체의 존립을 위하여 희생한 분들에게 변함없는 국가적, 국민적 보답을 통하여 나라 사랑 정신을 높이고 명예 존중의 가치관을 확산시킴으로써 국가의 융성을 뒷받침하는 데 있다. 보훈의 궁극적 목적은 기억을 통한 국민의 연대이다.

이범희 목사

우리나라 현충일은 1953년 6월 6일 육, 해, 공군 합동 전몰장병 추도식으로 시작되었다. 1956년 6월 국가기념일인 현충기념일로 정하고 1975년 현충일로 개칭되었다. 매년 6월 6일 10시 정각에 전국에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을 위한 사이렌 소리에 맞추어 모든 국민이 1분간 묵념을 한다. 이를 통해 희생자의 명복을 빌고, 복기하고, 추모하며 그의 정신을 이어받는다는 애국충절의 결단을 하는 의식이다. 우리에게 자유를 주고 호국의 별이 되신 분들의 소원대로 전 국민이 보훈으로 하나 되고 번영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이범희 목사(6.25역사기억연대 부대표, 6.25역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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