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보호의 죄는 언제 나타날까? 사랑받고 싶은 합당한 목마름이 상처받아서는 안 된다는 요구를 만들어 내면서, 그 요구가 다른 사람들과 사랑의 관계를 맺고 싶은 마음을 누를 때다. 자기 보호를 위한 그 요구가 타인의 행복을 위해 타인에게 기꺼이 다가가려는 우리의 의향을 방해할 때, 우리는 사랑의 법을 어기게 된다. 이 일은 종종 아주 교묘하게 이루어져서 자기 보호가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자기 보호적 관계 방식을 알아보기가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너무나 정상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며, 전통적이고 매력적인 기독교의 옷을 통해 쉽사리 위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파하라. 탄식하라. 고통스러워하라. 열망하라. 그러나 기쁨과 생기에 대한 내용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알라. 기쁨과 생기를 맛보는 것은 지금도 가능하고 그 맛은 훌륭하다. 다른 쪽은 보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라. 좌로든 우로든 빗나갈 때는 그 사실을 시인하라. 그 실패가 죄임을 제대로 인식하라. 예수님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 그것을 고백하라. 그분은 우리를 거듭 또 거듭 용서하시고 회복시켜 주시려고 간절히 기다리신다.
래리 크랩 – 영적 가면을 벗어라
세상이 말하는 예언과 성경이 말하는 예언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상이 말하는 예언은 ‘미리 예(豫)’를 씁니다. 즉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말하는 것을 예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예언은 ‘미리 예’가 아니라 ‘맡길 예(預)’를 씁니다. 즉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선포하는 것을 예언이라고 합니다. 세상이 말하는 예언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말하는 것으로 대표적인 것이 노스트라다무스 예언 같은 것입니다. 100년 후에, 200년 후에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미리 말하는 것을 예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예언은 일차적으로 미래에 일어날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말씀 가운데 일부가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예언은 그 말씀이 선포되는 당대에 일차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양진일 – 예언서 강의
어느 날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라는 찬양을 듣는데 갑자기 그동안 내가 힘들게 한 이들이 떠올랐다. 교회에 다닌다는 이유로 조롱하고 핀잔했던 이들, 이런 선배를 미워하기보다 기도했을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과 함께 그간의 변화를 말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타 부서로 뿔뿔이 흩어진 이들에게 일일이 전화해 부끄럽지만 용기 내어 고백을 했다. ‘주님, 잘못했습니다. 성령 체험하게 해 달라고 했으면서 제가 또 의심했습니다. 주님을 있는 그대로 믿게 해 주십시오. 아니 그대로 믿겠습니다.’ 신앙생활은 끊임없이 시행착오의 연속인 것 같다. 몇 번의 롤러코스터를 타고 주님이 계신 목적지까지 가는 과정인데 아마도 그날 수련회에서 회심하면서 첫 번째 롤러코스터 구간을 지나간 것 같다. 분명한 것은 한 코스의 구간을 지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한 단계 성숙해진다는 것이다.
박영산 – 허기진 내 인생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