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 연락을 했다. 성경을 읽고 있는데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는 것이다. 그가 의문을 가진 구절은 고전 2:16절의 말씀이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질문을 한 사람이 너무도 기특하고 고마웠다. 성경을 대하는 모습이 나와 흡사했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한때 내게도 큰 궁금증을 가지게 했던 내용이다.
이런 구절을 읽으면서 질문을 제기하지 않는 이가 있다면 성경을 읽는 자세에 문제가 많음을 스스로 자각하고 반성해야 한다. 과연 이 구절이 우리에게 주는 의문점은 무엇일까?
두 가지다. 우선 여기에 ‘주를 가르친다’는 말이 나오는데, 세상에 주를 가르칠 자가 아무도 없다는 점에서 이해가 가질 않는다. 하지만 너무도 당연한 얘기를 가지고 질문을 던지고 있으니 쉽게 이해가 가질 않아야 정상이다.
다음으로는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란 내용이 앞에 나오는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란 내용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먼저 ‘주를 가르친다’는 말부터 하나씩 해결해보기로 한다. 본절에서 바울은 긍정적 질문 형식을 취하여 부정적 답변을 이끌어내기 위해 ‘수사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 구절은 사 40:13-14에 나오는 “누가 여호와의 신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그가 누구로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공평의 도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주었느뇨”를 인용한 것이다. 모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우월성을 찬송하는 맥락 속에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생각이 인간의 지식을 초월하기에 인간에 불과한 존재가 주를 가르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무도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가 없고, 그렇기에 아무도 주를 가르칠 수 없다는 뜻이다.
다음은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에 대한 내용을 살펴볼 차례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여기서 우리말 번역의 문제점은 “우리가”라는 단어에 있다. 이것을 “우리는”으로 바꾸어보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다른 사람은 불가하겠지만, 그러나 ‘우리는’(중생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이렇게 수정하고 나니 문맥이 통함을 본다. 예수님 이전 시대에는 아무도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바로 하나님의 마음인 ‘예수님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강림하시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없었지만, 이제 중생한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성령께서 각 사람의 영에 머물러 계시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마음’은 사 40:13에서 ‘여호와의 신’을 뜻하는 말로 ‘성령’을 가리킨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는 것은 ‘성령을 마음에 모셨다’는 뜻이다. 거룩한 성령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계시며, 사도들의 가르침을 통해서 자기 백성들에게 그것을 계시하셨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것처럼 가르치고 성령께서 생각하시는 것처럼 생각한다.
15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중생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께서 인생을 판단하시듯이 세상 사람들을 판단한다는 말이다.
어떤 사람이 시골길을 운전해가다가 자동차 타이어에 펑크가 났다. 무더운 여름날, 땀을 뻘뻘 흘리면서 펑크 난 타이어를 갈아 끼우고 있었다. 이것을 길가 정신병원에 있는 한 환자가 창문으로 내다보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운전자는 열심히 작업을 하였다. 펑크가 난 타이어의 볼트를 풀고 펑크 난 타이어를 빼냈다. 스페어타이어를 끼우고 이제 볼트를 조이기만 하면 된다.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그런데 아뿔싸, 빼어놓았던 볼트를 잘못 건드려서 네 개를 몽땅 시궁창에 빠뜨리고 말았다. 막대기로 아무리 시궁창을 후집어도 찾을 수가 없었다. 자동차 타이어 한 짝을 끼우지 않고 세 바퀴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쩔쩔매고 있었다. 그 모습을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던 정신병원의 환자가 한 마디를 했다.
“다른 세 바퀴에서 볼트를 하나씩 빼서 갈아끼운 바퀴를 고정시키고 정비소가 있는 시내까지 조심해서 나가봐!”
와우, 정말 그러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너무나도 고맙고 신기해서 운전자가 이렇게 그 환자에게 물었다.
“당신처럼 똑똑한 사람이 왜 정신병원에 입원하셨습니까?”
그러자 그 환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야, 임마! 내가 미쳐서 여기 있지, 너처럼 바보라서 여기 있는 줄 알아?”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있는 환자라고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는 아니다. 그 사람은 보통사람이 흉내도 낼 수 없는 천재일 수도 있다. 하나님의 영을 모시고 있는 사람 역시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이다. 성령에 미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신분과 상태에 걸맞는 삶을 잘 살아야 한다. 더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조롱받는 바보가 아니라 놀람과 존경의 대상으로 인정받는 삶을 보여주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
#신성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