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공공신학적 실천과제(1)

오피니언·칼럼
칼럼
황경철 박사(국제복음과공공신학연구소)
황경철 박사.

초록

70년대 이후 성장과 부흥을 경험했던 한국교회는 2000년대를 지나면서 정체를 넘어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기독교의 감소와 위기는 목회자의 윤리적 타락, 교회의 세속화와 공적 책임 저하, 신자의 이원론적 신앙과 무관하지 않다. 본 고는 이 점에 주목하면서 한국교회가 성장기를 지나 쇠퇴기가 아닌 성숙기로 나아가기 위한 공공신학적 실천과제를 논의할 것이다. 공공신학이란 복음이 신자의 내면이나 예배당 안에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는 우주적이고 총체적이라는 성경적 주장이다.

구체적으로 세 가지 측면에서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목회자의 설교적 측면에서 ①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를 선명히 드러내는 설교, ② 칭의와 성화를 균형있게 강조하는 설교, ③ 성경적 종말론에 기초하여 문화명령과 재림신앙을 강조하는 설교, ④ 지시하는 설교가 아닌 공감하는 설교가 필요하다. 둘째, 지역교회의 대사회적 측면에서 ① 지역사회와 호흡하는 교회, ② 상식이 통하는 교회, ③ 복음의 공공성과 공동체성을 교육하는 교회가 되도록 힘써야 한다. 셋째, 성도 개인의 일상적 측면에서 ① 듣는 데서 시작하자, ② 있는 데서 실천하자, ③ 은혜와 공의를 지혜롭게 실천하자는 것이다.

십자가 사건을 통해 주어진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와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 사이에 선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가정과 직장과 도시 속에서 공공신학적 실천을 통해 펼쳐나갈 때, 교회는 세상에 소망과 대안과 신뢰를 주는 건강한 교회로 기능할 것이다.

[주제어: 하나님 나라, 공공신학, 복음의 총체성, 교회의 공적 책임, 문화명령, 공동선, 공동체]

Ⅰ. 들어가며

최근 공공신학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진행되면서 복음의 공공성 회복과 교회의 공적 책임이 부각되고 있다. 목회데이터연구소의 발표에 따르면, 한국교회가 집중해야 할 분야 1위로 ‘자기 교회 중심에서 벗어나 한국교회 전체를 바라보는 교회의 공공성’이 지목되었다. 코로나 19를 겪으면서 한국교회의 대사회 신뢰도가 32%에서 21%로 급락한 것은 교회의 대사회적 역할과 공적 책임이 얼마나 절실한지를 반영한다. 예일 대학의 볼프는 그리스도인은 결코 자신들만의 고유하고 배타적인 문화적 영토를 가져본 적도 없고, 가질 수도 없다고 말한다. 물론 교회는 그 경계를 갖고 있지만, 교회 공동체의 경계란 뚫고 들어갈 수 없을 정도의 높은 성벽과 같아서는 안 되고 투과성 있는 소통을 위해 열린 곳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승구는 공공신학이란 “온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증언하는 교회의 신학”이라고 설명한다. 헤티 랄레만 윈켈은 “공공신학이란 살아있는 종교적 전통이 그것의 공적 영역을 – 일상 삶의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영역을 – 관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공공신학에 대한 다양한 정의들이 있지만, 공통분모와 같은 핵심사항은 복음이 미치는 범위가 신자의 내면을 넘어 일상으로, 예배당을 넘어 피조계 전체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은 그것을 믿는 신자에게 그리스도와 연합을 통해 주어지는 칭의와 구원과 영생과 같은 지극히 사적(私的)인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복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주적으로 성취된 새로운 통치, 새로운 시대, 새로운 질서라는 측면에서 매우 공적(公的)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간 존재의 전 영역 중에서 만물의 주권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내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으시는 곳은 단 한 치도 없다”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지적은 교회가 이 땅에서 수행할 공적 책임을 환기시킨다.

아쉽게도 작금의 한국교회는 1970년대 이후 폭발적 부흥과 성장을 경험했지만, 그 이면에는 기복신앙, 번영신학, 이원론적 신앙으로 얼룩져있다. 만물은 충만케 하도록 부름받은 영광스러운 교회는 지역사회와 호흡하지 못하고, 복음의 총체성을 발산하지 못하고 있다. 피터 버거는 현대 사회에서 종교가 사회 영역에서 후퇴하여 개인의 영역에 머물게 되는 현상을 두고 사사화(privatization)된 종교가 개인의 선택이나 선호의 문제로 전락했다고 지적한다.

올해 4차 로잔대회를 앞두고 “샬롬과 건강도시, 그리고 로잔운동”이라는 심포지움을 개최한 것은 매우 적실하다. 샬롬은 하나님 나라의 가장 적절한 산물로서, 예수님의 구속을 통해 이루어진 하나님과, 자신과, 이웃과, 자연과의 회복이 성경적 전인건강과 건강도시로 나타난다. 본 논문은 하나님 나라의 샬롬으로 요약되는 복음이 모든 도시와 사회에서 총체적으로 드러나기 위한 교회의 공공신학적 과제가 무엇인지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 글은 공공신학의 정의, 특성, 역사 등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을 것이다. 논자는 전인적이고, 총체적인 공공학을 수행하는 주체로서 교회가(출 23:9; 암 5:24; 마 5:16; 엡 1:23 등)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할 과제를 세 가지 측면에서 논의하고자 한다. 지금까지 공공신학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어 온 것은 사실이나 성경신학적, 조직신학적 논의에 집중되어 있었다. 실천적 측면에 대한 논의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목회자의 설교나, 지역교회 차원이나, 성도 개인의 측면에서 실행할 수 있는 구체적 제안은 없었다. 이 글이 이 부분에 있어서 한국교회에 다소나마 기여할 것으로 사료된다.

Ⅱ. 한국교회의 공공신학적 실천과제

 1. 목회자의 설교적 측면

교회가 공공신학의 주체라고 할 때, 여기서 교회는 물론 건물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닐 것이다. 교회는 신자들의 모임이요, 그 모임을 구성하는 신자 개개인이 몸된 교회의 본질적 요체이다(고전 1:2; 3:16). 이들이 예배당 안은 물론 예배당 바깥인 가정, 직장, 시민사회에서 복음의 풍성함을 드러내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엇일 필요할까? 성경적 가치관이 신자에게 깊숙이 체화될 때, 삶에서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엡 4:13). 목회자는 은혜의 방편인 말씀, 곧 강단에서 선포하는 설교를 통해 이러한 가치관을 전달하여 성도를 온전하게 세운다(엡 4:12). 그렇다면 한국교회 공공신학적 실천과제의 첫 번째로 목회자는 어떻게 설교를 준비해야 할까?

1)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를 선명히 드러내는 설교

목회자가 성도들에게 공공신학을 가르치기 위해 모든 설교를 공공신학적으로 할 필요는 없다. 아니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오히려 기존의 설교를 하나님 나라와 구속사적 맥락에 정위치 시키려는 거시적 접근이 요구된다. 목회자는 지금까지 해오던 설교의 내용과 방식으로 청중에게 설교할 수 있다. 하지만 성도들이 설교를 통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이야기에 자신의 삶이 포섭되어 있음을 깨닫고, 하나님 나라가 일상에서 구현되도록 폭넓은 시야를 열어주는 설교자의 의도적 노력이 요구된다. 설교자는 성도에게 단순히 공공신학적 삶을 촉구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창조로부터 종말로 펼쳐지는 하나님 나라의 길목에 서 있음을 설교할 필요가 있다. 성도는 그 도상(道上)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정체성’과 ‘사명’을 발견한다. 그는 설교를 통해 예배당을 넘어 일상에서, 주일을 넘어 주중에도 복음을 살아낼 수 있는 로드맵과 동력을 공급받아야 한다. 설교자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성도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계시는 하나님을 일주일 168시간 중 주일예배 한 시간만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 자신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고전 10:31) 거룩한 산 제물이자 예배자임을 자각한다(롬 12:1).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을 따르는 성도가 공적인 참여를 할 때 예수님의 표준과 기준을 따르는 것은 물론, 성령님의 능력으로 일하도록 부르신다. 유태화는 하나님 나라를 가장 명징하게 담지하는 교회와 보편 질서 안에 드러내는 시민사회에서 여전히 통치,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언급하면서, ‘하나님 나라’와 ‘공공신학’의 상관성을 깊이 강조한다. 그래서 공공신학은 미래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잃지 않는 움직임이라고 말한다.

설교자는 성경의 중심 주제인 ‘하나님 나라’라는 거대한 우산 아래서 세상의 창조, 타락, 구원, 종말(새 창조의 완성)로 요약되는 ‘구속사’(redemptive history) 한복판으로 성도를 초대한다. 하나님 나라라는 거대한 우산 아래와 구속사라는 든든한 토대 위에서 성도는 자신의 정체성과 현 위치를 파악한다. 이미 성취된 하나님 나라 안에서 위로와 안식, 담대함과 소망을 얻는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본향을 사모함으로 거룩과 경건을 연마하고, 인애와 공의를 실천한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 개념은 성경적 공공신학을 논의하기 위한 신학적 토대가 된다. 아쉽게도 지금까지 한국교회에서 ‘천국 또는 하늘나라’에 대한 이해는 성도가 죽은 후에 비로소 가게 되는 미래의 천당 정도로 간주되어 왔다. 이러한 이해는 성도로 하여금 천국의 현재성(마 12:28)을 간과하는 편향된 시각을 초래했고, 그 결과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고 천국을 살아내기보다는 죽음 이후의 천국만을 고대하는 신앙을 강화시켰다.

요컨대, 목회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큰 그림을 강단에서 선포함으로써 성도가 매일의 일상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이끌어야 한다. 복음이 신자 개인의 삶이나 교회 안에서 만의(수요예배, 금요기도회, 구역모임, 교사, 헌금 및 다양한 봉사 등) 헌신이 아니라 신자와 연결된 시간, 재정, 취미, 건강, 연애, 가정, 학교, 직장, 사회, 생태계 모든 영역과 총체적으로 연동된다는 사실을 알려 주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은 공공신학을 실천할 수 있는 안목과 지평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김광열은 웨스트민스신학교의 클라우니와 하비콘의 총체적인 복음전도를 인용하며, 거듭난 사람의 신앙은 개인의 내면적 차원에 머물지 말고, 재창조 중인 세상 속에서 회심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톰 라이트의 칭의론에 대해서는 여전히 평가가 엇갈리긴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의 진술은 이러한 이해를 선명하게 부각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이야기한 내용을 요약하면, ‘구원’의 온전한 의미는 (1) 단지 ‘영혼’이 아니라 인간 존재 전체에 대한 것이며, (2) 미래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현재에 대한 것이며, (3)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그리그 우리를 위해서 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통해서 하실 일에 대한 것이다. 우리가 이 점을 분명하게 이해한다면 우리는 교회의 전체적인 사명을 위한 역사적 근거를 다시 발견하게 될 것이다.

신자가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때, 그의 신앙은 일상적 삶과 괴리된 이원론적 신앙으로 흐르기 쉽다. 하나님 나라를 죽은 다음에 가는 곳으로 오해하니 현실 세계에서 세상의 쾌락을 좇아간다. 때로는 불신자와 똑같이, 때로는 불신자보다 교묘하게, 때로는 불신자보다 강렬하게 추구한다. 이것이 우리 시대 한국교회가 마주한 슬픈 자화상이다. 목회자는 이 점을 고려하여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성’을 설교에 반영할 필요가 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을 통해 성도는 복음이 사사화(私事化, privatization)될 수 없는 공적이고, 우주적이라는 사실을 확신한다.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긴장성 속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실천한다.

설교자가 하나님 나라의 빛 아래 드러난 복음의 풍성한 현존과 총체적 갱신을 제시할 때, 성도는 일상에서 복음의 부요함을 누릴 뿐 아니라 ‘지금 여기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도록 격려받는다. 다시 말해, 공공신학에 부합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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