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140주년 인물 연구… 1970~80년대 고영근·김치영 목사

예장 통합 제108회기 한국교회사포럼 열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총회가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 그레이스홀에서 제108회기 한국교회사포럼을 ‘한국교회 선교 140주년 인물연구: 1970-80년대 목회자 연구(고영근, 김치영 목사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개최했다. ©최승연 기자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총회(총회장 김의식 목사)가 11일 오후 서울 한국교회백주년기념관 그레이스홀에서 제108회기 한국교회사포럼을 ‘한국교회 선교 140주년 인물 연구: 1970~80년대 목회자 연구(고영근, 김치영 목사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개최했다.

행사는 개회예배, 강의 순으로 진행됐으며 예배는 김선인 목사(총회 역사·선교유산회복위원회 서기)의 인도로 드려졌다. 이대원 장로(총회·선교유산회복위원회 회계)가 대표기도를 드렸으며 이어 김영걸 목사(총회 부총회장)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로마서 8:37)라는 주제로 설교했다.

이어진 강의 시간은 최윤석 목사(총회 역사·선교유산회복위원회 전문위원)의 사회로 진행됐으며 고성휘 교수(고영근목민연구소 이사장, 성공회대학교 인문사회학술연구)가 ‘하나님의 정의를 향한 목민 고영근의 사역: 1970~1980년대를 중심으로’, 손산문 교수(총회 역사선교유산회복위원회 전문위원, 영남신대 겸임교수)가 ‘김치영 목사, 그는 누구인가?: 그의 목회와 신학에 대한 한국교회사적 조명’이라는 주제로 각각 강연했다.

고성휘 교수는 “목민 고영근은 1958년 임실 강진교회 사역을 시작으로 대전 백운교회, 북아현교회의 지역목회와 1970년대 초 부흥사협의회, 기독교선교회의 교역자교육을 통한 민족목회에 헌신했다. 목회자 교육과 부흥회를 통한 복음 선포에 헌신하던 그는 박정희 정권에 엄중한 경고를 하면서 지역을 넘어 민복으로, 민족을 넘어 척박한 광야의 삶을 살게 되었다. 이로써 붙은 그의 별명은 ‘민족화투사’ 혹은 ‘한국의 아모스 선지자’”라고 했다.

그는 “그러나 강해 보일법한 그의 예언자적 행보 속에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는 목자의 마음이 내재되어 있었다. 고영근의 목민목회는 개별자에 대한 존중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의 언어로 표현된 개인주의의 소중함, 개인이 누려야 할 자유와 평등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인간의 권리임을 표명했기에 그는 1970~1980년대 권력이 개인에 가하는 폭력에 강력한 저항을 했다”고 했다.

고 교수는 “개별자로서의 민중에 천착한 고영근 목사는 소수자로서의 민중에 대한 애통함을 가지고 사역했으며 그 사역을 완수했다. 그는 당하고만 있는 소수, 나 한 사람의 가치조차 주장할 수 없을 정도로 힘없는 민중의 가슴에 하나님의 정의가 확고하게 자리잡을 수 있도록 평신도교육에 온 생을 바쳤다”고 했다.

이어 “그에게 있어 하나님의 정의는 조국의 자주화, 민주화, 통일의 상위개념이다. 전 사역을 통틀어 하나님의 정의가 관통하는 사역을 때로는 위험을 무릅쓰고 행하였고 때로는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행했다. 하나님의 정의를 거시적 관점뿐만 아니라 미시적 관점으로 이끌어 내어 개인 삶에서의 정의 확립부터 내 가정, 내 이웃, 내 사회, 내 국가로 확대되어 가는 ‘정의화’를 강조했다”고 했다.

고 교수는 “그는 선교사업 보고를 철저하게 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선교비 1만원도 지나치지 않고 편지로 설명하고 영수증 처리를 하고 보고했다. 그의 선교사업보고서는 1968년부터 한 해도 빠지지 않고 보고되었다. 선교사업 보고서를 보면 지출내역의 절반은 문서선교이며 나머지 절반은 고난받는 자들을 찾아감에 있었다. 오랜 기간 ‘찾아감’으로 위로와 사랑의 사역을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없었다. 그 역시 돌아오는 무언가를 바라지 않았다. 돌아옴이 없어도 내가 가진 것을 내어주는 일은 그의 목민선교인 ‘내어주는 선교’”라고 했다.

끝으로 그는 “고영근 목사는 보수 대형교회를 향해 정의 없는 사랑을, 기독교 인권 운동가를 향해 사랑 없는 정의를 지향해야 함을 강조했다. 그는 실천이야말로 가장 큰 사랑임을, 정의임을 60년 사역을 통해 보여주었다”고 했다.

손산문 교수는 "김치영 목사는 평생 지역에서 활동한 목회자이자 신학자이다. 때문에 그는 유명하지 않았지만 결코 무명하지 않은 사람이었다"고 했다. ©최승연 기자

이어 ‘김치영 목사, 그는 누구인가?’라는 주제로 강연한 손산문 교수는 “김치영 목사는 평생 지역에서 활동한 목회자이자 신학자이다. 때문에 그는 유명하지 않았지만 결코 무명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많은 제자와 후학들이 오늘도 그의 신앙과 신학 정신을 기억하며 각계각층에서 그를 따르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역사 속에서 우연적 개인이 아니라 역사적 개인이라 할 만하다”고 했다.

그는 “한국교회는 140년 역사를 하나님께 함께했으며 이런 가운데 우리는 많은 믿음의 선각자들을 배출했고 많은 인물이 훌룡한 생애와 업적으로 회자되면서 후손들의 칭송을 받았다. 특히 개화기부터 시작해 일제강점기와 해방기를 거치는 격동의 세월 동안 민족혼을 일깨우며 나라를 일깨웠던 선각자들이 있었다. 뒷날 역사적 조명에 의해 이들의 사상과 행적이 기념 또는 연구되면서 역사의 전면에 부각되었다”고 했다.

손 교수는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 삶의 족적이 역사적 개인으로 평가될 만함에도 그에 대한 조명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경우도 있다. 이러한 경우는 주로 지역에서 활동한 인물들에서 많이 발견된다. 김치영 목사 또한 그 범주에 해당된다”며 “그의 신학과 목회는 한국 교회사적으로도 상당한 의미를 가진다. 특히 현재 한국교회와 가장 근접한 가까운 과거의 인물이므로 그의 신학과 목회가 주는 의미는 각별하다. 그가 남긴 신학과 목회 사역에서 우리는 귀한 신앙 정신 유산을 발견할 수 있다. 신앙은 전승되어야 한다는 사명에서 우리 시대는 그의 신학과 신앙을 의미있게 조명해보고 그 정신을 한국교회 유산으로 남겨야 할 방안을 모색해 봐야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했다.

이어 “일반적으로 이전 세대가 남긴 신앙의 역사적 유산은 유형의 것과 무형의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예부터 보존되고 있는 예배당과 같은 건조물을 비롯해 신앙 서적 등의 각종 유물이나 유품들을 말하며, 후자는 과거 믿음의 선진으로부터 오늘 우리에게 전하는 신앙 삶, 신앙 정신, 신앙 운동 등이라 할 것”이라며 “그동안 한국교회는 이러한 과거의 신앙 유산들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특히,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있음에도 인식의 부재, 성장 논리와 현실적 필요로 인해 훼손 또는 멸실되어 버린 것이 많았다. 유·무형 유산이 존재할 때 신앙은 더욱 살아있는 역사로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점에서 이러한 결과는 안타까운 일”이라고 했다.

손 교수는 “200년을 향해가는 한국교회 역사는 양적 성장에만 집중하다 질적 성숙을 소흘히 했으며 그 결과 많은 문제점이 야기 되었고 이에 따른 반성적 성찰이 요구되고 있다. 소멸되고 있는 유·무형 신앙 역사 유산을 위해 대책 방안이 강구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한국 기독교 신앙 유산이 종교적 가치를 넘어 우리 사회 근대화를 위해 가장 중요하게 공헌한 역사·문화 유산이라는 가치 정립과 그 가치에 대한 사회적 공유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러한 가치 정립과 공유는 기독교의 신앙 유산을 교회의 내적 자산에서 사회적 공공 자산으로 확장할 뿐만 아니라 이 땅의 역사와 함께한 기독교 역사 유산을 보다 효과적으로 발굴, 전승하는 대안적 방법을 모색하게 할 것”이라며 “김치영 목사의 유산은 현재 정신문화계승사업회가 조직되어 유의미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러한 인물들에 대해서는 연구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유형의 유산처럼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여 보다 체계적으로 발굴, 보전, 전승되는 방안을 모색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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