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56) 신성모독

오피니언·칼럼
설교
요10:31-42
이희우 목사

류 윌리스(Lew Wallace) 장군은 자기 친구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굉장히 기분이 나빴다고 한다. 과학 문명이 최첨단을 달리고 있는 시대에 아직도 케케묵은 성경을 믿고 있다는 사실이 기분 나쁘게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의 장군이자, 언론인, 그리고 저술가였던 윌리스는 성경의 불합리성과 모순을 지적하기 위해 성경을 손에 잡았고, 반박문을 쓰기 위해 성경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성경을 공부하면 할수록 놀라운 사실들과 부딪치기 시작했다. 고고학적으로, 역사적으로 성경 안의 수많은 자료를 갖다 놓고 성경을 연구하면서 압도할만한 성경의 놀라운 증언 앞에서 그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고집스럽게 성경에 대한 반론을 펴기 위해 책 제목을 구상하고 2장까지 써나가다가 자기 펜을 꺾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했다. 그 후 그는 그리스도와의 사랑에 빠지기 시작했고, 새롭게 발견한 예수 그리스도, 성경에 관한 충격을 담은 책을 쓰기 시작했다. 그 책이 소설로 영화로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불러일으켰던 바로 『벤허』라는 불후의 명작이다.

그렇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월리스처럼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아보고 싶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꼰대처럼 “기독교는 서양에서 들어온 종교이지만 불교는 우리 동양의 종교인데, 우리가 뭐가 아쉬워서 서양에서 온 종교를 믿냐?” 그렇게 비아냥거릴 일이 아니다. 예수님이 서양 종교의 창시자인가? 아니다.

본문에 예수님을 귀신들렸다고 하다가 이제는 신성모독한다고 생난리를 치는 사람들이 있다. 양이 되기를 거부하는 자기중심적인 꼰대, 영치, 유대인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이면 밝히라”라는 자신들의 요구에 예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그리스도가 맞다”고 대답을 하시자 신성모독이라고 생난리다. 자기 생각에 동의해 주기를 기대하다가 기대와 다르니까 충격과 극에 달한 분노로 돌을 든다. 마치 사전으로 확인해주니 “그 사전 어디 출판사 것인데?” “어느 서점에서 샀는데?” 따지는 것과 똑같다. 절대 안 믿기로 작정한 사람들, 그들은 예수님을 신성모독자로 몰고 죽이겠다고 에워쌌다. 험악하다. 그때 물러서지 않고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되물으며 당당하게 맞서셨다.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유대인들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는 말씀을 신성모독으로 여겼다. 신을 모욕했다는 것, 그래서 돌로 치려 한다. 맞다. 신성모독은 하면 안 된다. 유대교나 기독교는 인간을 신격화하는 것에는 극도의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선한 일 때문에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자칭 하나님이라는 것을 신성모독으로 여겨 돌로 치려했다(33절). 하나님의 권능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이적과 기사를 보기는 했지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절대 하나님의 아들일 수 없다고 선을 긋고 있었다.

예수님은 성경의 권위로 반박하신다.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34-35절), 성경에서 하나님이 아닌 사람에게 ‘신’이라는 말을 쓴 것을 인용하며 폐할 수 없는 성경의 권위로 유대인들의 공격을 잠재우려 하신 것이다.

이 말씀은 우리를 당황하게 할 수도 있다.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오해하지 말라. 이 말씀을 근거로 함부로 신(神)처럼 굴면 안 된다. 큰일 난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친구라고 하셨다며 우린 신의 친구, 그러면 신 아니냐 그러는데 겸손해야 한다. 예수님이 우리를 친구로 인정하시는 말씀은 맞다. 하지만 우리 입장은 언제나 종의 자세여야 한다. 끝까지 인간다움을 유지해야 한다.

이 말씀은 시편 82편에서 인용한 말씀이다.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라고 하셨지만 유대인들에게 율법은 엄격히 말하면 모세오경(תורה)이다. 그러나 넓게는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키기도 하기에 시 82편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시 82편은 아삽의 시, 하나님께서 땅에 있는 재판관들을 모아 그들도 언젠가는 심판 받게 될 것을 경고하시는 재판정의 모습을 다룬 말씀이다. 1절에 보면 “하나님은 신들의 모임 가운데에 서시며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에서 재판하시느니라”라고 했고, 6-7절에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그러나 너희는 사람처럼 죽으며 고관의 하나 같이 넘어지리로다” 그러셨다. 여기서 ‘너희는’ 이스라엘의 재판관들, 하나님의 뜻을 위임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신’(神)이라고 불렀다. 그만큼 신중하면서도 또 권위가 있어야 한다는 것, 그 순간만큼은 자신이 신이 되는 것이다. 공정한 재판을 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당신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에게 조차도 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내용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독생자인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이 무슨 신성모독이냐 그러신 거다. “성경을 잘 안다고 하면서 그것도 모르느냐?” “너희가 성경보다 더 권위가 있냐?”, 예수님의 역공이다. 그러면서 강조하신 말씀이 “나는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일만 보아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 아니냐?” “이게 무슨 신성모독인가?” 그러신다.

신성모독은 안 된다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이 말씀을 신처럼 되려는 인간의 시도에 대한 경계의 말씀으로도 받고 싶다. 왜냐하면 그런 시도가 많이 있었고 지금도 있기 때문이다. 먼저 중세의 성자, 성인 숭배가 그렇다. 가톨릭은 그들을 신 취급했다. 그래서 그들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결국 성모 마리아는 거의 신에 가깝게 되었고 그들은 아니라고 부인하지만 사실상 마리아교가 되다시피 했다. 존경의 의미를 넘어선 것이다. 가톨릭은 성물 숭배, 성화 숭배, 성인 숭배 집단, 교회니까 비슷한 게 아니고 우상숭배 집단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성물이나 성화나 성인들을 우상숭배로 간주했다.

기독교도 이런 우상숭배와 무관하지는 않다. 칼빈(John Calvin)은 죽을 때 절대 묘비를 쓰지 말라고 유언했다. 하나님의 영광을 신앙의 중심으로 삼았기에 인간이 영광 받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묘비도 없이 제네바의 한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런데 칼빈이 1564년에 죽었는데 그로부터 266년 후에 이 유언이 깨지고 말았다. 칼빈을 흠모했던 어떤 제자가 칼빈을 너무너무 사랑하는 나머지 칼빈의 묘을 찾아서 그 앞에다 묘비를 세웠다. 물론 칼빈의 유언 때문에 그의 이름 이니셜인 ‘J. C.’만 새겨놓기는 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169년이 지난 1999년에 제네바 시의회가 칼빈 묘를 대대적으로 성역화하여 정식 묘비명을 세웠다. 관광 수입을 고려한 조치인 것 같아 더 기가 막히다. 아마 칼빈이 벌떡 일어나 “뭐하는 짓이냐” 소리치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문제는 인간에게 끊임없이 신격화하려는 욕망이 있다는 것이다.

루터(Martin Luther)와 관련해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 19, 20세기 독일의 민족주의가 발흥할 때 루터는 신과 같은 존재였다. 1917년 베스트팔렌의 대중 달력에 실린 시의 일부로 알려진 글을 보면 “루터 영웅이여, 당신은 모루(anvil)에 서 있도다. 분노하여 꾸짖는 소리에 헐떡이면서. 우리 모든 독일은 당신과 한편이고 당신 대장간의 조수입니다.” 루터는 거의 성자의 반열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극도의 비신성화도 있다. 이것도 좋은 건 아니다. 어떤 목회자는 인간이 박수받을 수 없다며 하늘을 향한 제스처를 취하기도 한다. 상을 받거나 경기에서 이겼을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도 상투적인 감사의 표현이 되었다. 말 그대로 하면 자신이 영광 받지 않겠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말로 바꾸며 그 영광을 즐긴다. 좀 편해질 필요가 있다.

누가 뭐래도 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이시다. 예수님도 성자 중 한 분일 뿐이라는 사람들도 있지만 유럽을 여행해보면 이미 사람들은 에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했었음을 알 수 있다. 대성당들의 돔 천장을 가득 채운 예수님의 모자이크들이 그 증거다. 유럽 도시 곳곳에 있는 대성당의 높은 첨탑들은 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찬양한다. 그 시대에 이런 문화가 만들졌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요즘이야 순식간에 분위기가 확산될 수 있지만 중세 때라면 얘기가 다른 것 아닌가?

지금도 예수님을 인간화하려는 시도는 심심찮게 벌어지고 있다. 이성을 억압하는 전통과 신학에 대한 비판은 이해한다. 비평을 통해 예수님의 새로운 측면들이 알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거부하는 순간 기독교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더 이상 신성모독하지 말아야 한다.

그 일은 믿으라

예수님은 고정관념과 편견으로 가득찬 답답한 영치들이지만 유대인들의 믿음을 촉구하는 마지막 논거를 제시하신다.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37-38절). “나를 안 믿는 것? 좋다. 그건 그렇게 하더라도 내가 아버지의 일을 행하거든 그 일은 믿으라”, 미련과 망상에 사로잡혀 현실을, 당신이 행하시는 일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유대인들에게 돌을 들게 만들었던 그 말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 그 말씀을 바꾸어서 또 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인지 아닌지 딱 잘라 대답하기를 원했던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직답은 하시지 않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크고 중요한 말씀을 하신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라는 말씀이다. 믿으면 보인다. 믿으면 알게 된다는 거다.

하지만 그 영치들은 끝내 마음을 열지 못한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가 새롭게 주어지고 있는데 도무지 보지를 못한다. 지동설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는데 천동설에만 갇혀 있다. 엇박자가 나고 불안해진 그들, 요한은 어김없이 그들이 다시 예수님을 잡고자 했다고 전한다. “그들이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39절).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하신 말씀의 연장선상에서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은 당신을 “선한 목자”라 하셨다.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목자, 이게 핵심이다. 목숨을 버리시는 이유는 양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과 하나이시기 때문에 구원하실 수 있다는 뜻, 그 관계성이 구원의 가장 확실한 보장이고 보증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신 아들이 아니라면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가 아니라면 절대 할 수 없는 일, 그래서 예수님은 돌로 치려는 사람들 앞에서도 당신이 하나님과 하나라는 사실을 확실히 하심으로써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구원의 확신과 평안과 기쁨을 주려 하신다.

최고의 확신과 안심을 주는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라는 말씀보다 더 의지가 되는 것이 뭐가 있겠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과 하나이시다. 이 말씀은 39절에서 확인이 된다. “그들이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에워싼 유대인들이 잡으려고 했는데 예수님이 어떻게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셨는지 우리는 모른다. 다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스스로 잡히시기로 작정하시지 않는 한 세상 그 누구도 잡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의 양인 우리도 마찬가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해있어 그가 지키시고 그 뒤에 예수님과 하나이시며 만물보다 크신 아버지 하나님이 지키시고 있는 한 이 세상 그 누구도 우리를 해할 수 없고, 그에게서 빼앗을 수도 없다. 유대인들이 아무리 예수님을 부인하고 정죄하고 욕하며 함정에 빠뜨리려 해도, 심지어 돌로 치려 해도 잡을 수 없었던 것처럼 이 세상이 주의 몸 된 교회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비방하고 돌팔매질하며 무너뜨리고 짓밟고 별짓 다 해도 결코 그 뜻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그의 양이고 그분이 우리의 목자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나님과 하나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의 구원과 안전과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확실하게 보장된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공격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은 예수께 속한 양이 아니기 때문에 공격할 수 있다.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 아니기 때문에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세상으로부터 무수한 공격을 당했던 사도 바울은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8-10)고 했다. 그 이유가 되는 말씀이 바로 요한복음 10장 28-29절이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당당하게 이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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