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켈러는 유신진화론자인가? 아니면 창조론자(오래된 지구론자)인가? 이 문제는 그다지 혼란스럽게 여길 문제는 아니다. 팀 켈러가 아티클(aticle)의 서두에 제시한 전제만 살펴보더라도 그가 유신진화론자라는 사실은 너무도 명백하게 알 수 있다. 단지 그는 자신의 유신진화론 사상을 기존의 복음주의 노선에 서 있는 성도들에게, 좀 더 부드럽게 거부감 없이 접근하려고 할 뿐이다. 우리는 여기서 그의 전제 두 가지만 살펴보고자 한다.
첫 번째 전제는 진화론을 과학의 위치로, 과학을 진리의 위치로 승격시켜 신앙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전개한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서구 문화권의 많은 기독교 신자들은 과학을 통해 가능해진 의학적, 기술적 진보에 감사함을 느낀다. 그들은 과학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견해를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과학이 진화에 대해 말해주는 사실들과 진화에 대한 전통적인 신념들을 조화시킬 수 있을까?”
여기서 팀 켈러는 ‘과학’과 ‘기술’을 혼돈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서구 문화권의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과학을 통해 주어진 혜택을 긍정하는 말로 시작한다. 과연 오늘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누리는 다양한 혜택은 과학이 준 것인가? 아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과학기술”이 준 혜택이다. 과학철학자 장하석 씨의 지적처럼 폭탄이나 인터넷, 유전공학, 우주탐험 등은 “과학이 아니라 기술” 발전이 준 결과다.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기술은 과학을 응용한 결과이긴 하지만 과학 자체와는 다르다”고 한다1). 우리는 이 부분을 명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그러면 과학과 기술의 차이는 무엇인가?
과학은 특정한 이론에 의거하여 관측하고 실험한 것을 수학적으로 산출해 낸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보자. 16세기 때까지만 하더라도 유럽의 대부분 사람들은 천동설을 과학으로 여겼다. 천동설을 과학으로 여기게 된 이유는 상당수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처럼, 종교적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지구 중심설 철학에 따라, 하늘이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말 그대로 ‘설’(說/ism), 혹은 ‘철학’이었다. 그런데 그리스 수학자이자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AD 83년경~168년경)에 의해 이 철학이 과학으로 승격되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전제로, 하늘을 관찰하고 연구하면서 태양계는 달-수성-금성-태양-화성-목성-토성의 순서로 자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뿐만 아니다. 그는 천체운동 지도를 만들고 그것을 수학적으로 공식화했다. 그 영향력은 16세기까지 과학으로 인정받았고, 로마 가톨릭에서는 종교력을 만드는 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천동설은 태양중심설주의자였던 코페르니쿠스의 등장과 함께 사람들의 의문을 사기 시작했다. 코페르티쿠스는 반대의 전제로 천체를 관찰하자는 주장을 했다. 지구를 중심으로 하늘이 돈다는 관점에서,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는 관점으로 관찰해 보자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다. 이 관점은 후에 갈릴레이 갈릴레오와 요하네스 케플러에게 영향을 주었고, 그들에 의해 천동설이 틀렸다는 사실이 입증됐다. 그리하여 천동설은 지동설에 의해 과학의 왕좌에서 내려와야 했다. 이제는 아무도 천동설을 과학으로 여기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오늘날 진화론을 과학으로 보는 방식이다. 인류는 진화한 것이라는 이론(ism/믿음)이 나오고, 그 설(說/ism)을 전제로 과학자들은 관측과 실험이라는 방식을 사용하여 과학의 왕좌를 찬탈했다. 이런 차원에서 진화론은 천동설이 그랬던 것처럼 다른 이론에 의해 폐기되기 전까지는 과학으로 추앙받게 될 것이다. 이것이 과학사가 보여주는 ‘패러다임 시프트’(Paradigm Shift)다. 이에 대해 과학철학자 장하석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수학에서 어떤 명제를 증명했다고 하면, 그것은 영원히 유효하고 그 증명된 명제는 어떤 일이 있어도 바뀌거나 폐기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과학이론’은 자꾸 바뀌고 한때 확실하다고 했던 이론도 폐기되곤 합니다.”2)
장하석 씨의 주장을 염두에 둔다면 과학은 진리처럼 취급될 수 없다. 나중에 또 다른 이론이 지배하면, 그 과학이론은 과학이라는 명성을 상실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현재 진화론이 과학처럼 취급된다고 해서 이것이 진리인 성경과 조화를 이룰 대상으로 여겨질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이제 ‘기술’이란 무엇인가 생각해 보자. 기술은 이론(ism)을 입증하기 위해 관찰과 실험에 사용되는 수단이라 할 수 있다. 특정 이론을 입증하기 위해 관찰과 실험을 하려면 물이나 기체의 부피를 재는 기술, 온도를 재는 기술, 각도를 재는 기술, 속도를 측정하는 기술이 필요했다. 이 기술이 오늘날 우리가 최첨단의 진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만든 원동력이다. 과학이 아니라, ‘과학기술’이 우리에게 이런 최첨단의 진보 생활을 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과학기술이 측정 기술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 질서를 존중하지 않으면 성립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과학기술은 성경적 전제를 깔고 있다는 말이다.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과학에 대해 의문을 제시하는 것은 정당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학기술 자체를 적대시하거나 반대할 아무런 이유는 없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팀 켈러가 진화론을 과학(이론의 수학적 정당화)이라고 전제하면서 진리와 동등한 위치로 승격하여 신앙과 조화를 이루려는 시도는 매우 위험하다. 왜냐하면 과학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이론이 등장하면 소멸하는 패러다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팀 켈러가 과학과 진리를 동등한 위치에 올려놓고, 이 둘을 조화시키는 것이 올바른 신앙이라고 몰아세우는 것은 가히 가스라이팅적(gaslighting)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그리스도와 벨리알, 빛과 어둠, 우상과 성전을 어떻게 조화 시킬 수 있겠느냐는 성경의 가르침에 정면 도전하는 주장이다(고후 6:14-16).
두 번째로 팀 켈러에게 문제 되는 전제는 진화론을 거부하는 성경적 기독교인들을 반과학주의자로 몰아붙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억울한 전제다. 이 전제는 은연중에 성경적 그리스도인들을 마치 미개한 신비주의자나 광신자들처럼 몰아가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교회사에 등장한 경건했던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반과학적 입장을 취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을 규정하는 더 적절한 표현은 ‘초과학적인 사람들’이다. 성경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거의 대부분 과학 법칙을 존중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을 믿는 신앙인들은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당신이 정하신 법칙에 지배받지 않으시고 얼마든지 초월하여 역사하실 수 있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전능하신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팀 켈러의 아티클은 진화론을 거부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반과학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들로 몰아세운다. 그리고 건강한 신앙생활은 초과학적인 태도가 아니라,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한 진화론과 조화를 이룰 줄 아는 것이라고 설득한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진화 과정을 통해 생명과 인간의 창조를 일으킬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고 노골적으로 설득한다. 이런 설득은 자연주의나 논리실증주의 철학에 물든 이 세대 사람들에겐 매우 세련되고 설득력 있는 접근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과거 기독교를 몰락시킨 독일 관념론 철학적 태도를 받아들인 유럽 교회의 오류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성경적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하나님은 진화 과정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창조를 이루실 수 있다는 ‘초과학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정당하다. 하나님은 모든 법칙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얼마든지 당신이 만드신 법칙을 초월하시면서 모든 일을 이루실 수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하나님을 믿으며, 반과학적이지 않지만, 초과학적인 입장에서 얼마든지 합리성을 위배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다음 칼럼에서는 팀 켈러의 성경 해석에 대한 문제점을 다루어 보도록 하겠다.
1) 장하성, 「과학, 철학을 만나다」(지식플러스, 2018) p.22.
2) Ibid., p.24.
#김민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