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20세기 초 일제강점기에 주권, 영토, 우리말 등 국민정신마저 빼앗기고 일제식으로 강요당했습니다. 이후 해방의 기쁨을 누리는 것도 잠시, 곧이어 6.25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전국이 초토화되었습니다. 생활의 터전은 물론 몸도 마음도 무너지고 가족도 잃고 피폐해진 이 민족의 수난사가 한 세기 안에 일어났습니다.
그런 이 민족에게 재기의 희망, 잘살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한 힘이 있었다면 그것은 다름아닌 복음을 들은 영혼이 “하나님을 찾으면 살리라”는 믿음을 가르쳐 준 교회였습니다. 그런 교회는 육체적으로 병든 이 백성, 경제적으로 가난한 이 민족, 그리고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이 민족에게 하나님을 앙망하게 함으로 이 모든 눌림과 억압에서 자유케 하는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늘어나면서 기독교에 관한 관심이 당연히 높아질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에따라 기독서적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인터넷 시대가 아니었기에 출판 시장이 호황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순기능의 역사가 많았지만 이와는 달리 역기능의 역사도 함께 섞여 유입되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기독교 사상가들의 멘탈을 간과했다는 점입니다. 즉 일찌기 반기독교적 사상가들이 저술한 책은 읽었으나 그들의 정신 사상은 미처 읽지를 못했다는 점에서 그 한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동성애와 종교다원주의 속에 오늘날 6.8혁명 노선의 성혁명가들이 공격용 무기로 삼는 평등, 관용, 인권, 사랑, 환대라는 기독교적 용어 프레임을 채색해서 신학화하고 문서로 심령을 파고든 겁니다.
그러는 사이 우리 스스로를 돌이켜 보건데 지난날 소영웅주의 내지는 교회주의에 빠져가고 있었음을 부인하기 힘듭니다.
그럴만한 이유로 ‘우리는 복음만 전하면 되었지 세상은 관심 밖이다’라는 교회 안에 갇힌 대부분의 교회들이 한계성을 드러내고 만 게 오늘의 모습이라고 자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연합운동에 미흡했고, 교회 생태계가 처하게 될 반성경적인 정서가 도래할 이 세대의 위험성을 준비하지 못한 겁니다.
이처럼 전자에 몰입해 눈이 어두워 가는 사이에 후자는 오늘날 사회 개혁을 외치는 좌파, 인권운동하는 자들의 몫이 되었고 그들 스스로가 지금도 공을 세웠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오늘날 극단적인 동성애 정당성을 주장하는 성혁명론자들이 되었고 이들은 끊임없이 진화하여 정치, 교육, 방송 문화계 등 온 세상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말하자면 ‘세상’이라는 헬라어 ‘아이온’이라는 잘못된 문화에 속아 넘어간 겁니다. 성경에 이 ‘아이온’이라는 단어를 주목할 두 곳이 나옵니다. 첫 번째가 “이 세대”(롬12:2)라는 단어요, 두 번째 한 때 바울의 동역자였던 데마가 바울을 버렸던 이유를 ‘세상’을 사랑하였기 때문이라고 한 “세상”(딤후4:10a)입니다. 즉 본받아서는 안 될 세상풍조요, 따라가서는 안 될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대한 대비를 한국교회가 준비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당하고 있는 온갖 반성경적이고 패역한 세상 문화입니다.
이제라도 한국교회가 거룩한 방파제요, 최후의 보루로서 반기독교적 정서와 문화를 거부하고 이에 대처할 수 있는 실제적인 방안을 강구하는 일에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거룩의 능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나아가 교회와 이 민족을 지키겠다는 결연한 연대의식을 통한 확장성이 절실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성경적인 세상(아이온)에 빠지지 않기 위한 학습과 퀴어신학을 이단으로 규정한 신학교의 견고한 신학화 작업 등, 그리고 교단의 정화운동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모든 것 위에 만시지탄이긴 하지만 앞으로 혹여라도 기우라고 할지 모르나 성경이 불온서적 내지는 금서가 되는 일이 없도록 독소조항이 즐비하여 역차별의 카다란 폐해를 내포하고 있는 차별금지법, 평등법 등이 22대 국회에서 안건 자체로 채택되지 않도록 한국교회가 대동단결하여 영적인 선한 싸움을 게을리하지 않는 최후의 방파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민돈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