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론] 홀로 걷는 십자가의 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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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더함 박사(Th.D. 바로선개혁교회 담임목사,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

* 본지는 최더함 박사(Th.D. 바로선개혁교회 담임목사,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의 논문 ‘구원론’을 연재합니다.

최더함 박사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 24. 눅 9:23)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 죽여 모래 속에 감추니라. 이튿날 다시 나가니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는지라 그 잘못한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매, 그가 이르되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 하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이르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는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 곁에 앉았더라”(출 3:11~15)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왕상 19:4)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시 6:2~3)

1. 천로역정

천로역정의 주인공 크리스찬의 원래 이름은 ‘무은혜’(graceless)였습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남을 체험하자 드디어 십자가의 길을 따라나섭니다. 그 길에는 수많은 우여곡절이 나타났습니다. 단순과 나태와 거만이라는 방해자도 있었고 허례와 위선이라는 월담자들과 십자가의 길에서 역주행하는 겁쟁이와 불신이라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중간에 굴욕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거쳐야 했습니다. 아무튼 크리스찬이 걷는 십자가의 길은 외롭고 힘든 고역이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여행이었습니다. 심지어 자살까지 생각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수시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에 의해서 보호받고 소망이라는 친구까지 얻은 크리스찬은 마침내 새 예루살렘에 입성합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천국에 입성할 때까지 어떤 인생의 길을 걸어야 하는가를 반추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지고 가는 인생길에 어떤 장애물들이 나타나는지 간접적인 지식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2. 홀로걷는 사람들

토저 목사는 십자가의 길은 홀로 걷는 길이라 했습니다. 성경 역사상 위대한 인물들은 대부분 외로운 인생을 보냈습니다.

인류 역사의 아침에 해당하는 시기를 살았던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다가 하늘로 올리어졌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은 에녹이 그 시대의 사람들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의로운 인생하면 단연 노아입니다. 그는 대홍수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 중에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사람의 의문과 냉소를 굴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소명 하나만을 기억하면서 방주를 제작하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그 결과 노아를 놀려대던 모든 사람은 홍수의 물결 속으로 다 빨려 들어갔습니다.
모세도 역시 외로운 인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불의의 사고로 모세는 하루아침에 왕자의 신분에서 미디안 광야에서 양들에게 물을 먹이는 종의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왕궁에서 아침마다 시녀들의 시중을 받았던 그였습니다. 아마 세숫물까지 시녀들이 갖다 바쳤을 것입니다. 그랬던 그가 이제 광야에서 무릎을 꿇고 양들이 물을 먹을 수 있도록 시중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광야에서 천하디천한 목자의 신분으로 40년이라는 세월을 견뎌야 했습니다. 그 세월이 얼마나 외롭고 처절한 것이었겠습니까?

다윗은 왕이 되기까지 철저히 세상과 격리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사울 왕의 추격을 피해 주로 산속 동굴이나 광야의 외진 곳에서 은거하며 살았습니다. 얼마나 고생길이었으면 오늘 시편에서 “내 뼈가 떨린다”고 토로했습니다.

하지만 가장 외로웠던 분은 모세와 모든 선지자가 예언했던 분,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향해 고독한 발걸음을 옮기실 때 그분의 주변을 따르던 무수한 군중은 그분의 고독을 조금도 덜어드리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겪은 고독을 알지도 못했습니다. 윌리엄 테펀(W. Tappan)이라는 시인은 “한 밤 중 아무도 없는 데서/구주께서 홀로 두려움과 싸우시는데/그분이 사랑하시는 제자들조차/그분의 슬픔과 눈물을 생각하지 못하는구나”하고 슬퍼했습니다.

이렇게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은 하나같이 외롭고 힘든 인생길을 걸었습니다. 토저 목사는 이것을 두고 하나님에 의해 ‘강요된 고독’이라고 불렀습니다. 당사자가 원하든 원치 않든 하나님에 의해 시작된 이 고독한 인생에 대해 시편 기자는 “내가 나의 형제에게는 객이 되고 나의 어머니의 자녀에게는 낯선 사람이 되었나이다”(시 69:8)고 노래했습니다.

생각해보면 모든 주의 종들에게 이 현상은 공통된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주의 종들에게 이런 인생을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그것은 단 하나의 이유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이 이 세상의 복락이 아니라 천상의 복락을 누리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당장 눈에 보이지 않고 실감할 수 없는 천상의 복락을 믿지 못하거나 거기에 소망을 두지 않으려 합니다. 지금 당장 내게 펼쳐진 인생의 문제가 너무 중대하고 시급히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당장 돈이 떨어지면 굶어 죽을 것이라고 두려워합니다. 몸이 조금이라도 아프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호들갑을 떱니다. 지금 죽는다면 너무 아쉬워 눈을 제대로 감지 못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세상의 것들을 제대로 한번 누려보고 싶다는 욕망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생존의 문제가 닥치면 신앙도 버리고 영생도 포기합니다. 내가 살아야 하나님도 있다는 식으로 하나님을 협박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당신이 살든 죽든 간에 상관없이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협박하지 마셔야 합니다. 당신 인생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습니다. 만약 당신 인생에 하나님이 없다면 그 인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고독을 싫어합니다. 감옥에서도 죄수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독방에 수감되는 것입니다. 죄수들이 싸우면 당사자들을 일정 기간 동안 독방에 감금합니다. 아무도 그와 대화를 해선 안 됩니다. 이 격리조치가 얼마나 싫으면 죄수들은 제발 자신을 독방에 넣지 말라고 빌고 또 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인간에게 고독보다 더 심대한 고통은 없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사탄은 최종적으로 무저갱이라는 불지옥에 수감된다고 합니다. 그곳에는 영원히 사탄 홀로 격리된 장소입니다.

고독이 고통을 주는 이유는 우리의 본성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어울리며 살도록 지으셨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아울리고 싶은 욕구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정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본능 때문에 사람은 자신과 동일한 종류의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갈망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뜻과 가치관을 동의해주고 자신과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을 찾아 사귀기를 좋아합니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처럼 자신을 인정해 주는 사람을 친구로 삼습니다. 자기를 배척하고 싫어하는 이를 적이나 원수처럼 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동행하려는 사람은 종종 거듭나지 못한 세상 사람들과의 교제뿐 아니라 선한 그리스도인들과의 교제까지 포기해야 하는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깊은 교제 속으로 들어간 사람이 자신을 이해해줄 사람을 만나는 경우가 흔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의 내적 체험을 공유할 신앙의 친구를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심지어 같은 이불을 덮고 자는 부부끼리도 이런 깊은 영적 교제가 어려운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의 세상살이가 힘든 것입니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눌 사람이 드뭅니다. 결국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신령한 사람에게는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다른 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삽니다. 그는 주님께 모든 것을 바치라고 사람들을 설득하면서 지기 몫을 포기합니다. 그는 자기가 높아지는 것을 원치 않고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는 사람입니다. 그는 주님이 높아지고 자기가 낮아지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늘 주님을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대화 상대자를 만나지를 못하여 고독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현실의 이야기가 아니라 신령한 이야기를 대화 주제로 꺼내면 고개를 돌립니다. 그 이야기가 자기 인생에 무슨 관계가 있냐고 하면서 힐난합니다. 예수 믿으면 밥이 나오고 돈이 되냐고 되묻습니다. 그 인생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밥이고 돈이기 때문에 그것 이외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왕따’ 시킵니다. 그래서 점점 사이가 멀어집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과 사이가 멀어진 하나님의 자녀는 오직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바라시는 우리의 관심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더러 세상과 사이가 멀어지도록 하신 다음 당신 자녀의 관심사를 하나님 자신에게로 돌리기를 원하십니다. 이러므로 세상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는 그들의 배신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드디어 하나님께로 돌아선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를 두고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라”(시 27:10)고 노래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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