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gender)란 20세기 중반에 생겨난 하나의 “신어증”(新語症 neologism)적 단어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들 젠더를 “사회적 성”이라고 하는데, 이런 용어는 이해하기 어렵다. 성(sex)은 본래 생물학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gender를 성별(性別)이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성과 성별이 어떻게 다른지 짐작하기 어렵다. (그래서 필자는 우리말로도 그냥 젠더라는 단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젠더라는 단어는 원래 문법에서 단어들의 남성형, 여성형, 중성형 등에 대한 용어였다. 이 개념이 20세기 중반에 들어 실제 사람의 성(섹스)에 사용되는 것이다. 젠더 개념은 생물학적 성에 따른 구분이 아니라, 남성 또는 여성의 사회적 역할, 사회적 표현, 사회적 품성 같은,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정신사회적(psycho-social) 의미의, 남성성(masculinity) 또는 여성성(femininity)을 성의 본질로 보는 것에 기초한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이 말하는 남자다움과 미국 사람들이 말하는 masculinity의 내용이 비슷할 수 있지만, 약간 다를 수도 있다. 영화배우에 비교해보면, 한국의 대표적 남성상이 마동석이라면 미국의 남성상은 션 코넬리일 것이다. 그래서 젠더는 문화권에 따라 “다양”하다고 한다.
그러나 생물학적으로는 한국 사람들이 말하는 남자나 미국 사람들이 말하는 남자는 꼭 같다. 더구나 남녀의 사회적 역할도 실제로 동서양 간에 크게 다르지 않다. 그 이유는 생물학적으로 남성성이나 여성성은 테스토스테론 또는 에스트로겐 같은 성호르몬의 영향을 받은 결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생각에 섹스 대신 굳이 젠더라는 개념이 필요 없다고 본다. 남성성, 여성성이란 정신사회적 성적 용어들이 있는 한, 새삼 사회적 젠더란 말이 필요 없다.
그런데 왜 현대 사회는 굳이 섹스(성) 대신 젠더를 사용하려 하는가? 그 이유는 첫째 젠더가 트랜스젠더라는 개념으로 이어지는 데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젠더의 다양성은 남성성 또는 여성성 범주 내에서 다양성이지. 트랜스젠더나 젠더퀴어까지 포함시킨다는 것은 “범주”를 넘어선 인위적 억지이다)
트랜스젠더의 옛 명칭은 성전환증(transsexsuality)이었다. 성전환자란 성을 반대로 바꾸려는 사람들을 말한다. 외모를 반대 성의 모습으로 꾸미거나, 반대 성의 복장을 하거나, 몸의 성적 특징들을 수술하려 하였다. 성전환증은 1980년대까지 성도착증의 하나였다. 1980년대에 “사회적 합의”에 따라 성전환증은 트랜스젠더라는 비의학적 용어로 바뀌었다. 이제 트랜스젠더는 자신의 젠더가 다르다고만 선언(커밍아웃)하면, 사회는 그의 젠더가 바뀐 것으로 인정해 준다. 그래서 젠더가 정신적-사회적 의미의 성이라 하는 것이다. 즉 트랜스젠더를 인정해 주기 위해 젠더라는 용어가 필요한 것이다.
둘째, “왜 젠더인가”하는 이유는, 소위 젠더이데올로기에서 더욱 드러난다. 이는 트랜스젠더의 “정상화”(정신장애가 아니라는 의미), 및 젠더주류화(gender mainstreaming), 등을 정치-사회-문화적으로 주장하는 이데올로기이다. 이 이념에는 젠더의 다양성에 남녀 뿐 아니라 트랜스젠더나 젠더퀴어까지 포함하고 있다. 우선 미국과 WHO의 정신의학회는 트랜스젠더를 정상화하고 있는 과정 중에 있다. 또한 젠더이데올로기는 모든 젠더 다양성을 인권차원에서 평등하게 포용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올바르다”(politically correct) 또는 “의식화된 정신”(wokism)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젠더주류화란 모든 국가 정책을 젠더 평등을 향하는 방향으로 수행되어야 함을 주장하는 이론이다. 1990년대 젠더주류화 개념이 처음 등장하였을 때는 남녀 젠더 평등을 내세웠고, 그래서 이는 쉽게 널리 수긍되었다. 그러다가 슬그머니 세상의 모든 젠더들을 정상으로 보고 인정하자는 (비생물학적) 정치적 “이념”으로 확대되었다. 현재 이 세상에 수많은 젠더들이 등장하고 있다. 즉 시스젠더(우리 대부분이 그러하듯 몸의 성과 젠더가 일치하는 경우), 트랜스젠더(몸의 성과 젠더가 반대인 경우), 젠더퀴어(시스젠더 또는 트랜스젠더가 아닌 기타 젠더), 제3의 젠더, 등등. 젠더이데올로기는 이들 모두를 소수자이지만 정상으로 보고 인권 차원에서 평등하게 포용하자는 이념이다. 지금은 젠더이데올로기는 동성애 정상화의 이념도 포함한다. 이러한 젠더와 동성애에 대한 이론을 퀴어이론이라고도 한다. 이런 이데올로기의 정치를 성정치라 한다. 차별금지법이 성정치에 해당한다.
젠더가 섹스를 대신한 데에는, 이 시대의 엘리트들이 원하는 바 “정치사회적” 이유가 숨겨져 있다고 본다. 그것은 성 혁명적 사상이고, 막시스트 해방의 사상이다. 이런 이념들은 한 마디로 전통적 규범을 거부한다. 전통이라 함은 서구에서는 기독교, 한국에서는 전통 유교라 할 수 있다. 젠더이데올로기는 전통의 억압으로부터의 “성”의 해방을 선전함으로, 어떤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려는 의도가 있다. 젊은이들은, 가능한 결과나 부작용에 아랑곳하지 않고, 성 해방과 성혁명이라는 선전, 선동에 호감을 갖는다.
철학적 설명도 있다. 진보적 엘리트들은 젠더는 사회적으로 구성된(socially constructed)개념이라고 철학적으로 설명한다. “사회적으로 구성되다”니, 무슨 새롭고 심오한 의미가 있는 듯 하지만, 어찌 보면 단순하다. 사회적 구성주의는 어떤 사회적 사물이나 사상에 대해 대표자들에 의해 또는 집단적으로 “합의”가 이루어지면 그 사회의 진리가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지폐“는 종이에 불과하지만, 사람들이 합의함므로 효력이 있고, 권력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즉 젠더는 다수 현대인들 또는 대표자들이 “합의한” 결과이다. 따라서 이는 “자연”과는 대비된다. (우리 크리스천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을 믿는다) 그 현대인들 내지 대표자들이란 주로 진보적 엘리트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다. 일반 대중들은 뭐가 뭔지 모른채, 엘리트들이 주장하는 것을 진보된 진리로 간주하고 합의해 주고 따라간다. 그러나 젠더는 사람들이 합의한 인위적 개념이므로 자연과학적으로는 한마디로 넌센스이다. 그러나 진보적인 정신과의사들은 트랜스젠더의 의도를, 의학이 아니라, 인권 차원에서 존중한다. 따라서 젠더의학 또는 성차의학은 진정한 의학일 수 없다.
현실적으로 “성은 남녀이다“라는 보편적 생각은 바꾸기 힘들다. 결국 젠더도 남성젠더 여성젠더 두 가지이다. 그 이분법은 생물학적 성의 이분법과 다를 바 없다. 젠더도 결국 섹스이다. 남녀 젠더를 벗어나는 것은 정상적이 아니다.
젠더이론가들은 성(sex)을 오로지 생물학적 성에 국한 시킨다. 그들에 따르면 생물학적 성은 타고날 때 산부인과의사나 간호사가 아들이네요, 혹은 딸입니다 같은 “사회적 선언”으로 결정되는 것에 불과하다고 한다. 금세기 최고 젠더이론가인 쥬디스 버틀러는 생물학적 성도 사회적으로 구성된다고까지 주장하는데, 이는 의학적으로 도저히 이해 불가능하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젠더이론가들은 생물학적 섹스를 사회적 젠더의 일부, 즉 하위개념으로 삼는다. 사회가 자연의 우위에 있게 된 셈이다. 변화무쌍하고 상대적인 인위적인 개념이 견고한 자연을 무시하는 것이다. 자연을 무시하는 죄는 사람을 병들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젠더를 생물학적 섹스의 하위개념으로 본다. 어느 생각이 올바를까?
우리 크리스천이 믿는 바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남녀로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젠더 개념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의 성”(섹스)을 인간이 마음대로 바꾸고자 하는 시도이다. 실제로는 이는 불가능하다. 존스홉킨스의과대학 정신과에서 1975-2001년간 주임교수였던 Paul R. McHugh교수는, 자신의 몸이 다른 성에 속한다는 믿음은 일종의 망상(delusion)이라 하였다. 우리 크리스천에게 젠더 이념은 무신론적이며 인본주의적이며, 그래서 악마적(satanic)이다.
민성길(연세의대 명예교수, 연세카리스가족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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