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요4:22)
예수님은 사마리아 산이나 예루살렘 성전 같은 장소가 예배의 초점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보다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온다고 하면서 예배의 중심이 될 십자가 사건을 예언했습니다. 예배 갱신의 첫째 원리는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와 권능에 대한 증거, 회상, 감사, 헌신 등이 이뤄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본문에선 예배 갱신의 둘째 원리를 말씀하셨는데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지 말고 아는 것을 예배하라고 합니다. 예배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과 아는 것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또 그분을 아는 것과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는 것과는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거기다 사마리아나 예루살렘처럼 장소를 구분해서 예배드리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고 해놓고 이제와선 또 유대인 즉, 인종적 구분을 두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혹시라도 예배의 장소를 구분하지 않는다는 앞선 가르침을 뒤엎고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유대인의 대단한 자부심을 옹호 내지 인정해준 것입니까?
예수님이 일구이언하시거나 인종차별 하시는 분이 아님은 너무나 확실합니다. 먼저 아셔야 할 것은 당시의 사마리안 인들은 구약성경에서 모세오경만 인정하고 열심히 지켰습니다. 율법에 의한 구원관을 강조했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성결해져서 당신이 바라는 수준에 합당해야만 구원 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하나님이 인간이 그렇게 되지 않아도 된다거나, 그렇게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당연히 율법의 요구를 다 지키게 되는 것을 우리보다 더 열렬히 소원하십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인간이 영적 상태로는 도무지 모세오경이 요구하는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영적 실상을 잘 아십니다. 스스로는 율법 규정을 지켜낼 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태생적으로 타락한 본성에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8:7) 원죄 하의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된 상태로 태어납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않고 또 굴복할 수도 없습니다. 원수란 항상 복수할 대상이지 원수의 말을 들을 리는 만무하지 않습니까? 죄의 법이 자연인을 묶고 있기에 성령의 법을 따르지도 않고 따를 수도 없는 것입니다.
모세오경만 지키면 구원 얻으리라 믿는 사마리아인들로선 그 율법을 도무지 지킬 수 없음을 몰랐습니다. 그 율법대로 아무리 제사를 드려도 하나님께 온전히 열납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실재(實在)하심과 당신을 믿고 따르는 백성을 보호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사마리아인들이 몰랐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정도는 이방인들도 알고 있다고 예수님이 지적하셨지 않습니까?(마6:32)
이런 점에선 유대인들도 하등 나을 바 없었습니다. 그들도 인간의 의로는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기에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는 더더욱 미치지 못함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이 유대로부터 난다는 말씀도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았고 율법도 잘 지켰으며 또 그래서 그 잘 지킨 것으로 구원 받을 수 있다는 뜻은 당연히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예수님과 동일한 말씀을 이미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 중에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사59:20) 유대인의 후손으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곧 유대 땅 골고다의 십자가에 달릴 것입니다. 그 십자가 은혜를 온전히 깨달으면 하나님에 대해 온전히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그 십자가 구속의 진리가 유대에서부터 사마리아를 넘어 땅 끝까지 울려 퍼지게 될 것이며, 그 때가 되면 그분에 대해 알게 된 바탕에서 특별히 구원의 진리가 증거되는 예배를 드리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본문의 ‘너희’와 ‘우리’도 단순히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으로 인종적 구분을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21-24절)의 초점은 “예배할 때가 온다.”는 사실에 모입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 안에 들어오지 못하면 너희가 되고, 그 은혜를 누리면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우리가 되느냐, 하나님 밖에서 제멋대로 행하는 너희가 되느냐는 오직 십자가 보혈의 필터를 통과했는지 여부로만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구원이 유대에서 난다고 해서 십자가가 예루살렘의 장엄한 성전에 세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성 밖의 해골이라 불리는 초라한 언덕에서 예수님은 두 강도와 함께 율법으로는 저주 받은 죽음 즉, 나무에 달릴 것입니다. 그 십자가가 “너희”에게는 잠시 유다를 소요케 했던 젊은 랍비의 활동이 끝난 것처럼 보이겠지만 “우리”에게는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천하를 뒤엎고 있던 흑암의 세력을 완전히 깨부수고 역사를 그 사건 전과 후로 나누는 분기점이 될 것입니다. 단순히 기독교 전과 후가 아니라 본문대로 하나님을 온전히 몰랐던 때와 알게 되는 때로 나뉠 것입니다. 한 개인에게도 썩어 없어질 옛사람은 죽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사람을 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마리아 여인의 경우도 남편 다섯이나 있었으나 여전히 갈급했던 시절은 끝이 나고 예수님이 주시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마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십자가 은혜를 통해 하나님을 제대로 알게 되는 순간이 오면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구원이 시온으로부터 온다고 예언한 후에 덧붙인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신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사59:21) 십자가 구원을 시온에 임하게 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은 영영토록 변함없을 것이기에, 너희는 그 은혜를 대대로 증거하는 예배를 드리라는 것 아닙니까?
본문에 따르면 예수님이 가르치신 예배 갱신의 둘째 원리는 무엇입니까? 십자가 은혜에 들어온 자들로 예배드리게 하라는 것입니다. 예배에서 선포될 설교와 성경 공부할 내용의 모든 초점이 십자가의 구속 원리에 집중되어야 합니다. 오직 예수로 인해 살고 죽는 신자를 양성시키고 그들로 예배당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교인 숫자를 늘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단 한 명의 신자라도 그 가슴 안에 오직 예수님의 은혜와 권능으로만 충만하게 채워지게 하라는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의 예배 갱신 셋째 원리도 도출됩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뜨겁고 감격스런 예배”를 찾는 것이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사람”을 찾는다고 합니다. 십자가 군병으로 완전히 바뀐 단 한 명이 드리는 예배를 그렇지 못한 수천 명이 모여서 풀오케스트라 찬양과 물 흐르는 듯하는 설교와 울부짖는 기도보다 하나님이 더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십자가 없이는 하나님을 온전히 알지 못하고 또 그럼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라는 걱정으로만 절대자를 찾는 것과는 전혀 다른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구원해주신 은혜에 진정으로 항복하였고 또 그렇게 죄에서 구원해준 뜻이 오직 당신처럼 거룩하게 만드시려는 것임을 확신하는 자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목표도 주일 예배 참여자들 가운데 그런 자들의 비율이 높아지게 만드는 데에 모든 관심과 노력을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사마리아인들이 그렇게 소중하게 여겼던 모세오경에도 완전히 동일한 말씀이 나옵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출31:13)
안식일을 지키는 이유도 바로 “너희를 거룩하게 만드시는 여호와인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도 십자가를 통해 거룩하게 만드는 하나님을 알고 예배드리라고 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 본체인 줄 알겠습니까?) 안식일은 또 이스라엘의 대대의 표징이라고 했습니다. 예배를 통해 영원한 생수 예수 그리스도를 마실 수 있다는 사실은 십자가 이후의 모든 세대에도 변함없는 하나님의 약속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배를 드려야 할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단순히 주일이 아닙니다. 골고다 십자가 이후에는 신자는 언제 어디서나 우리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려야 합니다. 아니 태초에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창조된 때부터 하나님의 뜻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십자가를 통해 온전히 알고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사람으로 먼저 온전히 바뀌라는 것입니다. 교회들이 이런 예배의 세 원리를 실현하지 못하면 예배가 갱신될 수 없으며 나아가 기독교의 재부흥은 더더욱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2011/10/2
* 이 글은 미국 남침례교단 소속 박진호 목사(멤피스커비우즈한인교회 담임)가 그의 웹페이지(www.whyjesusonly.com)에 올린 것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맨 아래 숫자는 글이 박 목사의 웹페이지에 공개된 날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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