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다 덜컥 예수님을 만나게 됐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분이 제 마음속에 계시다는 것을 느끼게 됐고, 자연스럽게 주님께 고백하고 있는 내가 어색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픈 이야기지만 저는 오히려 세상의 논리대로 좀비처럼 살았습니다. 주님이 주신 시간과 재능을 낭비했습니다. 주어진 시간과 재능이 제 것인 양 오직 저만을 위해 썼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 삶에는 황당한 야심만 가득 차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면서 우리의 결핍을 경험하거나, 이웃의 결핍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그때 세상에 속지 마세요. 세상은 결핍을 가진 사람들이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상대적 박탈감을 가지게 하지만, 거기 속지 마세요. 운이 좋아서 결핍 없이 사는 사람도 있어요. 세상은 그들에게 “남의 결핍까지 신경 쓰지 말고, 자기 행복만 누리고 살아도 돼!”라고 말하지만, 거기에도 역시 속지 마세요. 둘 다 속임수예요.
김형국 – 그 만남을 묻다
요한계시록은 오늘날 우리가 어떤 문화와 삶의 상황 속에 있든지 우리에게도 유사한 방식으로 계속 말하고 있다. 환상가, 예언자, 편지 기록자, 설득하는 자이며 상황화 신학자인 요한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선교를 그들의 삶의 자리에서 구현하라고 계속 요청한다. 요한계시록의 하나님은 성경 이야기 전반을 통해 우리가 아는 하나님과 동일한 하나님이며, 모든 민족을 자신과 화해시키시고 전체 창조 세계에 샬롬을 가져오는 일에 강고하게 헌신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다. 우리는 요한계시록 전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대표 상징이 죽임당한 어린양이 된다는 것을 잊을 수 없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의 복음이다. 온 세상을 다스리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은 다름 아닌 상처 입고 죽어 가는 어린양을 통한 방식으로 세상 안에서 그분의 변혁하는 선교를 성취하신다.
딘 플레밍 – 요한계시록, 오늘을 위한 미래
베드로와 바울은 ‘성령 충만한 자’라는 점에서 참 많이 닮았다. 하지만 좀 더 깊숙하게 들여다보면 이 두 사람은 다른 인생을 살았음을 발견할 수 있다. 베드로는 배움이 짧았던 반면 바울은 공부를 많이 했다. 사역을 들여다봐도 예수님의 제자였던 베드로는 여느 제자들처럼 유대인을 중심으로 전도했다. 그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전도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이방인들에게는 전도하지 않았을까? 고정관념 때문이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이러한 궁금증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방 사람들을 만들었을까?’ 이 문제를 놓고 연구하던 가운데 그들이 내린 해답은 ‘지옥의 불쏘시개로 쓰시기 위해서 만드셨다.’이다. 사실 사람들은 누구나 저마다 자기식으로 생각하고 판단한다. 또 먼저 들어간 잘못된 지식을 빼내고 좋은 지식으로 바꾸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때문에 좋은 지식을 먼저 습득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장경동 – 축복의 36가지 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