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53) 나는 양의 문이라”

오피니언·칼럼
설교
요10:1-10
이희우 목사

요한복음 10장은 9장에 대한 주석이다. 율법의 핵심은 놓치고 껍데기만 붙들고 있는 사람들, 자신들도 생명에 이르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까지 생명에 이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사람들, 그들로 인해 예수께서 양과 우리, 그리고 목자에 초점 맞춰 주신 말씀이다. 구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림인 하나님을 목자로, 백성을 양으로 비유하며 자신의 구원자 되심을 설명하셨다.

예수님의 비유는 두 종류로 분류된다. 하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처럼 메시지가 스토리 속에 숨어 있어서 스토리의 핵심만 중요한 비유다(parable).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비유 대부분이 여기에 속한다. 반면에 양과 목자의 비유처럼 스토리의 목적뿐만 아니라 내용까지 다 중요한 비유가 있다. 10장의 비유가 여기에 속하는데 단어 하나하나까지 다 의미가 있다.

당시 말씀을 듣고 있는 유대인들은 대부분이 유목민이었고, 또 구약성경 여러 곳에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를 양과 목자에 비유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모두가 익히 알아들을 만한 말씀을 하신 거다. 우리는 목자와 양의 관계를 부모와 자식 관계로 이해해도 괜찮을 것 같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와 부모를 사랑하는 자식의 혈통적인 뜨거움, 그 뜨거움이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의 뿌리인 그런 관계 말이다. 그리고 요한복음 10장에는 예수께서 자신에 관해 설명하신 3가지 선언이 나타나는데 이 선언에 주목하는 것이 10장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다. 이 3가지 선언 중 첫 번째가 “나는 양의 문”이라는 선언이었다. 어떤 문일까?

생명의 문

시편 23편은 전 세계 모든 신앙인이 다 좋아하는 찬송시다. 다윗의 신앙고백문이었던 이 시를 로드스(Arnold B. Rhodes)는 ‘지상 최대의 시’라 했고,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 은 ‘시편의 진주’라고 극찬했다. 평생을 전쟁터에서 지내고, 늙어서는 자리 지키기 위해 아들과 싸우기까지 했던 다윗은 ‘부족함이 없다’라는 멋진 고백으로 이 노래를 시작한다. 이유는 단 한 가지,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가 되신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 시는 고백할 때마다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의 풍요로움, 그 초장에서 아무 염려 없이 풀을 뜯는 양들의 편안함, 사랑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양들을 지키는 목자의 든든함이 느껴진다. 눈이 나빠 발밑밖에 보지 못하는 근시안의 양, 그저 목자의 음성을 듣고 그 뒤만 따라다닌다. 그래서 양은 절대 뒤에서 몰 수는 없다. 또 양은 미련하고 고집이 세다. 자기 보는 것을 전부라고 착각하다 길을 잃기도 한다. 낭떠러지와 늑대, 도둑의 위험에 처하기도 하는데 그때 목자가 생명을 걸고 찾아와 구해준다. 한번 뒹굴면 자력으로는 일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죽을 수 있기에 목자가 일으켜줘야 한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목자라 하시고, 양의 문이라 하신다. 양의 생명이 되신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이 말씀의 맥락은 좀 심각하다. 마치 시편 23편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원수들의 목전이라는 위기 상황을 더 확대해 놓은 듯한 느낌이다. 본문에 ‘도적’과 ‘강도’라는 단어가 4번이나 등장된다(1,5,8,10절). 분위기는 선한 목자와 강도의 철저한 대립, 심상치 않다. 선한 목자를 따르면 살고, 강도를 따르면 죽는다고 하신다.

비유를 주신 시기는 초막절을 지난 수전절(22절), 수전절은 이스라엘인들이 ‘하누카’(חנוכה)라고 부르는 절기다. 다니엘서가 이 축제의 배경을 잘 보여준다. BC 170년경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황제가 이스라엘을 침탈하고, 율법과 유대인 전통을 말살하려 했다. 성전에 돼지 피를 뿌리고 우상을 세웠다. 이스라엘이 이에 항거하였는데 이게 바로 마카비(Maccabees) 혁명이다. 이스라엘이 이겼다. 그래서 BC 164년에 부정하게 되었던 성전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즐긴 축제가 하누카다. 12월 성탄절 즈음에 지킨 축제다.

예수님은 이 절기를 배경으로 목자와 양의 비유로 말씀하신다. 여기 목자는 왕 또는 참된 지도자지만 절도와 강도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을 공격하던 세상 권력이나 이방인들이다. 분할 통치하던 로마 총독 빌라도나 분봉왕 헤롯 같은 사람들, 또 정치 권력과 결탁하고 성전을 통해 탐심을 채운 대제사장들, 빛의 자녀들을 출교시키고 핍박하는 영적 귀족 바리새인과 유대 엘리트들, 그들이 다 절도요 강도라는 말씀이다. 요한 공동체에서 예수 외의 다른 구원을 제시하는 헬라의 유력한 종교와 사상들도 절도와 강도, 종교개혁기에는 교황 세력이 절도요 강도였다. 오늘날 우리를 노략질하는 맘몬과 이념과 거짓과 이단들도 절도와 강도다. 권력의 힘으로 누르며, 그럴듯한 이념으로 포장하고 있기 때문에 무서운 존재들이다. 예수님은 그들을 따르면 죽는다고 하신다.

옛날에는 영화상영 전에 ‘대한 뉴스’가 있었고, 예고편이 있었다. 시골 노인 다섯이 생전 처음 극장에 갔다. 그런데 예고편까지 보고 영화가 다 끝난 줄 알고 “영화가 생각보다 참 짧네” 그러며 극장을 나와 집에 가자니 너무 이르고 해서 극장 옆에 다방이라는 데를 갔다. 아가씨가 “뭘 드릴까요?” 모두가 머뭇거리는 데 한 노인이 “다른 사람들은 뭘 주로 마시나?” 물었더니 “주로 커피죠”라고 해서 “내가 오늘 사지” 그러며 다섯 잔을 시켰다. 커피가 뭔지도 모르는 노인들이 한 잔씩 마시고 난 다음 다른 노인이 “나도 한 잔 사지” 그러며 또 커피를 시켰고, “자네들이 사는데 나라고 얻어먹기만 할 수 없지” 그러며 또 한 잔씩 시켜서 그날 커피를 다섯 잔씩 마셨다. 다음날 노인들이 만나서 하는 말, “어제 마신 술 정말 독하대. 난 한잠도 못 잤어.” 뭘 모르면 고생한다. 함부로 모르는 사람 따라하면 안 된다.

비유는 ‘내가’라는 단어로 시작된다. 요한복음의 7 ‘I am’ sayings 중 하나, ‘진실로 진실로’라는 표현으로 하신 매우 중요한 말씀이다. 자신의 정체성(Identity)을 밝히는 ‘에고 에이미’(ἐγώ εἱμί) 형식이 두 번이나 등장한다. “나는 양의 문이다”(7절). “나는 선한 목자다”(11절). 문이면 문이고 목자면 목자지 어떻게 둘일 수 있을까? 또 목자라는 표현은 익숙하지만 양의 문이라는 이 생경한 표현은 뭔가? 그럴 수 있다. 예수님이 비인격체나 하나의 원리로 보일 수도 있게 하는 표현이다. 그런데 진짜 생소하나? 아니지 않나? 예수님은 이런 표현을 자주 하셨다. “나는 떡이다”, “나는 빛이다”, “나는 길이다.”

“나는 양의 문이라”, ‘우리’는 저녁의 한기나 도둑과 맹수, 악천후로부터 양들을 보호하는 장소다. 옛 팔레스타인에서는 그것이 야숙하는 곳의 임시 우리이거나 동굴 아니면 돌로 쌓은 벽이나 나뭇가지로 엮은 담으로 둘러싸인 공간이다. 이 우리에는 단 하나의 아치형의 출입문이 있다. 목자들은 그 문을 통해 양들을 우리 안에 몰아넣기도 하고 밖으로 불러내기도 한다. 또 목자는 밤에 양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 문을 가로막은 채 잠을 자기도 한다. 목자가 그렇게 문을 막아 지키고 있는 한 아무도 우리 안에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목자는 곧 문이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9절).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생명에 이를 수 없고, 풍성한 삶을 살 수 없다는 거다. 예수님은 ‘문지기’라는 표현도 하셨다. 문을 통과하지 않는 자는 도적이나 강도라며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당신은 저녁의 한기와 짐승들의 습격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하는 ‘생명의 문’이시라는 말씀이다.

마태복음에서는 이 문을 ‘좁은 문’이라 했다(마7:13-14). 좋아보인다고 엉뚱한 문으로 들어가면 안 된다. 위험과 배고픔이 기다릴 뿐이다. 좁은 문은 ‘생명의 문’이지만 넓은 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라 했다. 어느 문으로 들어가느냐에 따라 우리 운명이 결정된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찾는 이가 많은 것도 중요하지 않다. ‘생명의 문’인지 ‘멸망의 문’인지가 중요하다. 그 좁은 문이 곧 예수님, 그 문이 ‘생명의 문’이다.

사랑의 문

문제는 어떻게 문을 구분하느냐인데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3절), 아무리 양이 많아도 다 안다는 말씀이다. 이름도 알고(10:3), 음성도 알고(10:3,4,27), 수((數)도 알고(눅15:4). 이리나 도적이나 삯꾼 앞에 약한 것도 알고(10:12), 목자를 치면 흩어진다는 것도 아신다(슥13:7). 중요한 것은 직업적으로 아는 게 아니라 사랑으로 아신다는 거다. 양도 마찬가지, 목자를 안다. 음성을 알고 따른다(10:3,5,27). 출석체크하며 돌보시는 예수께서 개별적으로 아신다는 것, 몸도 알고 마음도 알고, 내 상태도 알고, 시작도 진행도 마침도 다 아신다. 이게 예수님의 사랑이고 매력, 예수님은 양들에게 ‘사랑의 문’이시다.

신기한 것은 소나 양이나 말들은 들판에 풀어놓아도 어떤 물이 좋은 물인지, 어떤 풀이 독초인지 본능적으로 알고, 개들도 캄캄한 밤에 주인과 도둑을 구분한다. 발자국 소리만 듣고도 안다. 양들도 신호나 음성을 듣고 목자를 안다. 무기가 없는 양, 뿔도 변변치 않고 날카로운 이빨도 없다. 빨리 달아나지도 못한다. 그저 유일한 무기가 목자, 그들에게 목자는 목숨이나 다름없다. 목자를 따르지 않으면 죽기에 목자만 따른다.

그런데 인간은 창조주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생명의 길을 알지 못한다. 우리의 이성과 감성과 영성이 닫혀있기 때문이다. 열어야 한다. 그래야 생명의 음성을 듣고 생명의 길을 안다. 문제는 탐욕과 집착, 어리석음과 고집이다. 그 집착과 고집으로 스스로 소경되고 귀머거리가 되고 말았다. 죽는 길인지도 모르고 좋아보이는 길,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을 따라간다. 정신차려야 한다. 잘못 따라가면 도살장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목자가 ‘자기 양의 이름을 안다’고 했다.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3절), ‘자기 양’이라는 표현이 반복된다. 목자가 자기 양에게 이름을 붙이고, 정확히 알아내듯 예수님은 자신이 선택한 자를 분명히 아신다는 말씀이다. 13장에서도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신다”고 했다(1절). 반복해서 ‘자기 양’, ‘자기 사람’이라 하셨다.

그렇다. 우리는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 우리가 교회에 발을 들인 것도 하나님의 택하심 때문이었다. 우리는 이것을 ‘선행 은총’(prevenient grace)이라 부른다. 내가 결정한 것이 아니라 이미 나를 부르셨다(15:16). 우연이 아니다. 우리는 사막 가운데, 어둠 가운데 홀로 서있는 존재도 아니다. 우리 이름을 아시는 분, 그 예수님이 사랑의 음성으로 삭개오를 부르신 것처럼 우리 이름을 부르신다. “삭개오야!” 이름만 아시는 게 아니라 우리의 고유하고 독특한 개성, 내 처지와 형편도 다 아신다. 사람들은 잊고 무시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 개개인을 정확히 알고 계신다. 성경은 말한다.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사49:16). 잊지 말라. 예수님은 ‘사랑의 문’이시다.

더 풍성한 생명의 문

예수님은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 오셨다(10절). 생명이라고 다 같은 생명인가? 아침 이슬을 머금고 활짝 피어난 탐스러운 꽃처럼 싱싱한 생명이 있는가 하면, 가뭄이 계속되는 무더운 여름 한낮에 축 늘어진 식물처럼 병든 생명도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중환자실에서 산소호흡기를 의지하고 있는 환자들은 살아 있기는 해도 병든 생명이다. 육체적 생명만 그런가? 정신이 병들고, 영혼이 병들고, 삶이 병든 사람들이 너무 많다.

마음이 행복하고, 사는 보람이 있고, 삶에 대한 의욕이 넘쳐야 건강한 생명인데 거대한 저택 안방에서 신음하고, 수백만 원짜리 양주를 마시면서 탄식하고, 수입 좋고 인기는 좋지만 파탄에 이르고, 건강하면서도 땅이 꺼져라 한숨 쉬는 사람이 너무 많다. 죄다 병든 생명이다.

별것 아닌 것 갖고도 감사하며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다. 예수께서 우리를 죄악의 막장에서 꺼내 은총의 빛 아래 두셨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 아닌가?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고, 삶의 의미를 주고, 인생의 목표를 주셨다.

김진태 씨는 1993년 어머니에게 상습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던 아버지를 공기총으로 쏴 죽이고 37세에 사형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10년 동안 집행일을 기다리다 예수님을 만났는데 세상은 그에게 죽음을 선고했지만, 예수님은 생명을 주셨다. 얼마나 감사한지 6백여 명에게 전도하고, 사형수들에게는 면제되는 화장실 청소를 도맡아 하고, 장기도 모두 기증했다. 이 사실이 대통령실에까지 알려졌고, 대통령은 정권 말기에 사면권을 행사해 그를 출감시켰다.

생명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런데 예수님은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 왔다고 하셨다. ‘더 풍성히’, ‘초월하여’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세상을 초월하여 사신 분, 요한복음서가 쓰여질 당시 많은 성도들이 외부의 핍박 등을 이유로 참 기쁨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요한은 ‘환경을 초월한 신앙’을 강조한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병든 생명을 건강한 생명으로 바꿔 주고, 슬픔 대신 기쁨을 주고, 무기력함 대신 의욕을 주며, 말초적 쾌락 대신에 거룩한 행복을 주는 예수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신다면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시 16:8-9), 다윗처럼 노래하며 날마다 예수 안에서 더 풍성한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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