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차별금지법’ 등 사회적 논의 우선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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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유엔에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과 관련해 “한국은 헌법상 평등 원칙에 따라 차별과 편견을 방지할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다”면서도 “현재 국회에 제출된 법안 4건이 세부적인 내용에 차이가 있어 건설적인 토론을 통해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해야 할 것”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지난 14일(현지 시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제9차 유엔여성차별철폐협약 대한민국 보고서 심의에서 ‘차별금지법’ 제정과 관련한 질문에 이같이 답한 것인데 법 제정에 앞서 사회적 공감대가 반드시 필요하고, 아직 그런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지난 1979년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국제기구로 여성차별철폐협약이 원활하게 이행되도록 감독하는 성격을 띠고 있다. 1984년 12월, 이 협약에 가입한 우리나라 역시 그 대상이기 때문에 우리 정부는 4년마다 관련 분야의 정책성과를 유엔에 제출해왔다.

이번 심의는 2018년 2월 제8차 보고서 심의 이후 코로나19 등으로 인해 6년 만에 열린 공식 회의인지라 각국의 어떤 현안이 다뤄질지 관심을 모았다. 이 중 우리나라는 차별금지법 제정, 위안부 피해자 문제, 여성가족부 폐지를 비롯한 다방면의 인권 현안이 심의 대상에 포함됐다.

여성가족부와 법무부, 보건복지부 등 여성 관련 정책을 다루는 유관 부처로 구성된 정부 대표단은 이번 회의에 양성평등 분야의 정책적 성과를 소개하고 여성인권 개선 활동이 지속되고 있는 점을 부각하는 데 주력했다. 정부 대표단 관계자는 이와 관련, 사회 각 부문에서 여성과 관련된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정책적 개선을 위해 노력해 온 점과 양성 평등에 기초한 노동환경을 조성하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지원 확대를 중점적으로 소개했다고 전했다.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가 이번 심의에서 대한민국의 △차별금지법 제정, △여성가족부 폐지 등을 심의 대상에 포함시킨 건 이와 관련한 우리 정부의 정책 개선이 미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위원 중에 한국에서 차별금지법 입법이 이뤄지지 않는 이유와 여가부 폐지를 위한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철회할 뜻이 있느냐는 질의가 나온 것도 이런 분위기를 말해준다. 하지만 이에 대해 우리 대표단은 차별금지법 제정은 사회적 공감대가 필요하고, 여성가족부 폐지 방침과 관련해선 “양성평등 업무나 기능을 축소하는 것이 아니라 더 효율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대표단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대해 지난 2015년 한일 합의에 따라 피해자의 명예회복과 마음의 상처 치유를 위해 계속 노력한다는 기존 입장과 함께 기지촌 성매매 피해자를 위해 자활지원센터를 마련하는 등 생활 지원사업을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또 ‘비동의 간음죄’ 도입에 대해선 도입에 앞서 성폭력 범죄 체계 전반에 대한 심도 있는 검토가 필요하다고 답했다고 한다. 이는 강간죄의 구성 요건을 ‘폭행 또는 협박’에서 ‘동의 여부’로 바꾸는 ‘비동의 간음죄’ 입법 의향을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이 또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 핵심이다.

이중 특히 관심을 모은 게 낙태죄 폐지와 관련한 부분이다. 위원들은 2019년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후 낙태에 대한 안전한 접근 등 제도적 뒷받침이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는 아무래도 낙태를 여성의 자기 결정권으로 인정한 유엔의 흐름을 반영한 질문이 아닐까 싶다. 이에 대해 우리 대표단은 “한국 정부는 태아의 생명권을 보호하고, 임신 유지·종결에 대한 여성의 자기 결정권 개선을 위한 형법과 모자보건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며 “향후 법 개정 완료 후 개정된 법령에 근거해 관련 제도를 보완할 것"이라고 답변한 것으로 전해졌다.

낙태와 관련해 유엔 등 국제기구는 여성의 인권 측면에서 ‘자기결정권’에 무게를 두고 있다. 하지만 헌법재판소가 2019년 4월 낙태죄를 위헌으로 판단한 건 형법상 낙태죄가 헌법 정신에 부합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지 낙태를 해도 괜찮다는 판결이 아니란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 문제로 우리사회는 여전히 혼란한 상태에 있다. 형법상의 낙태죄가 폐지됐다고 낙태가 허용된 게 아닌데도 불법 낙태로 많은 태아가 죽어나가고 있는 점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건 형법상 낙태죄가 폐지됐더라도 모자보건법과 모자보건법 시행령에 임신 24주 이내인 경우 일부 예외적인 경우에 한해 임신중단을 허용한다는 법조문이 여전히 남아있는 점이다. 이런 혼란을 끝내기 위해서라도 국회가 조속히 관련 법 정비에 나서야 할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6월 개원하는 22대 국회에서 야당의 무리한 입법 폭주가 재연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목소리가 많다. 그중 교계가 특히 우려하는 것이 ‘차별금지법’ 제정 시도와 낙태죄 폐지에 따른 대안 입법과정에서 태아의 생명이 소외되고 여성의 자기결정권에 치우치는 법안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부분이다. 인구 절벽이란 위기 속에서 태아는 마구 죽이고 한 쪽에선 저출생 대책에 혈세를 쏟아 붓는 이율배반이 반복되어선 안 될 것이다.

이번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에서 정부 대표단의 보고 내용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이를 다 모범답안이라 할 순 없겠지만 법 이전에 사회적 합의와 공감대가 우선이란 점을 강조한 건 매우 적절했다 할 것이다. 개원 전부터 무성한 말이 오가는 22대 국회가 만인에게 평등하고 만인을 위한 공익의 관점에서 바른 입법에 힘을 쏟음으로써 입법부의 순기능을 회복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