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구원에 대한 다양한 관점들
1. 선교에 있어서 구원 이해의 흐름
1) 전통적인 구원 이해
기독교의 구원관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고안이나 노력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이 주어짐을 강조한다. 구원은 회심(개인 구원의 시작), 성화(구원받은 자의 일생의 과정), 영화(구원 사역의 완성) 등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전통적인 구원 이해는 주로 ‘회심’과 ‘칭의’에 많은 강조점을 두는 경향이 강했다. 회심은 구원 전체 과정의 가장 근본적인 토대를 이루기 때문이다. 회심을 통하여 인간은 하나님과의 적대관계를 종식시키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갖게 된다. 또한 회심을 통하여 인간은 죄의 문제를 해결함 받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는 ‘칭의’를 얻게 되는 것이다. 즉 인간이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존재”이며 그런 점에서 ‘잃어버려진 존재’라는 전제 위에서 인간의 참된 행복은 오직 “주 예수를 믿으라”(행 16:31)는 말씀을 순종할 때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육적인 상태가 어떤 상태에 있든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그는 구원을 받고, 그 후로 그의 육체적 사회적 환경은 구원 이후의 열매 단계로 점진적으로 변화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구원 이해 위에서 전통적인 선교는 주로 회심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왔다. 영혼이 구원을 받을 때 육의 문제도 점차로 해결되고, 개인이 구원을 받을 때 사회도 점진적으로 향상된다는 이해를 견지하였다. 즉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회심이 구원의 ‘씨’에 해당되고, 육적인 여건 향상과 사회의 변화는 ‘열매’에 해당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을 지녔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전통적인 선교도 질병의 치유, 가난 문제 해결, 사회구조 개선 등을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것들을 선교의 핵심사역으로 보지는 않았다. 선교에 있어서 가장 주된 관심은 늘 죄인들로 하여금 예수를 만나게 하는 회심에 있었다. 다른 사항들은 구원을 받은 후에 점진적으로 이루어가야 할 사항으로 보는 경향이 강했다.
2) 에큐메니칼 구원 이해
Missio Dei(하나님의 선교) 개념의 출현과 함께 에큐메니칼 진영은 이 세상을 ‘하나님의 활동의 장’과 ‘일차적인 사랑의 대상’으로 보는 관점을 지니면서 위와 같은 전통적인 구원 개념에 대하여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1963년 멕시코 CWME 대회에서 “세속화된 세계 속에서 그리스도가 제시하는 구원의 형식과 내용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졌고, 1973년 방콕 CWME 대회에서는 “오늘의 구원” (Salvation Today)이란 주제를 내걸고 기독교의 구원론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였다.
방콕 구원이해의 특징은 ‘오늘의 구원’(Salvation Today) 이라는 주제에서 잘 나타나듯이, 죽은 후 내세에서 주어지는 구원이 아니라 오늘 이 땅에서 주어지는 구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전통적인 구원이 주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즉 회심과 영혼구원에 초점이 맞추어져있다면, 방콕의 구원은 현세에서의 차원 즉 물질 문제, 억압과 착취의 문제, 소외의 문제 등의 해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전통적인 구원이 주로 개인의 구원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방콕의 구원은 사회의 구조악 갱신을 포함하는 사회구원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전통적인 구원이 주로 개인의 영혼구원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방콕의 구원은 포괄적인 구원 개념으로서 영혼의 구원을 넘어 육신의 구원 그리고 개인의 구원을 넘어 사회의 구원까지를 포괄하는 구원개념을 지니고 있다. 이와 같은 구원이해의 특징 때문에 전통적인 선교가 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여 개인의 영혼을 구원하려는데 초점이 맞추어졌다면, 에큐메니칼 선교는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것에 대항하고 투쟁하여 해방을 얻도록 도전하는데 관심이 많았다고 할 수 있다.
3) 통전적 구원 이해
앞에서 살펴본 방콕의 구원이해는 포괄적인 구원개념을 지니면서도 그 주제에서도 나타나듯이 이 세상에서의 문제 해결 차원 즉 해방 차원의 구원개념에 치우친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1975년 나이로비 대회 이래로 에큐메니칼 구원 개념은 영과 육, 개인과 사회, 인간과 모든 피조물의 구원을 말하는 통전적 구원을 강조하는 경향으로 나아갔다. 1989년 산 안토니오 대회는 “물질과 정신의 절대적 분리는-고대 희랍이나 인도의 철인들의 주장처럼-배격된다. 그리스도는 전인으로 성육신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혼의 구원자일 뿐만 아니라 전인과 물질적-영적 피조물 전체의 구원자이시다.” 라고 말하면서, 구원을 영의 구원과 육의 구원으로 나누어서 생각하는 것 자체가 비성경적인 관점이라고 생각하고, 영과 육의 구원, 그리고 개인과 사회의 구원을 하나로 보았다.
이러한 견해는 현대과학의 인간 이해와도 연관성을 지니는데 현대의 행동과학과 심신상관설에 의하면 인간의 마음과 몸은 하나로 결합되어 있어서 인간의 영혼과 육체는 합일체이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통전적 구원이해는 인간이 필요로 하는 구원이란 영적인 구원만이 아니라 영과 육을 모두 포함하는 구원 개념을 지닌다.
한편 방콕의 구원이해는 개인구원을 넘어선 사회구원은 말했지만 아직 모든 피조물의 구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에큐메니칼 신학은 점차 모든 창조세계의 구원을 구원의 범위에 포함하기 시작했다. 에큐메니칼 선교문서인 “함께 생명을 향하여”는 모든 피조물이 구원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 것에 대하여 “… 우리는 온 창조가 우리가 부름 받은 목적인 화해된 일치 안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종종 잊고 있다(고후 5:18-19). 창조세계는 버림받고 오직 영혼들만 구원을 받는다고 믿지 않는다. 땅과 우리의 몸은 모두 성령의 은혜로 변화된 것이 틀림없다.”고 언급한다.
이와 같은 통전적 구원이해에서 추구되어지는 선교는 더 이상 어느 한쪽에 우선순위를 둘 수 없다. 영적인 구원을 위한 복음전도가 중요하듯 육적인 구원을 위한 봉사와 사회행동도 똑같이 중요한 것이다. 인간을 구원하는 선교가 중요하듯 모든 피조물을 돌보는 선교 역시 똑같은 중요도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2. 통전적 구원 개념의 한계점
1) 복음의 감소 또는 변질
에큐메니칼 통전적 구원 개념은 나름대로 기여점이 있다. 저 세상만을 위한 구원이나 영혼만을 위한 구원으로 축소될 수 있는 구원이해의 폭을 넓혀주었다는 점 등은 나름대로 기여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약을 먹으면 병이 치료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부작용이 더 발생하는 경우도 있듯이, 새로운 구원 개념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부작용도 있음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한계점은 세계 변혁의 가장 중요한 핵심과 출발점인 회심에 대한 강조가 약화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장로교 조직신학의 거목이었던 이종성은 에큐메니칼 신학의 달라진 복음 이해와 문제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이 범하고 있는 큰 과오는 인간의 구원과 사회 불의를 해결하는 방법이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 관계를 통한 믿음으로써가 아니라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방법을 통해서라야 한다고 믿는 데 있다고 한다. 그들에게는 죄의식이나 회개에 대한 의식은 없다.
구원은 육체적 불행을 덜어주는 것이 아닐 수 있다. 아니 어떤 경우에서는 구원을 받음으로써 그리스도를 위하여 오히려 더 가난해지고 고난에 처할 수도 있다. 구원에 육체적 사회적 상황 개선까지를 포함하는 통전적 구원이해는 자칫 복음을 가난한 자들과 눌린 자들만을 위한 복음으로 축소시킬 가능성이 있다. 이런 점에서 보쉬는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에서 우리는 복음의 심각한 감소 및 변질을 접하게 된다.” 라는 평가를 한다.
2) 구원 개념의 모호성
에큐메니칼 통전적 구원 개념에 의하면 구원은 예수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모든 억압으로부터도 벗어나야만 진정한 구원을 받은 것이다. 가난의 억압, 권력의 억압, 질병의 억압, 외로움 등에서 모두 벗어나야 진정한 구원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 세상에 사는 사람 중 그 어느 누구가 모든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 부자나 권력자는 이런 억압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울까? 모든 억압으로부터도 구원을 받아야만 진정한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하면 북한에 있는 성도들은 구원을 받은 것인가 못 받은 것인가?
예수는 함께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고 선언하셨고,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된 노예들이 여전히 노예의 신분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구원받은 성도로 생각하면서, 주인을 잘 섬기라고 권면하였다 (엡 6:5, 딤전 6:1-2). 에큐메니칼 통전적 구원 개념의 기준으로 하자면 이들은 억압과 고통 가운데 있는 상태이기에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기 어렵다. 이런 기준으로 구원을 정의하기 시작하면 구원의 개념이 매우 모호해질 수 있다. 그리고 구원의 개념이 모호해지면, 구원을 전하는 사역인 선교사역 역시 혼란스러워질 수 있다. 개념이 명확치 않으면 그 사역은 효율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3) 구원받은 사회 개념의 모호성
통전적 구원 개념은 개인의 구원과 사회의 구원을 동일한 중요도로 본다. 아니 개인 구원과 사회 구원을 나누어서 생각하는 것 자체를 생각할 수 없다고 본다. 방콕은 선교단체들이 현지에서 사회 정의 구현을 위한 사역을 하지 못하는 한 철수하라고 권면함으로써 사회정의 구현이 전도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구원을 받은 사회란 도대체 구체적으로 어떤 사회인가? 방콕은 대략 서구 정도의 부와 인권을 확보하고 유지하는 것을 사회구원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 서구 정도의 부와 인권을 확보하지 못한 사회에 사는 기독인들은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말인가? 한편 서구 정도의 부와 인권을 확보한 사회는 구원을 받은 사회인가? 도대체 어느 정도 부와 인권을 이룬 사회를 구원받은 사회라고 볼 수 있을까? 국민소득은 얼마이고, 국민의 인권수준은 어떤 수준이고, 국민의 행복도는 어느 정도여야 구원을 받은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 현존하는 나라들 중 어느 나라 혹은 어느 사회를 구원받은 사회의 예로 말할 수 있을까? 오늘날 많은 서구 선진 국가들은 물질적으로 어느 정도 풍요롭고 인권은 향상되었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고 자신들만의 이익과 쾌락을 쫒아가는 사회들인데 그런 사회를 과연 구원받은 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까?
휫트비는 “… 이 세계의 슬픔의 근원이 영적이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의 모든 삶의 차원으로 침투해 들어가셔야 이 세계의 치유가 가능 …”해진다고 일찍이 선언하였다. 보쉬도 “… 기독교 복음은 현대의 해방 운동들의 의제와 동일하지 않다.”고 설파한 바 있다. 에큐메니칼 통전적 구원 개념은 구원과 구원받은 자들이 만드는 사회를 구분하지 못하고 구원을 자칫 막시즘이나 인권운동가들이 말하는 구원으로 축소시키거나 구원 개념을 모호하게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 않은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계속)
안승오 교수(영남신대)
성결대학교를 졸업하고 장로회신학대학원(M.Div)에서 수학한 후, 미국 풀러신학대학원에서 선교학으로 신학석사(Th.M) 학위와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다. 총회 파송으로 필리핀에서 선교 사역을 했으며, 풀러신학대학원 객원교수, Journal of Asian Mission 편집위원, 한국로잔 연구교수회장, 영남신학대학교 대학원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Rethinking the Theology of WCC』, 『사도행전에서 배우는 선교 주제 28가지』, 『현대 선교학 개론』(공저), 『한 권으로 읽는 세계 선교 역사 100장면』, 『성장하는 이슬람 약화되는 기독교』, 『현대 선교신학』, 『현대 선교의 핵심 주제 8가지』, 『현대 선교의 프레임』, 『제4 선교신학』, 『성경이 말씀하는 선교』, 『현대 선교신학(개정판)』, 『현대 선교의 목표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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