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52) “내가 믿나이다”

오피니언·칼럼
설교
요 9:35-41
이희우 목사

인간으로서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운명으로 태어난 사람, 마치 피할 수 없는 결말 같은 불행하고 비참한 운명으로 태어난 것 같은 남자, 그런데 그는 운명을 저주하거나 실망하며 좌절하지 않고 살아왔다. 왜 원망이 없었을까? 하늘도 무심하다는 생각이 한 번도 없었을까? 모르긴 해도 처절한 절규와 남모르는 눈물과 한숨이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되었을 수도 있다. 그만큼 힘겨운 운명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자신의 저주스러운 운명을 탓하거나 자신을 포기하는 식의 무책임한 삶을 살지는 않았다. 구걸은 했어도 살기 위한 방편, 그는 구걸을 생의 수단으로 삼고 신실하게 산 건강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원시적인 치료행위도 수긍하며 군말없이 받아들였다. 기분 나쁘고 더럽고 신경질나는 처방이었지만 그에게 자존심은 사치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눈 뜨는 기적, 암흑에서 광명을 되찾는 기적을 경험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불어오는 광풍을 이겨낸다. 광풍은 이웃 사람들과 바리새인들로부터 매섭게 불어왔다. 급기야 생존권을 박탈당하는, 사형 언도 같은 출교를 당해 이제는 가족은 물론 사회로부터 완전 고립이다.

그런데 출교 소식을 들은 예수께서 그를 다시 만나주신다(35절). 자기 눈을 뜨게 해 준 사람에 대한 동경과 확신과 소망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 그를 예수님이 일부러 찾아주신 것이다. 그때 했던 그의 고백이 “내가 믿나이다”였다.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을 만나다

주님 편에 서는 자에게 보상이 있다고 했던가? 출교당한 그를 예수님이 찾아오셨다. 자기를 계시하신 것이다. 이제 9장의 맹인이 눈을 뜬 사건은 예수님이 그를 만나 주심으로써 종결된다. 사건 종결!

이 시점에서 다시 사건을 복귀해 본다면 이 사건은 좀 특이했다. 예수님이 눈을 뜨게 해 주신 다음 아무 언급 없이 현장에서 사라지셨다. 이름만 난무했을 뿐 예수님은 없고, 맹인이었던 사람은 예수님이 누군지도 모른 채 고군분투한다. 그러나 ‘진리를 얻은 자’다웠다. 고군분투하며 진리를 점점 더 깊이 깨달았다. 눈을 떴어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는 여전히 영적 맹인이었을 것이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면 영적인 눈이 열린다는 것을 보여준 사람이다.

맹인 찬송가 시인 패니 크로스비(Fanny J. Crosby)는 ‘찬송으로 보답할 수 없는 큰 사랑’(40장), ‘찬양하라 복되신 구세주 예수’(31장), ‘예수 나를 위하여’(144장),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288), ‘주의 말씀 받은 그 날’(285장), ‘저 죽어가는 자 다 구원하고’(498장), ‘인애하신 구세주여’(279장), ‘나의 갈 길 다가도록’(384장). ‘오 놀라운 구세주’(391장), ‘나의 영원하신 기업’(435장) 등 찬송가에 수록된 곡만 21곡, 약 1만 곡 정도의 찬송시를 쓴 ‘찬송가의 여왕’이다. 그녀의 곡 대부분은 주님께 대한 기쁨과 찬양으로 가득 차 있다. “예수로 나의 구주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그의 사랑 어찌 큰 지 말로 할 수 없도다”

고난과 역경을 딛고 다시 예수님을 만난 것, 예수님이 찾아주신 것인데 이웃과 부모와 세상 권위의 위력을 뚫었고, 출교 협박을 이겨냈기 때문에 누린 큰 은혜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38절), 그는 감격스런 신앙고백을 한다. 그동안 산과 골짜기를 지났지만 황야의 추위와 외로움과 강도의 위협을 견뎠다. 후회와 돌아가고픈 망설임과 시장과 쾌락과 유혹을 이겨냈다. 그렇게 브레이크 없이 달렸더니 길 끝에 성소가 있고, 예수님이 계신다. 그는 결국 그토록 뵙고 싶었던 예수님을 다시 만났다.

믿음을 고백하다

본문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믿는다’라는 단어다. 예수께서 “네가 인자를 믿느냐?” 물으셨고 이 사람은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36절), 바로 ‘내가 믿습니다’ 그런 게 아니다. ‘믿고자 하나이다’, 열린 마음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믿고자 하는 열린 마음의 사람이라서 다시 찾아가신 것, 그래서 당신을 계시하셨다.

믿고자 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물론 그 마음이 믿음은 아니다. 하지만 믿고자 하는 사람은 준비된 사람, 아직 예수님이 누구신 줄을 모르고 있을 뿐, 텃치만 하면 받아들일 사람이다. 그는 “그가 누구이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라고 물었고, 예수께서 그가 바로 자신이라고 말씀하시자 즉각 “주여 내가 믿나이다”(38절) 고백한다. 전인적인 고백이다. 그리고 “절하는지라”, 자기를 다 드리겠다는 자세다. 이게 바로 테스트를 통과한 자의 신앙고백이다.

신앙은 담대함, 용기, 고백, 그리고 삶으로 이어짐이다. 9장의 주인공은 1절부터 여기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거치며 엄청난 갈등을 이겨내고 마침내 고지를 점령했다. 고군분투가 헛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에게 믿음은 끝까지 싸워서 이긴 눈물겨운 선물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9장의 주인공과 달리 십자가의 강도는 너무 쉽게 구원받았고 한다. 그런데 십자가의 강도가 받은 구원이 쉬운 구원이었을까? 아니다. 그건 마치 전과 8범이 전과 7범에게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오히려 “잘난 체하고 설치더니 똑같네” 그럴 수 있는 것 아닌가? 성경에 보라. 그 강도도 처음에는 욕했다.

구원, 쉬운 것이 아니다. 인도의 캘커타의 성녀로 불렸던 마더 테레사(Teresa)가 한때 무신론적 경향이 있다는 논란이 인 적 있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Time)이 2007년도 8월호에 테레사 수녀의 편지 40여 편을 엮은 『마더 테레사: 나의 빛이 되어라』(Mother Teresa: Come Be My Light)라는 책을 소개했는데 여기서 인용된 편지 내용 때문이다. 1979년 9월에 한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마더 테레사가 “침묵과 공허가 너무 크다”며 “나는 보려 해도 볼 수 없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으며 기도를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노벨 평화상 수상 연설에서는 완전 다른 연설을 했다. “예수는 우리 안에 있고, 우리가 만나는 빈자들 안에도 있고, 우리가 주고받는 미소 안에도 있다” 타임지는 자기 모순적 태도라고 혹평했다.

또 1953년 편지에선 “마치 모든 게 죽은 것처럼, 내 안에 너무 끔찍한 어둠이 있다”고 했고, 1959년 편지에서는 “내 영혼에 왜 이렇게 많은 고통과 어둠이 있는지 얘기해 달라”고 했다. 타임지는 “테레사 수녀의 편지들로 볼 때 빈민을 돌보는 삶을 48년 동안 살았지만 죽을 때까지 이 같은 고통에 시달린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한평생 위대한 신앙의 삶을 산 것 같은 사람이 마지막에 ‘하나님의 존재’도 의심한 사람으로 밝혀졌다며, “테레사 수녀는 은혜의 바다 한복판에서 오히려 영적으로 메마를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혹평한 사람도 있지만 콜로디에추크 신부는 “테레사 수녀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혀 느끼지 못하면서도 매일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내가 원하는 것은 당신의 행복뿐’이라고 기도했고, 기독교인들이라면 누구나 겪는 ‘신앙 속의 어두움(darkness within faith)’을 평생 껴안고 살면서도 믿음으로 충만한 궁극적 구원(perseverance)을 이뤄냈다”고 평가했다.

테레사 수녀가 정말 예수님의 존재를 의심했을까? 아닌다. 그저 하나님의 감미로운 현존이 전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에 대한 불안을 솔직하게 표출한 것 같다. 우리도 극심한 고통 가운데 있거나 영혼의 어둠이 짙을 때, 하나님의 침묵이 너무 길다고 느낄 때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나? 그 의심은 오히려 믿음이 있기 때문에 생긴 것 아닌가? 연인 사이에 사랑을 요구하고 확인하는 것은 당연한 것, 이 단계를 통과해야 온전한 단계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9장의 주인공도 마더 테레사와는 좀 다르긴 해도 나름대로 신비신학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부재, 긴 기간 동안의 ‘어둔 밤’을 겪었다. 그 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 밝은 빛을 보게 되었기 때문일까? 그의 고백이 돋보인다. 급진적 발전, 그러면서도 계속 발전하는 고백이다. 처음에는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눈 뜨게 해 주었다는 수준이었지만 안식일을 범한 죄인 취급을 당하자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고백하더니 출교라는 협박 카드를 받고도 고군분투하며 그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하나님의 사람’이라 했고, 이제는 마침내 ‘인자 곧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 멋지지 않나?

묻는다. 맹인이었던 이 사람처럼 정말 예수님 편에 서 있나? 혹시 테스트가 필요한가? 그러려면 내가 예수님 편에 섰을 때 닥쳐올 상황들과 그때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예수님 때문에 따돌림받을 때 어떤 반응일지, 예수님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수님 때문에 손해 보고 예수님 때문에 위기에 처할 때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를 생각하자는 거다. 성경은 주님의 말씀대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면 형통이라 했나? 그럴 수도 있지만 오히려 손해, 위기, 불편이 따라올 수 있다고 하지 않나?

다시 묻는다. 혹시 편한 길, 쉬운 길만 가려고 하지 않나?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의탁하지 않으셨다.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2:23-24), 심지어 좇아와도 도망치셨다(6:15). “노땡큐!” 하신 거다.

9장의 주인공처럼 복음을 위해 ‘사서 고생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주님 믿는 것 때문에 오는 대가를 기꺼이 치르고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만 위해 사는 사람, 어떤 신변의 위험에도 끝까지 배반하지 않고 진리 편에 서는 사람,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성경은 그가 예수께 “절하였다”고 했다. 믿는다는 의미, 흔들림 없는 믿음의 삶을 살겠다는 충성의 표시다. 그는 과연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답다.

예수님께 예배하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38절), 그는 먼저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한다. 그리스도(메시야)라는 고백이다. 그리고 ‘절하는지라’.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행동으로 예배했다는 말이다. 여기 ‘절한다’(προακονεω)는 말은 최상, 최대, 최고, 최귀의 행위를 가리키는 행동적 고백, 그는 자신의 본래로 돌아갔다. 무슨 얘긴가? 자신이 지음받은 존재론적 의미와 내용과 목적이 창조주를 향한 ‘절함’, 곧 예배라는 말이다. 예수님이 눈을 뜨게 해 주신 목적이 결국은 그에게 ‘예배’(절함)를 받으시기 위함이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12:13).

예배는 믿는 사람의 본분이자 행복이다. 믿지 않는 사람은 할 수 없는 일, 그들은 예배를 싫어한다. 예배는 믿는 사람이 하는 것, 그래서 성경에는 아예 믿을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강제로 믿게 하는 사례는 거의 없고, 대부분 믿고자 하는 마음이 어느 정도 있는 사람을 하나님이 찾아가셨다.

고넬료가 그랬고, 에티오피아 사람이 그랬고, 빌립보의 간수가 그랬고, 루디아가 그랬다. 루디아는 처음 복음을 듣는 순간에 하나님이 그 마음을 열어서 청종케 했다. 이렇게 하나님이 마음을 열어주시고 믿고자 하는 열린 마음을 주셔서 예배의 사람이 되게 하셨다.

그런가 하면 끝내 안 믿는, 예수께 절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바리새인들이다. 그들은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39절)는 예수님의 말씀에 발끈한다. “우리도 맹인인가?”(40절), 우리가 이렇게 멀쩡하게 눈 뜨고 있는데 우리가 눈 멀었다는 말인가? 냉소적인 빈정거림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눈멀었음이 영적인 것임을 알지 못하는 신앙적 무지를 드러내며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했다. 예수께 절대 예배하지 않겠다는 거다.

세상에는 안 믿는, 예배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일단은 믿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준비된 사람과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잘 몰라서 못 믿는 사람들부터 찾아 예배자 되게 해야 한다. 세상에 예상외로 그런 사람들이 많다. 모든 사람들이 코로나 때 전도가 안된다고 했지만 정재준 장로는 “코로나 때가 오히려 전도하기 좋은 때”라고 했다. 코로나 때문에 사람을 안 만나는 사람들과 만나보니 오히려 마음 문을 더 잘 열더라고 했다. 그래서 전도가 더 잘 되었다는 거다. 본인은 이런 표현을 싫어한다고 했지만 그는 이 시대의 전도왕이다.

이제 예수님은 반발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말씀하신다.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41절). 예수님은 영적으로 눈을 뜨는 것과 눈이 멀어있는 것을 죄의 문제와 연결시키셨다. 예수님의 존재와 그의 구원사역을 알고 믿는 일은 단지 지적인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죽고 사는 문제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의 아들로 믿고 영접하는 사람들은 구원받고 예배자가 되겠지만 끝까지 믿지 않고 거부하는 사람들은 죄 가운데서 결국 멸망하고 결코 예배자가 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히신 것이다.

기억하라. 예배는 기쁨이다. 맹인이었던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 너무 좋아 그에게 절을 했다. 그 사람처럼 우리는 빛을 본 사람답게 믿음으로 예배하며 살아야 한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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