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물질중심주의, 생명경시 문화와 돌봄에 대한 가치 부재
저출산 문제에 대해 경제적 문제를 많이 들고 있지만 과거의 우리 사회는 지금보다도 경제적으로 더 빈궁했음에도 더 많은 출생률과 더 낮은 자살률을 보여 왔다. 그러므로 이것은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생명존중문화가 뒷받침되지 않고 경제적인 지원 - 수당 인상, 대출 탕감 등 - 에만 집중하게 되면, 돈을 받기 위해 아이를 낳고는 키울 자질(낙관, 헌신, 사랑)은 부족하여 아동학대를 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급속한 경제성장과 IMF 사태 이후 복지시스템이 미비 된 상태에서 닥친 실업과 소득 감소는 한국인들을 더욱 물질에 집착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한국에서는 소득이 높을수록 더 물질주의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최근 미국의 한 리서치 업체가 선진 17개국에서 실시한 삶의 우선순위 관련 설문에서 유일하게 한국인만 가족보다 돈을 더 중요하게 꼽았다. 이를 통해 가족에 대하여 우선순위를 두는 것이 혹자들이 주장하듯 구시대 산물이나 후진국의 지표가 아님도 엿볼 수 있다. 한국인의 ‘돈=행복’이라는 사고방식은 ‘가정=행복’이라는 사고방식으로 변화할 필요가 있다. 한국인의 행복지수는 OECD 기준 57위로서 최하위 수준이다. 경제 규모가 4배로 오르는 동안에도 행복지수는 하위권을 밑돌고 있다. 저출산 국가들에서 시행된 종단적 연구 결과에 따르면 삶에 대한 만족도는 자녀 출산을 촉진시킨다는 것이 밝혀져 있다. 한국 사회의 물질주의적인 사고방식은 과잉경쟁, 비인간화, 사교육 증가와도 연결되며 이에 따라 만혼 및 비혼, 저출산이 악화하고 있다.
더 나아가 한국은 생명존중의식이 떨어지고 돌봄의 문화 및 인프라가 약하다. 자살률이 높을 뿐만 아니라 ‘죽을 권리’에 대한 담론까지 퍼져 나가고 있다. 자살에는 전염 효과가 있으며, 죽을 권리에 대한 강조는 자신의 삶을 끝내고 싶어 하는 사람에 대한 무관심의 문화를 조장할 수 있다. 관심과 돌봄의 부재는 사람들로 하여금 삶보다는 죽음을 택하게 만들 수 있고 “이 험한 세상에 어떻게 아이를 낳나”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새로운 생명의 탄생에 걸림돌이 된다.
2. 저출산 문제 해결을 위한 생명윤리 관점에서의 대안
가. 남녀가 함께 책임지는 출산 문화 강화
저출산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임신, 출산, 양육의 문제를 여성만의 문제가 아닌 남녀 모두의 책임 있는 선택으로 인식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임신과 출산에 있어서 남성도 절반의 책임과 권리를 가지도록 실질적으로 제도적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 모자보건법에 “모성은 임신·분만·수유 및 생식과 관련하여 자신의 건강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관심을 가지고 그 건강관리에 노력하여야 한다”라고 하여 모성의 의무를 두고 있지만, 부성에 대한 법률은 전무하여 개선이 시급하다. 이에 따라 부성애법, 양육비 책임법을 도입하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데 필자는 이에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바이다. 이는 임신, 출산, 양육의 부담이 여성에게만 지나치게 쏠려 있어 낙태와 영아 유기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친부인 남성에게도 출산, 양육에 대한 책임을 지우는 법이다. 독일에서는 미혼부가 미혼모와 그 자녀에 대한 책임을 일차적으로 지게 되어 있는데 심지어 생모가 미혼이 아니고 다른 남자와 결혼한 경우에도 똑같이 적용되며, 미혼부가 양육비 지급을 거부하는 경우 최장 3년까지 징역에 처할 수 있다. 미국에서는 친부의 소득에서 양육비를 공제하여 친모에게 제공하고 있으며, 캐나다 역시 미혼부가 양육비 지급을 하지 않을 경우 여권과 운전면허를 정지하고 벌금을 매기거나 급여를 압류한다. 또한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아동양육비 이행이 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국가의 대지급 제도 또는 선급제도도 잘 마련되어 있다. 이러한 법과 제도를 통해 한부모라도 아이를 잘 키울 수 있는 여건을 만든다면 낙태와 영아유기로 잃게 되는 생명 중 많은 수가 출생에 편입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임신, 출산, 양육의 문제가 여성만의 책임이 아니고 남성도 동일한, 구체적인 책임을 지는 것이라는 사회적인 인식전환이 일어날 것이다.
나. 모성과 부성, 아동에 대한 긍정적 인식 확산
저출산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모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적극적으로 개선될 필요가 있다. 여성 자신이 모성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긍정적 측면을 간과하고 모성에 대한 보호를 모성 이데올로기로만 치부하는 관점, 어머니가 아이를 양육하는 일에 대해 사회 낙오자로 바라보는 동정적 시선은 재고되어야 한다. 전업주부는 사회 구성원을 성장, 배출시키며 사회의 안정적 유지에 기여하고 있는 만큼 전업주부가 제공하는 노동의 가치에 대한 사회적 인정과 보상이 필요하다. 광고나 마케팅에 주부에 대한 위로와 인정의 요소를 집어넣을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수용해야 할 것이다.
모성과 부성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교육과 홍보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대만에서는 ‘가정 교육법’을 제정하여 혼인적령기의 남녀에게 ‘행복한 가정 만들기’ 교육을 하고 있으며, 미국에서도 결혼 전 교육법안을 입법화한 선례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종교계에서 운영하는 결혼예비학교, 아버지 학교, 어머니 학교 이외에 국가 주도 교육사업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러한 교육을 참고하고 전국적으로 가정과 부모 역할에 대한 교육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확대 개발하고 지원해야 한다. 아이를 키우는 방법뿐만 아니라 그것의 가치와 의미를 깊이 있게, 교제와 나눔을 통해 느끼고 공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미래에 잠재적인 부모인 지금의 어린이들과 청소년, 대학생들에게도 예비 부모 교육을 통해 모성과 부성의 의미와 가치를 내재화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양성 모두에 있어 사회적 성취가 가정에서의 행복과 다음 세대를 위한 투자보다 우월한 가치라고 인식하는 사회 분위기는 전환이 필요하다. 특히 지금까지 이러한 기류에 편승해 왔던 매스컴의 역할이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 1978년 스웨덴 정부가 내세웠던 캠페인에서 유모차에 라떼를 들고 다니는 아빠를 ‘라떼파파’로 부르고 상남자 이미지의 역도선수가 아기를 안고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 성공사례로 꼽히는 것처럼 매스컴에서 육아가 아빠의 몫이기도 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도 중요하다. 여성이 임신과 출산에 있어서 신체, 정신적, 사회적 희생을 치를 수밖에 없는 만큼, 육아에 있어서만큼은 아버지가 더욱더 주도권과 책임감을 느끼고 임할 수 있도록 다방면에서의 지원과 인식변화가 필요하다.
이와 동시에 사회적 일과 임신·출산·육아 등 가정의 일이 양립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 역시 중요하다. 이미 일과 가정의 양립을 위한 여러 가지 정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들은 정부기관이나 공기업, 대기업 이외에는 적용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직원이 출산휴가, 육아휴직을 쓸 경우 휴가 기간 중 급여 일부, 근무 공백 및 대체인력 문제 등의 부담이 개별 사업장에 지워져 직원의 출산과 육아를 반기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개개인이 임신축하금, 출산지원금은 받지만, 직장에서는 손해를 끼치고 눈치를 보게 만드는, 개인 대상의 현금살포성 정책은 실효성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84) 대부분의 OECD 국가들은 산전후휴가급여를 조세나 사회보험을 통해 부담하고 있고, 이를 기업의 의무로 지정하여 부담을 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우리나라 산전후휴가제도는 여전히 더 많은 여성을 고용할수록 기업이 더 큰 비용을 부담하게 되는 구조로서 결국 여성의 출산, 육아, 사회활동에 지장이 초래된다. 따라서 직원이 출산휴가, 육아휴직을 썼을 때 발생하는 비용에 대해서는 개별 사업장이 아닌 사회 전체가 전부 또는 그 이상으로, 지속적으로 지원하는 것을 제안한다. 또한 현재 고용보험 미가입자는 육아휴직에 대한 지원이 전무한 상태이므로, OECD 주요국들처럼 고용보험 미가입자도 육아휴직을 쓸 수 있도록 고용보험과 무관하게 가족 예산을 지원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일본의 한 회사에서 시행하고 있는 ‘육아휴직 응원수당’처럼 직원이 육아휴직을 갔을 때 남아있는 동료들에게 최대 100만 원에 해당하는 현금을 일시적으로 지급하는 방식도 임신과 출산을 하는 직원이 직장에서 실질적으로 환영받고 인정받을 수 있게 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저출산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아동의 가치에 대한 사회적 재평가와 인정, 이어서 아동에 대한 환대 문화가 확산되어야 한다. 노키즈존과 같은 배제의 문화가 예스키즈존(yes kids zone)과 같은 환대의 문화로 바뀔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서울시 소재 한 초등학교에서 실시된 어린이 존중과 사랑을 위한 “미디어 리터러시 캠페인” 등도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일회적, 소규모의 캠페인이 아닌 범국민적 지속적 캠페인이 일어나도록 예산을 투입해야 한다. 어린이의 가치에 대해, 어린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 공중파 방송 및 주요 매체를 통해 국민에게 지속해서 노출해야 한다. 소파 방정환이 어린이날 선언문 중 어른들에게 드리는 글에서 “어린이를 책망하실 때는 쉽게 성만 내지 마시고 자세자세 타일러 주시오”라고 하여 인격적인 대우와 배려를 강조하였듯이 어린이에 대한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선포하여, “당신들의 아이”가 아닌 “우리 모두의 아이”라는 인식 개선을 이루어내야 할 것이다.
연세대 의대에서 국내 지역사회 거주 1만 명 이상의 45세 이상 성인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자녀의 존재는 개인의 삶의 질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두 자녀를 둔 사람들의 삶의 질은 100점 만점에 64.8점이었고, 건강 관련 삶의 질은 100점 만점에 62.5점이었으며, 부모의 교육, 경제 수준, 만성 질환 등 교란변수를 보정한 다변수분석 결과 두 자녀를 둔 사람에 비해 자녀가 없으면 삶의 질이 -9.4점, 즉 14.5%가 감소하였고, 건강 관련 삶의 질은 -7.8점, 즉 12.5%가 감소하였다<그림 3>. 또한 노인의 사회적 네트워크와 주관적 웰빙 등에 관한 286개의 연구를 메타분석한 결과, 노인에게 있어 자녀와의 접촉의 질과 삶의 만족도 사이에 높은 연관성이 보고되었다. 이렇게 중장기적 시각에서 자녀의 존재는 삶의 질과 만족도에 도움이 된다는 결과들도 적극적으로 홍보하여야 한다. (계속)
김수정(내과 전문의, 성누가병원 내과 원장)
*출처: 생명, 윤리와 정책 제8권 제1호. 1-34 ©(재) 국가생명윤리정책원. 2024년 4월.
투고일 2024년 2월 24일, 심사일 2024년 4월 9일, 게재확정일 2024년 4월 16일 http://doi.org/10.23183/konibp.2024.8.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