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국 교수(백석대 실천신학)가 30일 복음과 도시 홈페이지에 ‘이사야가 교회 금식에 답하다’라는 제목의 글을 게재했다.
최 교수는 “성경에는 금식의 이유와 목적이 다양하게 언급되고 있다. 먼저 극한 슬픔을 표현하는 방편으로 금식을 하였다”며 “다윗은 사울의 죽음을 애도하며 금식하였다(삼상 31:11-13, 삼하 1:11-12). 다윗은 사울이 하나님이 기름 부으시고 세우신 하나님의 종이었다는 것 때문에 그가 죽었을 때 자기 원수였지만 슬퍼하며 울며 금식하였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신랑이신 예수님을 빼앗기고 난 후에 금식할 것이라고 하였다(마 9:14-15). 이처럼 금식은 극한 슬픔을 표현하기 위해 행하였다”고 했다.
이어 “다음으로, 개인의 죄나 민족의 죄를 회개하기 위하여 금식하였다”며 “니느웨 성의 왕과 백성은 요나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심판을 믿고 금식하며 회개하였다(욘 3:3-10). 안디옥 교회는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다가 세계 선교에 대한 성령님의 계시를 받게 된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행 13:2-3)라고 기록하고 있다”고 했다.
또한 “금식에는 또 다른 목적도 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충실한 봉사를 하고자 할 때, 내적으로 자신을 준비시키기 위해서 금식하였다”며 “모세와 엘리야, 그리고 예수님의 광야에서의 금식도 바로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였다(출 24, 왕상 19, 마 4). 예수님은 사십일 금식 후에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였다”고 덧붙였다.
그는 “한국 교회 안에도 금식을 중요하게 여기며 실천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한국 교회 안에는 금식에 대한 신앙과 공식이 있다. 하나는 금식은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금식은 물만 먹고 해야 한다는 신앙과 공식”이라며 “그렇다면, 우리가 금식할 때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가? 아쉽게도 성경의 답은 그 반대이다. 성경의 사람들과 초기 교회 공동체의 그리스도인들은 물만 먹고 금식을 하였는가? 그렇지 않다”고 했다.
이어 “한국 교회 안에는 이사야 58:6의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이라는 내용을 통해, 우리가 금식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가르치며 설교하기도 한다”며 “그러나 이 본문의 전후 문맥을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금식을 기뻐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판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당시 금식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행하는 영적 실천의 일부였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금식하면서도 이웃을 압제하며 위선적인 일을 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금식보다는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하신다”며 “금식은 정의로운 삶을 위한 원동력으로 작용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진정한 경건은 금식보다 사회 정의와 인권과 관계된다는 말씀이다. 성경은 금식을 근본적으로 금하지 않는다. 금식은 영성 생활에 많은 유익을 줄 수 있다”고 했다.
최 교수는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금식의 목적을 재정의하고 있다(사 58:6)”며 “하나님이 바라는 참된 금식은 이 땅에 존재하는 불의에 대응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권고한다. 불의에 대한 가장 온당한 반응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뿐만 아니라 가난한 사람에게 연민을 가지고 이 땅에 정의를 실현하고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평화를 이루기 위해 열정적으로 노력하는 것이다. 이사야가 말하는 금식의 목적은 정의와 연대이며, 다른 하나는 거룩”이라고 했다.
이어 “이사야가 말하는 금식의 목적은 다른 사람의 유익과 세상 속에서, 더욱더 거룩한 삶을 위해 스스로 고통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며 “금식의 첫 번째 목적은 가난한 사람에게 물질을 베풀기 위한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정의를 실현하는 방편이다. 금식하면서 먹지 않은 음식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고, 금식함으로써 절약된 돈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것은 거룩한 행위”라고 했다.
아울러 “금식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것을 얻는 데 목적이 있기보다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그들에게 자선을 베풀기 위한 것이었다. 금식은 자신의 거룩한 삶과 스스로 가난을 경험하며 다른 사람의 가난에 반응하는 몸의 빈곤을 경험하는 실천이었다”며 “금식은 경건한 삶을 위한 영적 실천이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고통을 경청하며, 그 고통에 참여하기 위한 사랑의 실천이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