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언어로 쓰인 텍스트다. 하나님은 인간과 소통하시려고 인간의 언어에 그분의 뜻을 담아 주셨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더욱 힘써 읽어야 한다. 그런데 질문이나 의심, 배경지식 없이 덮어 놓고 읽기만 하면 되는 걸까? 저자 오경준 목사(유튜브 채널 ‘바이블 스콜레’ 운영)는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성경의 숲과 나무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오랜 세월 분투하며 이 책을 집필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그동안 강단에서 잘못 선포되었거나 지나쳐 읽기 쉬운 신·구약 본문들을 성경 전체의 맥락 가운데 깊이 들여다봄으로써 본래의 의미를 발견하도록 도와준다.
저자는 책 속에서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슷한 기적을 다시 보이셨다. 이른바 ‘칠병이어’ 사건으로, 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4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다. 오늘날 오병이어에 대한 설교는 많지만 칠병이어에 대한 설교는 드물다. 오병이어 사건과 유사해서 일종의 아류작처럼 여겨 그에 담긴 메시지 역시 오병이어와 같을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코 그렇지 않다. 예수님이 칠병이어 사건을 보여 주신 것은 오병이어와 전혀 다른 새로운 가르침이 있기 때문이다. 칠병이어는 복음을 믿고 광야 같은 길도 기꺼이 따라가는 사람들을 주님이 큰사랑으로 돌보실 것이라는 약속이다. 오병이어가 ‘생명의떡’에 관한 것이라면 칠병이어는 ‘이 생명의 길 위에선 제자들을 먹이고 이끄시겠다는 약속’이다. 오병이어의 비밀을 아는 우리는 이제 칠병이어의 경지로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이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나의 벗 아브라함’(사 41:8)이라고 부르셨다. ‘벗’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아하브’는 구약에 220번 등장하는데, 기본적인 뜻이 ‘사랑하다’여서 ‘사랑하는’으로도 많이 번역된다. 그래서 역대하 20장 7절도 개역한글에서는 ‘주의 벗 아브라함’이라고 번역했는데 개역개정에서는 ‘주께서 사랑하시는 아브라함’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신약에 보면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약 2:23)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친구라는 사상이 정통임을 증명한다. 이때의 ‘벗’(필로스)이라는 단어는 확실히 ‘친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고 했다.
그러면서 “요셉이 꿈을 꾸었을 때는 우리가 성경 만화에서 흔히 보는 것처럼 아주 어린 꼬마가 아니었다. 이런 사실은 야곱이 요셉을 시종도 안 붙이고 먼 길을 떠나보낸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야곱은 그를 ‘헤브론 골짜기에서 세겜까지’ 보내는데(창 37:14), 직선거리로 약 90킬로미터다. 이 거리는 하루 만에 다녀올 수 있는 길이 아니다. 하지만 야곱은 그토록 아끼는 요셉을 동행도 없이(동행자가 있었다면 형들의 범행은 불가능하다) 혼자 떠나보낸다. 이 모든 정황은 당시 요셉이 거의 다 자란 상태임을 보여 준다. 왜 이것이 중요할까? 요셉이 이미 자기 나름의 뜻과 생각을 품기에 충분한 나이였다는 말이다. 그의 꿈은 철없을 때의 헛꿈이 아니라 정립된 생각과 목표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면 혹자는 이런 질문을 할지 모른다. ‘아니, 요셉이 꾼 꿈은 하나님이 주신 꿈 아니었어?’ 흥미롭게도 성경에는 그런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끝으로 저자는 “복음의 본질을 모르기에 받은 은혜를 망각하고 예배 때면 빚 받으러 온 사람처럼 젯밥에 더 관심을 가진다. 믿기 전의 처참한 운명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출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뭔가 좀 했다 싶으면 자기 의가 앞선다. 하지만 자신의 죄가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알고 출발한 성도는 그렇지 않다. 진실하게 감사하고 진실하게 섬긴다. 세리와 창기 앞에 선 바리새인이 아니라, 나 역시 세리와 창기의 동류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제는 교회가 진실한 복음을 전해야 한다. 하나님은 잔인하신 분인가? 죄인에게 잔인하신 분이다. 그럼에도 자기 아들을 죽이시기까지 하시어 구원의 길을 여셨다. 양날의 검 같은 그 사랑을 우리는 날마다 각인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