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다”는 말씀을 하시자 속이 뒤집힌 유대인들,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사마리아 사람’, ‘귀신 들렸다’라는 등 온갖 욕설로 예수님을 공격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내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너희는 지금 나를 무시하지만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하나님은 내 아버지”시라며 “나는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있다”고 선언하신다. 이 선언의 의미를 생각하며 은혜를 누려야 한다.
욕하는 유대인들을 향한 선언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사마리아 사람’이라 욕했다. ‘뙈놈, 왜놈’ 같은 류의 욕, “이런 사마리아 사람 같은 작자를 봤나”하는 표현이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모욕하며 시비를 건 것, 예수님이 지키시는 유대 종교는 이단적인 사마리아 사람들이 준수하는 수준이라는 뜻인 것 같다. 이 전에는 없던 표현의 비난이고, 예수님도 이 표현에 대해서는 묵살하신다(49절).
하지만 ‘귀신 들렸다’는 표현에는 반응을 보이셨다.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거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49절), 귀신에 들리지 않았다는 반박이다. ‘귀신 들렸다’, 본문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말, 유대인들은 시비를 걸며 이렇게 표현했고(48, 52절), 예수님은 억울하시다는 뜻처럼 이렇게 표현하셨다(49절).
예수님을 귀신 들렸다고 비난한 것은 성경에 여러 번 나온다.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7:20), “유대인들이 이르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8:52),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그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10:20). 공관복음에도 여러 번 나온다(마12:24-, 막3:22-, 마9:34, 11:18 등). 용서받지 못한 죄와 관련된 증오받을 자라는 뜻으로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예수님은 이 비난을 조용히 부인하신다. 아버지 하나님을 공경한 행위가 어떻게 귀신 들린 사람의 소행이냐는 말씀이다.
‘귀신 들렸다’, ‘완전 마귀네’ 이런 표현은 반대파를 몰아붙이려고 할 때 흔히 쓰는 표현이다. 정신이 이상해서가 아니라 너무 비범한 인물이라 이런 말을 듣는다. 또 이 표현은 이해를 못하는 사람들이나 자신들의 기득권이 위협당한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하는 소리이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요셉이 그런 소리를 들었다. 별명이 꿈꾸는 자(dreamer, 창37:19), 부정적 의미로는 ‘미친놈’이라는 소리였다. 또 이스라엘 심판과 관련된 환상을 보고 정의를 외쳤던 아모스 선지도 그랬다. ‘선견자’(seer)라 불렸지만 ‘미친놈’이란 소리였다. 그뿐인가? 실제로 미친 짓을 한 선지자가 있다. 에스겔이다. 그는 포위된 예루살렘의 기근이 심함을 보여주기 위해 인분 대신 쇠똥을 먹는 퍼포먼스까지 했다. 또 왼쪽으로 390일을, 오른쪽으로 40일을 누워있기도 했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악의 날수에 맞춰서 누웠던 것이다. 에스겔은 아내가 죽었을 때도 전쟁의 참혹함을 보여주기 위해 슬퍼하거나 울지 않았다(겔24:15-17). 미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겠나?
영국과 프랑스 백년전쟁의 영웅이었던 잔 다르크(Jeanne d'Arc)도 마찬가지다. 프랑스를 구하라는 계시를 받은 16세의 처녀가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당시는 똑똑한 여성들이 마녀사냥 당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여성이면서 동시에 인기가 있었기에 잔 다르크는 양쪽 나라의 권력자들에게 다 미움을 받았다. 결국 종교재판 끝에 이단자, 배교자, 우상숭배자란 죄목으로 화형당했다. “이교의 사탄이 스며든 신체 부위와 같아 다른 부위에 독성이 퍼지기 전에 교회라는 몸체로부터 끊어내야 한다”는 판결과 함께 사형을 당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귀신들렸다’거나 ‘미쳤다’는 이 말은 영예로운 말이기도 하다. 일상성이나 평범함을 거부하며 그만큼 열정적으로 살았다는 뜻이다. 열정이라는 단어는 영어로 enthusiastic, 내 안(en)에 신을 모시고 있는(thus) 상태다. 긍정적으로 성령에 취한 상태가 마치 미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성령이 임했을 때 우리에게 무엇이 주어지는가는 사도행전이 설명한다.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행2:17-18) 불광불급(不狂不及), 살면서 한번은 미쳤다는 소리를 들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제대로, 열정적으로 산 것 아닌가?
아브라함보다 큰 자라는 선언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귀신 들린 사마리아 사람’ 취급하며 무시하지만 판단하시는 분이 계시다”며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51절), 갑자기 ‘죽음’이라는 단어에 강조점이 있는 말씀을 하신다. 바로 앞 절에서 ‘판단하시는 이가 계신다’고 한 것과 연결되는 말씀, 예수님을 무시하는 자들의 결말이 죽음이라는 무서운 말씀이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이 너무 당당하시다. 하나님과의 든든한 관계가 아니면, 자기 영광이나 구하는 자세였다면 결코 이런 당당함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반응은 여전하다.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52-53절). 예수님의 당당함에 더 약이 오른 유대인들은 아브라함도 죽었고, 민족의 영웅들인 예언자들도 죽었는데 죽은 조상들이나 선지자보다 더 크냐고 물은 것이다.
예수님은 육적인 죽음이 아니라 영적인 죽음을 체험하지 않게 될 것을 말씀하셨는데 그들은 또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설명하신 뒤 아브라함의 신앙을 칭찬하며 추가 설명하신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56절), 2천 년 전에 살았던 아브라함이 미래의 예수님을 보며 즐거워했다는 말씀, 시간과 공간의 벽을 뛰어넘고 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자기 자손으로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알았다는 뜻인 것 같다. 갈라디아서가 이를 뒷받침한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3:16).
자신이 아브라함보다 크다는 말에 유대인들은 지금 폭발 직전이다. 얼마나 분노했던지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육신만 보고 “50세도 못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또 묻는다. 왜 50세라는 숫자를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다. 레온 모리스(Leon Lamb Morris)의 주석에 보면 누가복음은 예수님은 전도 초기에 나이가 30세쯤이라 했다.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세쯤 되시니라”(눅3:23).
그리고 성경을 볼 때 예수님의 전도 생애는 3년 정도라며 몇 가지 가정을 말했다. 먼저 50이라는 나이는 활발하던 사업이 일단락되는 시기, 요즘은 다르지만 그때부터 늙은이의 세계로 들어가기 때문에 거론되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민수기 8장 24-25절에 보면 레위인은 이 나이에 직무를 마쳤다. 또 다른 가정은 아브라함이 지나간 지 수 세기, 그에 비해 반세기도 안 되는 생애이면서 정신 나간 소리를 한다는 식으로 추측한다. 초대 교부 중 이레니우스(Irenaeus)는 예수님의 선교가 50세에 못 치는 때까지 계속되었을 것이라 추정하기도 했다. 여하튼 예수님이 너무 엄청난 진리를 많이 말씀하셔서 나이 들어 보였을 수도 있고, 고생을 너무 많이 하셔서 겉늙어 보이셨을 수 있다.
예수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씀하신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었느니라”(58절) “아브라함? 걔는 저 밑에 있었지” 그런 말씀이다. 아브라함과는 비교도 안 된다는 것,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누가 봐도 미친 사람처럼 볼만하다.
그렇다. 여기서 뿐만 아니라 성경을 볼 때 예수님은 미친 분, 사기꾼이거나 아니면 하나님이거나 둘 중 하나, 예수님은 당신이 “아브라함보다 크다”고 하셨다.
하나님이시라는 선언
이 선언은 아브라함보다 큰 자 정도가 아니라 당신이 하나님이시라는 선언이다. 54절에 보면 예수님은 너희가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 분이 나의 아버지라고 하셨다. 유대인의 공분을 산 말씀이다. 그들을 공분시킨 말을 추적해 보면 세 가지다. 첫 번째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42절)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 하고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하셨다.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만 그런가? 피차 답답했을 것이다. 그런데 누가 더 답답할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더 답답하시지 않았을까?
두 번째는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51절) 육신의 생명이 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이 말은 미친 말임에 틀림없다. 11장에 가면 예수님은 “나는 곧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죽는다고 표현하지 않고 아버지께로 간다고 말씀하신다. 육신으로 살아 있는 자들을 향하여는 “너희 죽은 자들”(5:25)이라 하셨다. 하나님을 아는 자가 산 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죽은 자라는 것, 유대인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들이 듣기에 예수님은 정말 미친 사람 같았을 것이다.
결정적으로는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58절)라는 말씀, ‘진실로 진실로’는 이 선언이 이때까지 오고 간 시비와 선을 긋는 아주 중요한 선언이라는 강조적 표현이고,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는 과거에 생존했던 위대한 족장보다 앞서 계셨다는, 선재(先在)하신 예수님이시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여호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말씀인 ‘I am’을 사용해 자신의 신성을 표현하셨다. I was가 아니다.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내가 태어났다’고 하시지 않고 늘 계신 분, 영원부터 영원까지 I am, 그래서 현재형이다. 존재론의 영원성을 밝히신 주장, 자기 백성을 구원하려고 자신이 만드신 시간 속으로 잠시 들어오셨지만 본질적으로는 시간을 초월하는 영원한 하나님이심을 밝힌 것이다.
유대인들에게는 참람죄, 신성모독죄에 해당하는 말씀이다. 레위기에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니라”(레20:16)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게 진리이고, 거짓말을 할 수 없기에 하신 말씀이지만 유대인들은 레위기 말씀에 입각해 예수님을 돌로 치려한다.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59절).
분노가 치민 군중들은 즉결 처형을 하려 했다. 법적 절차대로 하기에는 너무 화가 났던 것, 그러나 요한은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셨다’고 했다. 겁에 질려 도망치는 것은 아니다. 레온 모리스는 요한의 암시를 ‘하나님의 보호’라고 해석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지키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저들의 눈을 가려 예수님을 볼 수 없었다고 봐도 된다는 것, 또 어떤 인격자가 예수님과 군중 사이를 차단해서 예수님이 성전밖으로 나가셨다고 해석해도 된다고 했다.
또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지금 누가 신성모독하고 있나?’ 하는 것이다. 오히려 유대인들 아닌가? 그들이 지금 하나님 아들에게 신성모독하고 있다. 문제는 그걸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한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 유대인들과 다르지 않다고 경고하고 있다. 유대인들과 90년대 교인들이 다르지 않다는 것인데 우리는 어떤가? 우리 역시 다르지 않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부를 때 늘 “엘로힘, 엘 샤다이의 하나님” 늘 그렇게 불렀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반면에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신다. 이게 굉장히 중요하다. 묻는다. 하나님을 어떻게 부르나? 혹시 홍길동처럼 부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모르긴 해도 우리 중에도 예수 믿은 지 수년이 지나고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만 부르지 아버지로 부르지 못하는 성도들이 있을 것이다. 또 부르기는 아버지라고 하면서 하나님 아저씨 취급하는 성도도 있을 것이다.
에베소서에 보면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예정하셨다”(엡1:4)고 한다. 또 요한은“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3)고 했다. 우리가 거할 영원한 아버지 집이 있다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끝이 없는 것, 우리는 영원히 주님과 함께할 사람이다. ‘주님과 함께하는 영원’이라는 엄청난 은혜를 받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