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퍼와 이승만(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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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토들
정성구 박사 ©기독일보 DB

사람은 누구에게나 멘토가 있다. 때문에 한 개인에게 있어서 위대한 멘토들을 만난다는 것은 놀라운 축복이다. 인간은 누구나 관계를 통해 발전하고 익어간다. 그러니 젊은 날에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인생의 향방이 달라진다. 필자도 젊은 날에 철저한 칼빈주의 성경신학자인 박윤선 박사를 만나서 오늘의 모습이 갖추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유학 중에 헤르만 도예베르트, 볼렌호번, 요한네스 베르까일, 프란시스 쉐퍼라는 보석 같은 멘토들을 만나면서 칼빈주의 신학과 신앙의 터를 닦을 수 있었다. 그러니 내게는 이런 사건이 크나큰 하나님의 축복이고 은혜였다.

아브라함 카이퍼(A. Kuyper)와 이승만이 살아온 공간과 시간은 반세기 정도의 차이가 난다. 하지만 이 둘은 위대한 ‘정치 지도자’이면서 ‘신앙의 사람’이었음을 앞서 여러 차례 말한 바 있다. 카이퍼의 경우는 25세에 라이덴 대학교 신학부에서 스콜텐(Scholten) 박사의 지도로 신학박사가 되었다. 그러나 당대의 스콜텐은 가장 잘 나가는 자유주의 학자였다. 이에 카이퍼도 그의 학문과 신학을 따르던 자유주의 신앙의 노선을 걷게 된다. 그런 가운데 26세에 카이퍼는 목사 안수를 받고 ‘베이스트’라는 작은 시골교회에 목회자로 사역을 하게 되었다. 비록 시골교회라 하지만 이미 300년의 역사를 가진 철저한 개혁교회로서 16세기 칼빈의 정통신앙을 지키는 교회였다. 그러다보니 카이퍼 목사의 설교가 성도들에게는 겉돌기 시작했고, 그중에 발투스(Baltus)라는 여성도는 카이퍼의 설교에 늘 싸늘했고 비판적이었다.

카이퍼 목사는 학문적으로는 최고의 연구자였다. 박사학위 논문으로 <요한 칼빈과 요한 라스코의 교회론 비교연구>라는 우수한 논문을 썼다. 그러나 당시 카이퍼는 학문적으로 칼빈을 연구했을 뿐, 칼빈주의 사상에 대해 아직은 둔감한 상태였다. 그런데 하루는 여성도 발투스가 카이퍼 목사를 만나 용기 있는 충고의 말을 던졌다.

“지금 목사님의 설교는 종교 개혁자 칼빈의 사상과는 맞지 않습니다. 지금이라도 칼빈주의 사상으로 돌아오십시오!”

충정이 가득한 이 여인의 충고에 카이퍼는 충격을 받고, 지금까지 자신이 걸어왔던 자유주의 사상이 산산이 깨어짐으로써 19세기의 위대한 칼빈주의 운동가로 거듭났다. 이처럼 멘토는 학문과 인격이 높은 사람만 되는 것이 아니고, 철저히 준비된 한 인격이 다른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 평신도의 용기 있는 그녀의 말에 카이퍼는 자유주의 노선을 버리고 철저한 칼빈주의 기수가 되었고, 복음의 나팔수가 되어 교회와 세상을 바꾸어 갔다.

그 후 카이퍼 박사는 30세에 우트레흐트(Utrecht) 교회에서 ‘교육 개혁’ 세미나의 대 연설에서 위대한 칼빈주의 교육 정책을 발표하던 중, 전임 수상인 흐룬 봔 프린스터를 만났고, 그 노정객은 카이퍼를 후계자로 지목하고 카이퍼의 멘토가 된다. 이 사건으로 카이퍼는 “하나님 나라 건설은 ‘신학의 개혁’ ‘교육의 개혁’ ‘정치의 개혁’까지 포함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카이퍼에게는 두 명의 멘토가 있다. 한 분은 요한 칼빈이요, 다른 한 분은 흐룬 봔 프린스터였다. 이 두 분으로 인해 카이퍼는 정통 칼빈주의 사상을 그대로 고수할 수 있었고, 카이퍼는 “하나님의 왕권은 교회뿐 아니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학문 등 삶의 전 영역에 미친다!”는 메시지로 전국을 누비며 교회 개혁, 사회 개혁, 정치 개혁, 문화 개혁의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한편 한국 근대사에 있어서 이승만은 카이퍼와 맞먹는 위치에 있었다. 그는 몰락한 왕족 가문에 태어나 이조 왕국의 끝자락에 가장 혼란한 시대에 태어났다. 그는 유학의 전통과 불교의 전통에서 자랐으나 왕권개혁을 꿈꾸다 사형수 판결을 받고 비참한 종신수로 감옥에 있게 된다. 하지만 배재학당을 다니면 선교사들로부터 서양문화에 눈을 뜨게 되었고, 기독교 신앙을 가진 나라마다 모두가 문화강국이 되었고 경제 강국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가 그 고통스러운 한성감옥에 갇혔을 때, 선교사들이 면회 올 때마다 역사서, 기독교 신앙 서적, 서양 서적들을 가져왔었는데 이승만은 그 모든 책을 정독했다. 이때 이승만을 도와준 선교사들이 한두 사람은 아니었으나, 그중에 제임스 게일(James Gale) 선교사가 이승만의 실질적인 멘토였다. 제임스 게일 박사는 토론토 대학교를 졸업하고 YMCA 파송 선교사로 1888년 12월 15일 한국에 왔었다. 그는 어학에 뛰어난 학자인 데다 한국학의 기초를 놓은 분이다.

또한 게일 박사는 성서번역 회 의원으로 문헌연구에 밝았던 그는 감옥에 있는 이승만에게 기독교 잡지와 신문을 공급해 주었고, 그에게 ‘기독교 세계관’을 심어줌으로써 이승만의 실질적인 멘토가 되었다. 그렇게 이승만은 감옥에서 중생의 체험을 얻었고, 훗날 그가 ‘자유민주주의 사상’ ‘기독교 입국론’을 갖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게일 박사라는 위대한 멘토의 후원과 조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선교사들은 신학교(Seminary) 출신이 대부분이었지만, 게일 박사는 명문 토론토 대학 출신으로 그가 보는 안목은 독특했다. 특히 이승만의 비상한 머리와 꿈을 잘 알고 있던 게일 박사는 장차 이승만이 큰일을 할 인물로 진작 깨달았다. 이승만은 출옥 후 많은 선교사들의 추천서를 받았지만, 헴린(Hemlin) 목사에게 써준 게일 박사의 추천서로 인해 조지 워싱턴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고 워싱턴의 언약도 장로교회에서 세례를 받게 된다.

카이퍼도 이승만도 그들의 뒤에는 ‘위대하고 헌신적인 멘토’가 있었다. 당신에게는 이러한 위대한 멘토가 있는가?

정성구 박사(전 총신대·대신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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