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선교에 있어서 윤리의 바람직한 위치
1. 윤리적 과제에 대한 깊은 고민과 실천 필요성
선교적 책임과 윤리적 책임은 서로 긴밀한 연관성을 지니며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성도들이 윤리적으로 선한 삶, 칭찬받을만한 삶을 살 때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며 이것으로 인해 선교에 도움이 되며, 기독교가 한 사회에서 인정받으며 뿌리를 잘 내리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선교와 윤리가 이처럼 긴밀한 연관성을 지니므로 선교를 수행하는 사람들은 윤리의 문제를 매우 신중하게 생각해야 하며 윤리적으로 온전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선교에 있어서 윤리의 문제를 다음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는 선교하는 증인 자신들의 윤리성 문제이다. 선교하는 증인 자신들의 삶 자체가 윤리적으로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보아도 비윤리적인 삶이라고 생각할 정도의 윤리 수준을 보인다면 증인들이 하는 전도의 효과는 반감될 수밖에 없다. 최근 들어 한국 교계 지도자들의 비윤리적인 행동 등이 언론에까지 보도가 되면서 한국 교회는 전도에 있어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이런 점에서 증인 자신들의 윤리성이 중요함을 한국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주목해야 할 사실은 복음을 전하는 말과 함께 말씀을 전하는 사람, 즉 메신저 자신이 곧 메시지가 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동안 이 사실을 소홀히 한 바 있다. 세상은 우리가 전하는 내용을 들을 뿐 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를 주목하고 보고 있다. 지역사회에 속한 교회의 존재와 매일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가 선교의 내용이 된다. 우리의 삶 자체가 우리가 전하는 내용을 신뢰할 수 있는 증거가 되지 않으면 전하는 내용 또한 신뢰받기 어렵다. 복음전도 그 내용에 따른 삶은 분리된 두 가지가 아니라 동일한 전도의 다른 형태이다.”
이것은 선교지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증인이 되기 전에 먼저 그 자신이 철저한 윤리성을 지녀야 한다. 한국 교회 선교가 많은 선교지에서 칭찬을 듣기도 하지만 또한 많은 경우 현지인들의 지탄을 받기도 한다. 이러한 지탄의 원인들 중 많은 이유가 바로 선교사 자신들의 비윤리적인 행위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안희열은 “선교사가 재정에 투명하고 윤리적으로 바로 서 있어야 올바른 사역을 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선교사는 돈에 깨끗해야 하고, 이성 문제를 일으키지 말아야 하며, 정직한 선교보고를 해야 하고, 자신이 속한 지역 사회에도 덕망 있는 선교사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고 강조한다.
둘째는 증인들이 선교를 수행하면서 비 그리스도인들을 대하는 자세에서 나타나는 윤리의 문제이다. 에큐메니칼 선교가 태동되게 된 주요한 배경 중의 하나는 전통적 선교의 비윤리적인 자세에 대한 반성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전통적인 선교의 제국주의적인 자세, 서구 문화 우월주의적인 자세, 선교사의 일방적인 행태 등으로 비판받아 온 윤리적 행태에 대한 뼈아픈 반성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에큐메니칼 선교가 지적한 전통적인 선교의 윤리적 문제는 오늘날도 여전히 신중하게 반성하고 수정해야 할 과제이다.
선교사는 최상의 윤리성을 가지고 선교를 수행해야 한다. 선교사가 현지에 들어가서 아무리 많은 것을 베풀고 도움을 준다 해도 결코 자만해서는 안 된다. 현지인을 무시하는 언행을 삼가고 철저히 현지인을 존중하고 사랑하며 섬기는 자세로 선교에 임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일방적이며 공격적인 자세를 지양하고, 평화로운 모습으로 다가서도록 해야 할 것이다. 또한 현지인 신자들과 지도자들을 철저하게 신뢰하고 위임하여 그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지역을 복음화 할 수 있는 일군들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아울러 현지의 윤리성이 향상되어 인간다운 삶이 가능해지도록 늘 기여해야 할 것이다.
선교는 언제나 선교하는 자나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의 이익이나 업적 자랑이 아니라 철저히 선교 현지가 필요로 하는 선교를 현지가 필요로 하는 기간만큼 수행해야 한다. 많은 경우 선교는 선교지를 위한 사역이기 보다 선교사와 파송 교회를 위한 활동으로 전락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현지가 필요로 하는 사역보다는 선교사가 하고 싶은 사역을 선택하게 되고, 현지가 필요로 하는 기간만큼 활동하기보다 선교사가 원하는 만큼 머물면서 현지인들은 오히려 의존적이 되어 성장하지 못하도록 하는 선교를 수행하는 경우가 왕왕 나타나게 된다. 모두 다 심각하게 반성해야 할 선교에 있어서의 윤리적 과제라 할 수 있다.
2. 윤리와 선교의 구분 필요성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선교에 있어서 윤리의 문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중요하다. 윤리가 제대로 서지 않으면 선교는 쉽게 무너질 수 있다. 선교와 윤리는 성도와 교회의 마땅한 두 가지 책임이다. 그러나 여전히 윤리가 선교는 아니고 마찬가지로 선교가 윤리는 아니다. 선교는 선교이고 윤리는 윤리다. 윤리를 선교에 포함하여 그것을 선교라고 개념을 정의하면 그것은 많은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문제는 개념의 혼란이라고 할 수 있다. 선교의 개념과 윤리의 개념은 분명히 다르다. 다르니까 처음부터 다른 용어가 쓰인 것 아니겠는가? 선교와 윤리는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에 다 들어있는 기본적인 요소들이다. 일반적으로 쓰이는 이 두 용어의 의미를 살펴보면, 선교는 기본적으로 ‘종교의 확장을 위한 활동’ 이라 할 수 있고, 종교에 있어서 윤리는 ‘종교를 믿는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 할 도덕적 행위’인 것이다. 일반 통념상으로도 선교와 윤리는 구분되어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도 이 두 가지 요소를 구분지어 개념화하는 것이 개념의 혼란을 방지할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전통적인 선교 이해에서는 윤리를 선교를 위한 다리 즉 선교의 방법 차원에서 이해하였다. 그러나 에큐메니칼과 통전적 선교신학에서는 이제 윤리적 과제 수행이 선교의 목표로 인식되고 있다. 그런데 선교와 윤리는 기본적으로 관심 대상과 목표가 판이하게 다르다. 즉 선교는 기본적으로 아직 복음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이들에게 복음을 듣게 하는 일에 관심을 갖는 반면, 윤리는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 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이들의 삶의 문제 개선을 목표로 삼는다.
이처럼 판이하게 다른 두 가지 개념을 하나로 만들어서 선교라고 표현하는 것은 개념상의 혼동을 가져올 수 있다. 성격이 다르고 목표가 다른 두 가지의 개념을 하나로 얼버무려서 그것을 선교라고 말하는 것은 혼란을 가중시킬 수 있다. 특별히 선교의 가장 주된 일꾼들인 평신도들에게 윤리적 목표를 포함시킨 선교 개념을 말하면 성도들은 매우 혼란스러워 할 가능성이 높고, 자연스럽게 이것은 평신도들의 선교 참여 약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물론 통전적 선교신학의 입장에서는 “둘 다 중요한 교회의 사명이 아닌가? 이 중요한 두 가지를 왜 나누려고 하는가?” 라는 이의제기를 할 것이다. 필자 역시 이 두 가지의 교회의 중요한 두 가지 사명이라는 점은 이미 언급하였다. 하지만 두 가지가 중요하다고 해서 그 두 가지 사명을 하나의 사명으로 만들어 ‘선교’라는 용어로 표현하는 것은 효율적이지 못하다. 선교와 윤리를 하나로 섞는 선교 개념은 선교의 개념 자체를 모호하게 만들면서 선교가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 정의 자체를 불투명하게 만들고 자연히 그 선교의 효율성을 감소시킬 가능성이 높아진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개념이 명확할수록 혼란이 줄어들고 일의 추진력이 높아진다. 개념이 불명확하면 서로 같은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서로 다른 생각을 하므로 일에 커다란 혼선이 발생하게 되고, 종국적으로 그 일은 효과적으로 추진되기 어렵다.
오늘날 기독교의 가장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는 이슬람의 경우 그들은 선교에 해당되는 ‘다와’의 개념을 아주 명확하게 가지면서 세계 이슬람화를 강력하게 추진하는 데 비해, 기독교는 선교와 윤리를 섞어서 혼동하면서 소위 말하는 선교지도자들마저도 선교의 개념에 대하여 의견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선교지도자들마저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선교 개념을 가지고 과연 선교를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까?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런 개념을 가지고 평신도들을 이해시키고 훈련시켜 선교에 참여시킬 수 있을까? 윤리의 과제가 중요할수록 선교와 윤리를 명확히 구분하여 이해시키고 선교에 있어서 윤리의 위치를 바로 알려주는 것이 중요할 것으로 보인다.
3. 선교와 윤리에 있어서 우선성 문제
앞에서 우리는 윤리가 참으로 중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리적 과제를 선교적 과제와 혼합하는 것은 개념의 혼란과 목표의 혼선이 발생할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 교회가 행해야 할 선교적 과제와 윤리적 과제는 어느 것의 경중을 따질 수 없이 중요한 과제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중요하다고 해서 모두 다 한꺼번에 할 수는 없다. 중요할수록 순서를 잘 매겨서 순차적으로 일을 처리해야 효과적으로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 오늘날 선교는 복음적 과제와 윤리적 과제 사이에 우선순위를 인정하지 않는 통전적 선교 개념이 대세를 이루고 있지만 오히려 둘 사이에는 우선순위가 있어야 기독교가 21세기에도 여전히 살아남아서 이 세계에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그 이유를 몇 가지로 생각해보자.
첫째, 기본적으로 기독교 윤리는 기독교 선교가 이루어진 이후에 실현될 수 있다. 이것은 결코 윤리를 무시하거나 선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둘 다 중요한 교회의 사명이다. 그러나 이치상 선교가 있을 때 윤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선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윤리적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마치 먼저는 아기가 태어나야 그 아기가 사람다운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아기가 태어나는 것도 중요하고, 사람다운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도 중요하다.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아기가 태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사람다운 사람으로의 성장을 논하는 것은 현실성이 없는 것이다. 영적인 측면에서 볼 때 새로운 생명의 탄생은 선교의 과제이고, 그 탄생된 생명을 바르게 살면서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는 것은 윤리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 윤리는 기본적으로 먼저 하나님의 사람으로 태어나도록 만드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영적인 생명의 탄생이 없이 윤리적인 삶을 말하는 것은 기반이 없는 허공에 집을 세우려는 것과 마찬가지의 오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에 대한 이종성은 “1920년대에 대다수의 미국 교회는 십자가의 복음과 사회복음을 혼돈한 일이 있었다. 십자가의 복음의 없이도 얼마든지 사회를 구원할 수 있다고 라우센부쉬는 부르짖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그것이 낙관적 인본주의로 끝나고 말았다.” 라고 강조한다. 복음이 전제 되지 않으면 윤리는 그냥 하나의 인간적인 노력으로 끝나고 말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이종성은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 사회복음으로써 사회를 성화하려던 시도가 실패한 것을 알고 있는 교회는, 두 번 다시 그러한 신학과 방법으로 사회를 정의의 사회로 만들려는 기도가 여기 저기에서 발견되는 것을 매우 위험하게 생각해야 한다. 교회는 사회복음과 십자가의 복음을 혼돈해서도 안 되며 대치해도 안 된다. 또는 철학적, 문화적 이데올로기로써 사회개혁을 기도해도 안 된다.”
사이더도 말하기를, “분명히 하나님의 통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인정하고, 부활하신 주의 칭의하시고 중생시키시며 성화시키시는 임재를 체험하는 곳에서 가장 명백히, 그리고 가시적으로 표현된다.”고 언급하였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개인들의 회심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이것이 없이 추구되는 하나님의 나라는 사실은 인간들의 나라를 그럴듯하게 포장한 것일 수 있다.
둘째, 선교적 과제는 교회만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과제인 반면 포괄적 의미의 윤리적 과제는 교회도 할 수 있는 과제라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복음을 전하는 선교적 과제는 교회만이 할 수 있는 과제이다. 세상의 어떤 다른 기관들이 대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즉 교회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세상은 복음을 들을 길이 없게 되고, 복음을 듣고 응답하는 자들이 없으니 자연히 교회는 약화되고 이것은 곧 이 세계의 윤리성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유럽에서 이러한 현상들을 보면서 우려를 금치 못하고 있다. 교회가 세상의 다양한 기구도 할 수 있는 정의, 평화, 생명살림 같은 윤리적 과제를 교회만이 할 수 있는 선교적 과제와 동일선상의 중요도로 놓고 복음을 전하는 선교 과제에 쏟는 힘이 약화될 때 교회는 머지않아 처참하게 약화되는 결과를 맞을 수 있다는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전통적인 선교에서 윤리적 과제는 주로 증인들이 빛과 소금이 되는 삶 또는 구호사업(Relief) 등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통전적 선교에서 요구되는 윤리적 과제는 이런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것들이다. 해방의 문제, 정의 문제, 평화 문제, 환경 문제 등 매우 광범위하게 퍼져나가며 거대담론의 성격을 지닌다. 교회가 이런 일들을 해결하면서 윤리적 과제를 실현할 수 있는 역량이 있다면 좋겠지만 이런 문제는 사실 국가나 국가들의 연합단체인 UN과 같은 거대 기구도 잘 해결하지 못하는 과제들이다.
교회가 교회에만 주어진 중대한 사명인 복음 전도를 뒤로 하고, 이러한 거대담론에 매어 달려 많은 에너지를 쓸 경우 교회는 복음전도도 제대로 못하고 세상의 문제 해결도 제대로 못하는 문제에 직면할 수 있다. 교회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신앙적 차원에서 원칙적인 경고를 하거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것은 필요하다. 또 이런 일을 전문기관들이 잘 할 수 있도록 측면에서 필요한 지원을 하는 것도 하나의 방안이 될 것이다. 하지만 교회가 직접 이러한 일들에 뛰어드는 것은 전문성의 부족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해보아도 비효율적이다.
또한 혹시 통전적 선교가 말하는 대로 윤리적 과제가 다 이루어진다 해도 복음적 과제가 제대로 되지 않아 하나님께 관심이 없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는다면 그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교회는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이루도록 돕고 복음을 들은 자들이 합당한 윤리적 삶을 살도록 돕는 것이 이 세상을 바꾸는 가장 근본적이고 효율적인 길임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요약과 전망
본 장은 선교에 있어서 윤리의 위치를 세 가지 입장으로 정리하였다. 첫째는 윤리적 과제를 선교를 위한 다리 또는 선교의 열매로 생각한 전통적 입장, 둘째, 윤리적 과제를 선교의 목표로 생각한 에큐메니칼 입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교적 과제와 윤리적 과제를 하나로 보면서 동등한 위치로 놓는 통전적 입장 등이 그것이었다. 에큐메니칼 진영은 대략 1975년 나이로비 대회를 기점으로 통전적 입장을 추구하기 시작했고, 복음주의 진영은 2010년 남아공 케이프타운 로잔 3차 대회를 기점으로 통전적 입장을 공식화했다고 할 수 있다. 이제는 양 진영 모두 공히 윤리적 과제를 선교의 개념에 포함하면서 윤리적 과제 수행이 선교적 과제와 나뉘어져 생각될 수 없고 동등하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을 보인다. 물론 로잔 진영 안에는 여전히 이러한 통전적 입장 그리고 그러한 입장과 연관된 포괄적이고 확대된 선교 개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고, 이런 이유로 로잔 안에 일정 부분 혼동이 존재한다.
이런 상황에서 이 장은 선교 수행에 있어서 윤리적 과제의 바람직한 위치가 어디일까를 고민하여보았다. 가장 먼저 윤리적 과제는 선교에서 매우 중요한 과제이며 신중하게 고려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선교 자체가 무너질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윤리의 과제가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선교와 윤리는 처음부터 다른 개념이고 다른 목표를 지니고 있으므로 윤리적 과제는 선교의 개념에서 분리되어 고려되어야 하며, 우선순위의 상실로 인한 효율성 저하를 막기 위해서라도 두 과제 사이에는 우선순위가 고려되어야 함을 살펴보았다.
물론 이러한 관점은 오늘날 이미 두 과제가 동일하게 중요하고 분리될 수 없다는 통전적 관점이 자리를 잡은 상황에서 쉽게 이분법적인 접근 또는 과거 회귀적인 접근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논리적으로만 보면 두 가지의 과제를 통합적으로 동등한 위치에서 보는 통전적 입장이 가장 설득력이 있는 입장으로 보인다.
하지만 통전적 입장은 서로 다른 요소들을 하나로 만들면서 개념의 혼동을 줄 수 있고, 우선순위를 놓치면서 효율성의 약화를 가져오고 있다는 점에서 약점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특별히 오늘날 기독교가 심각하게 약화되고 있는 반면 이슬람과 같은 타종교들은 왕성하게 성장하는 상황에서, 세상의 다양한 기구들도 할 수 있는 윤리적 과제에 많은 힘을 쏟으면서 전도의 과제를 약화시킬 수 있는 선교관을 가진다면 기독교가 과연 21세기 말에도 여전히 지금과 같은 영향력을 가질 수 있을지 우려된다. 물론 여전히 이 세상이 하나님의 우선적인 관심이며 이런 점에서 세상을 섬기는 것이 교회의 우선적인 과제라고 생각하는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주장은 여전히 교회 중심적 시각에 불과한 것으로 비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교회가 있을 때에 세상을 섬기는 신학적 논의와 실천 등도 가능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여전히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고 그것이 세상 섬김으로 이어지는 선교에 대한 고민이 필요할 것으로 사료된다. (끝)
안승오 교수(영남신대)
성결대학교를 졸업하고 장로회신학대학원(M.Div)에서 수학한 후, 미국 풀러신학대학원에서 선교학으로 신학석사(Th.M) 학위와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다. 총회 파송으로 필리핀에서 선교 사역을 했으며, 풀러신학대학원 객원교수, Journal of Asian Mission 편집위원, 한국로잔 연구교수회장, 영남신학대학교 대학원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Rethinking the Theology of WCC』, 『사도행전에서 배우는 선교 주제 28가지』, 『현대 선교학 개론』(공저), 『한 권으로 읽는 세계 선교 역사 100장면』, 『성장하는 이슬람 약화되는 기독교』, 『현대 선교신학』, 『현대 선교의 핵심 주제 8가지』, 『현대 선교의 프레임』, 『제4 선교신학』, 『성경이 말씀하는 선교』, 『현대 선교신학(개정판)』, 『현대 선교의 목표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