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 신학에서도 아우구스티누스의 위치는 역시 대단하여, 개신교의 창시자들인 루터와 칼빈의 신학의 기원을 아우구스티누스로 보는 데 이견이 없습니다. 특히 이 두 신학자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영과 문자』와 같은 책들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자신의 노년에 펠라기안 이단과의 논쟁을 하며 썼던 글들이었습니다. 개신교의 토대를 이루는 원칙들인 오대 솔라는 그의 사상으로부터 유래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교육을 받은 과정을 살펴보면, 그는 전형적인 로마식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는 국민 서사시 『아이네이스』를 써서 로마인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던 베르길리우스의 책을 거의 외우다시피 했고 라틴 고전들을 충실히 공부해서 그의 나이에 배워야 할 내용들을 충분히 습득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에 특히 웅변에 뛰어나서 학교에서 상을 받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습니다. 나중에 그의 직업이 될 수사학 교수의 자질이 이 시기에 벌써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는 15세에 타가스테에서의 교육을 모두 마쳤으나 졸업 후에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1년 동안 머무르게 되었는데, 이는 아버지가 그를 카르타고로 보내기 위해 돈을 모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김용주 – 들어서 읽어라
우리에게는 남에게 말 못 할 시간과 장소가 있다. 폭로되면 무너질 것 같은 부끄러운 곳이 있다. 예수는 그곳에서 나를 보았다고 말한다. 그 장소는 내게 그렇듯이 예수에게도 의미가 있다. 그래서 예수는 일부러 그곳을 바라본다. 하지만 그 눈길은 심판과 정죄의 눈길이 아니다.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감춰진 두려움을 읽어내고, 나를 지지해주고 믿어주는 따스한 눈길이다. 예수의 눈길은 통찰력으로 번득인다. 나다나엘에게서 진실과 정직이라는 자질을 읽어냈듯이. 니고데모는 당대 최고 랍비들의 가르침을 받았다. 엄격하고, 전통적인 유 대교는 그의 삶이었고, 문화였다. 거기서 그는 아버지처럼 엄격하고 권위적인 하나님을 만났다. 하나님은 무한한 힘을 가졌고, 모든 것을 알고 계신 분이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그를 판단하고 심판했다. 하지만 초월적이고, 가부장적인 하나님에게서 니고데모의 마음은 서서히 멀어지고 있었다. 나사렛 예수가 말하는 하나님은 너무도 신선했다. 그가 말하는 하나님에게는 리듬과 생동감이 있었다. 지금까지 그에게 익숙했던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하나님과 달랐다. 이 하나님은 그를 자유롭게 해주고, 숨 쉴 공간을 열어주는 것 같았다. 예수의 말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그의 몸이 가벼워지고, 마음은 시원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깊숙한 곳에 따스함이 느껴졌다. 그의 마음에 새로운 역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박현욱 - 예수, 내게로 오다
요셉은 온갖 어려움과 쓰디쓴 삶의 역정 속에서도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을 그 인생의 기둥으로 삼았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과 한 시대를 진실로 구하는 길이라는 것을 그는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 믿음을 지닌 이가 겪는 고초는 고초가 아니라 종국에는 은혜의 재료가 된다는 것을 그는 흔들림 없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낡은 인생을 되풀이하며 살다가 하나님께서 그 삶에 다가오셔서 결정적으로 개입하고 움직이시면 바로 그 순간이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그 인생의 태초’입니다. 카이로스의 순간입니다. 사랑은 진정, 바람을 가르며 함께 가는 길을 열어갑니다. 서로 아픈 다리 기대어 가며 험한 길 가리지 않고 함께 가는 겁니다. 이것이 사랑의 위력이 가진 비밀이자 축복입니다. 영혼이 궁핍한 이 시대, 사랑의 띠로 이어져 모두가 정겨운 하나가 되는 그런 기쁨을 나눌 수 있다면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김민웅 – 하늘은 나를 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