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에서 다룬 내용은 다음과 같다.
Ⅰ. 들어가는 말 1. 주제해설
Ⅱ. 무엇이 문제인가. 1. 주제해설에 나타난 범신론 2. 설교문에 나타난 문제들,
범신론 및 하나님을 피조물과 동등으로 여김.
금번 호에서는 위 2. 설교문에 나타난 문제들, 범신론 및 하나님을 피조물과 동등으로 여기는 것은 생태신학의 정의와 관점으로 해석을 하는 것으로 이는 심각한 문제가 있음으로 이 문제에 대해 성경을 통해 반론하고자 한다.
1) 하나님이 살기 좋은 세상을 왜 심판 하셨을까?
하나님이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7)하셨으나 아담은 먹었으며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창5:5).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에덴에서 추방을 당함으로 하나님과 관계가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절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사람들의 평균 나이가 팔백구십 세를 넘어 살았으며(창5장) 환경이 오염이 되지 않고 무병장수하던 시대에 하나님이 왜 세상을 물로서 심판을 하셨을까?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6:5-8)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심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성 때문이다. 하나님을 온전히 섬겨야 할 인생들이 자신이 신이 되고 우상이 되거나, 물질이나 자연이나 짐승을 우상으로 섬기며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까닭에 하나님은 전혀 오염이 되지 않고 그 아름답던 세상을 물로서 심판하신 것이다. 그러한 중에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구원하셨다. 천지라는 대가를 지불하시고서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족은 구별하여 구원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공의다.
환경운동을 하고 금번 ‘녹색연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어떤 목사는 말하기를 “자연을 잘 지키고 보존하는 사람들,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유기농 농사를 짓는 사람들을 보면 거룩해 보이지 않느냐?”고 필자에게 물었는데 아연실색할 지경이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살전5:3;딤전4:5)
2)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은 어쩌랴?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마21:19)
예수님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적들을 행하셨다. 그 이적을 행하신 목적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과 본체이심을 드러내심으로 믿는 자들에게 영생과 부활을 주려 하심이었다. 자연을 잘 가꾸고 보존하여 이 세상에서 천년 만 년 살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다.
생태신학을 말하고 환경을 말하는 자들과 달리 오히려 예수님은 귀신들려 고통 받는 한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천 마리나 되는 돼지 떼를 바다에 몰살시키셨다. 요한 계시록의 말씀은 어떠한가? 보존하고 가꾸려고 하는 이 세상을 오히려 하나님은 처음 것들을 폐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준비하셨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21:1)
하나님은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음 받은 아담이 비록 타락하였으나 변함없는 사랑으로 영원히 쇠하지 않고 소멸하지 않는 그 나라를 주시려고 성자 예수님까지 아낌없이 이 땅에 보내 주신 것이다. 이는 창세전부터 계획하셨던 것이다(엡1:3-14). 그러므로 하나님이 목적하신 나라는 이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과 공의로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나라다. 물론 그 나라를 향해 준비하고 있는 이 땅에서의 모든 삶은 매우 소중하다.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아니던가? 그 사랑은 자연도 동물도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하게 된다. 하나님 보다 더 섬기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들이기에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이 또한 사랑이신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당연히 순종하게 된다.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3)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이기에 청지기적인 소명감으로 모든 피조세계를 사랑으로 돌본다. 환경운동가든가, 생태신학자라든가, 인권운동가라 칭하지 않아도 모든 존재를 소중하게 여기게 된다. 존재의 근원이신 분의 사랑을 입은 자로서 어찌 사랑하는 분의 걸 작품이요,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주신 선물을 어찌 경홀히 여길 수 있겠는가?
3. 주제 성구 말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의 성경적 의미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1:31)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은 창세기 1장 1절에서 31절까지 7회 반복하여 말씀하셨다. 단 둘째 날 하늘을 창조하시고는 보시기에 좋았다는 말씀이 없다. 이에 대해서 학자들 간에 여러 해석들이 있으나 필자는 노아 홍수 때에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창7:11b-12)는 말씀을 볼 때 하나님의 성품에 의해 공의도 사랑에 기초하고 있기에 좋아하셨다는 표현이 없는 것으로 해석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창1:6-8)
하나님이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누셨으며 궁창을 하늘이라 이름 하셨다. 그 하늘은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셔야 하겠기에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을 않은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어찌 되었건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3-4a) 지으신 것을 보시고 감격하시고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신 것은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보시기에 좋았더라’의 의미는 창조주 이신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되는 것이 보시기에 좋은 것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1:31)에서 ‘좋았더라(히, 토브)’는 자연은 물론 인간이 하나님이 명하신 자리에 있을 때 선한 것이다. 반면 아무리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닮은 영광스러운 존재로 창조되었다 하더라도 피조물로서 있어야 할 자리를 이탈 한 것은 좋은 것이 아니다. 인간의 능력이 아무리 출중하다 해도 피조물의 자리를 이탈하여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 행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이 아니며 하나님과 상관없는 일이다. 첫 사람 아담의 선악과 사건을 기억해보자. 하나님이 금하신 말씀을 어긴 결과 어떻게 되었는가?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3:22-24)
앞서 김민석 목사의 설교문을 통해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는 단지 인류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땅의 모든 피조물들을 위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 살기 좋은 에덴동산에서 아담을 추방시키신 사건이나, 하나님이 보시고 심히 기뻐하셨던 그 살기 좋은 세상을 물로서 심판하신 하나님은 대체 어떤 하나님이신가?
이러한 사상을 중심하여 일 년에 한 번 모이는 감리교회의 대 축제일인 연회 때 “녹색연회‘라는 이름을 붙여 헌금도 하고 그러한 관점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함께하는 교회의 목회자들에게 그 헌금을 나누어 주자고 하니, 이 대체 어떤 감리교회인가? 한 책(성경)의 사람이길 그토록 열망하며 세운 기독교대한감리회가 맞는가?
#박온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