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5일 열린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 전원위원회에서 여성 차별철폐와 관련해 유엔에 보낼 보고서가 최종 채택됐다. 중요한 건 그동안 쟁점이 됐던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촉구’ 관련 내용이 빠졌다는 점이다.
이날 인권위 전원위는 ‘여성에 대한 모든 형태의 차별철폐에 관한 협약 대한민국 제9차 정부보고서 심의 관련 국가인권위원회 독립보고서(안) 의결의 건’을 다뤘다. 유엔 여성차별철폐협약에 따른 한국의 이행상황을 유엔에 보고하기 위한 마지막 회의였다는 점에서 결과에 관심이 집중됐다. 그런데 당초 보고서 원안에 담겼던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촉구’ 내용에 일부 위원들이 반대하면서 표결 끝에 해당 내용을 삭제하게 된 것이다.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지난 2018년 한국 정부에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권고한 바 있다. 유엔이 제시한 성차별에 대한 정의와 ‘여성’의 다양한 사회적 위치와 조건을 고려해 내린 권고 사항이다. 내용을 보면 “여성에 대한 직접․간접 차별, 그리고 빈곤 여성, 소수 민족․인종․종교 집단 여성, 성소수자 여성, 장애 여성, 장애 여성, 난민 및 난민 신청 여성, 무국적 및 이주 여성, 농촌 여성, 비혼 여성, 청소녀 및 여성 노인과 같은 취약집단에 영향을 미치는 교차적인 차별을 모두 금지하는 포괄적인 차별금지법을 채택할 것을 권고한다”라고 돼 있다.
여기서 논란이 된 게 ‘성 소수자’ 문제다. 여성에 대한 모든 차별적 제한을 해소하는 것을 대전제로 내세우면서 여성 성 소수자 문제를 끼워 넣고 이를 차별금지법 제정의 근거로 삼으려 한 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이걸 계기로 21대 국회에서 정의당과 민주당 일부 의원들이 ‘포괄적 차별금지법’, ‘평등법’ 등을 잇따라 발의, 사회와 특히 교계에 커다란 논란과 갈등을 촉발했다.
2015년 개정된 ‘양성평등기본법’은 정치, 경제, 사회를 포함한 전 영역에서 남녀의 동등한 권리와 책임, 참여기회를 보장하고 있다. 남녀 모두 성별 분리나 성별 고정관념으로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인식에 바탕을 두고 양성평등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책무 등에 관한 기본적인 사항을 규정하고 있다.
양성평등 원칙에 기초해 이미 차별금지를 법으로 규정하고 있는 마당에 유엔이 여성 인권만을 목적으로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권고한 건 사리에 맞지 않는다. 오히려 성차별 갈등을 조장하는 요소로 작용할 수도 있다. 유엔이 성 소수자 문제를 여성 인권의 여러 사안 중 하나로 거론했음에도 이것을 구실로 동성애 확산의 기회로 삼으려는 좌파 진영의 준동이야말로 국가적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배경을 감안하더라도 인권위 독립보고서 채택 안건은 전원위에 세 번째 상정될 정도로 진통이 컸다. 25일 전원위에서도 3시간가량 위원들 사이에 격론이 벌어진 것으로 전해졌다. 김용원 상임위원은 포괄적 차 금지법 제정에 대해 “성 정체성 문제를 차별금지 사유로 포함하는 규정들은 온당하지 않다. 이걸 주장하는 것은 인권위가 인권단체를 자처하는 꼴”이라며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결국 표결에 붙인 끝에 김용원·이충상·한석훈 위원이 반대하고 다른 3명의 위원이 기권해 최종 보고서에서 빠지게 됐다.
그동안 인권위 독립보고서에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촉구 내용을 뺄 것을 촉구해 온 시민단체들은 한껏 고무된 표정이다. 반동성애기독시민연대 등 교계 단체들은 인권위 전원위의 이번 결정을 “역사적 사건”이라고 평가하면서 이를 계기로 “다수의 보편적 인권에 눈감고 편향된 인권만을 대변해 온 인권위가 개혁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에 차별금지법제정연대 등 친 동성애 단체들은 국제인권 규범의 국내 실행을 담당하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설립 취지와 독립적 위상을 스스로 무력화시킨 초유의 사건이라며 윤석열 정부의 인권정책 퇴행을 걸고넘어지는 등 상반된 분위기다.
인권위 전원위가 의결한 독립보고서는 한국의 유엔 여성차별철폐협약 이행상황을 점검하고 그에 관한 인권위 의견을 정리한 문서로, 오는 4월 유엔에 제출될 예정이다.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이 보고서를 토대로 오는 5월13∼31일 한국 정부를 상대로 제9차 심의에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인권위는 지난 정부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평등법) 제정’을 핵심 과제로 설정해 논란의 중심에 섰다. 2020년에는 평등법 시안까지 발표하며 국회에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고 나서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국민 대다수가 차별금지법 제정을 원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그런데 이런 논리는 국민을 기만하는 것이다. 다수의 인권을 억압하는 방법으로 성 소수자의 인권을 보장하려는 편향적 법안에 동의할 국민이 과연 얼마나 되겠나.
그랬던 인권위가 유엔 여성차별철폐협약에 따른 이행 보고서에 차별금지법 관련 내용을 뺀 건 분명 작아 보이나 큰 변화다. ‘격세지감’이란 말로도 다 담을 수 없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제 시작일 뿐이다. 인권위가 천부 인권, 즉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존엄성을 수호하는 진정한 인권기구로 환골탈태하게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