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종 시인의 ‘섬’이라는 시가 있다. 딱 두 줄이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짧지만 단맛이 나는 시다. 의사소통의 통로가 있어야 한다는 것, 단절된 인간관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근래 우리 사회는 서로 간의 대화가 너무 없다. 삭막하다. 대화는커녕 상대방의 말을 무시하고 자기 할 말만 무한 반복하며 남 탓한다. 그래서 서로 간의 따뜻한 체온을 느낄 수 있는 이성적 공간에 대한 동경으로 이 시(詩)가 사랑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박덕규라는 시인이 정현종의 이 시를 비틀어 ‘사이’라는 시를 썼다. “사람들 사이에/ 사이가 있다 그/ 사이에 있고 싶었다. 양편에서 돌이 날아왔다” ‘섬’이라는 시를 패러디한 것인데 어느 편이든 입장을 확실히 하라는 뜻 같다.
심각한 세대 갈등에 성별 갈라치기까지, 우리 사회는 한 마디로 위험 수준이다. 자기 합리화 능력의 발달로 나름 논리는 있을지 몰라도 대화가 안 되는 사회, 서로 돌질만 한다. 과거 지도자들은 그래도 ‘국민통합’을 앞세웠는데 지금은 갈라치기에만 골몰한다. 그래서 정현종 시인의 ‘섬’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벗어난 공간으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2행의 가고 싶은 섬을 무인도 같은 곳, 도피하고 싶은 섬으로 여기는 것 같다.
가정에서도 대화가 잘 되지 않는다. 자녀들은 부모 세대를 ‘꼰대’라고 비하하고, 부모 세대는 자녀들을 ‘철없는 아이’ 취급한다. 피차 들으려는 자세를 가져야만 대화가 가능할 것이다.
본문의 예수님과 유대인들도 대화가 잘 안 된다. 동문서답(東問西答), 소귀에 경 읽기식이랄까? 많이 본 모습이다. 예수께서 당신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인데 그들은 그곳에 오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유대인들은 듣기 싫었던 모양이다. “그가 자결하려는가”(22절), 말이 심하다. 먼저는 같은 말씀에 “헬라인들에게 가려는가?”, 나름 논리적인 반응이었는데 지금은 마치 “지옥 갈 거냐”라고 비난하는 태도다. 예수님의 죄 때문에 죽을 것이라는 말씀에 화가 났던 모양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계속 “너는 누구냐”(25) 정체를 묻고, 예수님은 지금껏 계속 자신이 누구인지 말해 왔는데 들으려 하지 않는 유대인들의 모습에 답답해하신다.
왜 이런 일이 방복될까? 그 이유는 소속이 다르기 때문이다.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23절),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우리는 피차 “소속이 다르다”고 하셨다.
“I am from above”
태어난 곳부터 소속이 다르다. 마치 당시 헬라 사람들의 보편적 세계관인 존재론적으로 보는 이원론의 이데아(Idea)의 세계, 즉 본질의 세계와 모조품, 그림자 같은 현상 세계를 구분하듯 예수님은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You are from below) 나는 위에서 났다(I am from above)”고 하신다. 하늘과 세상이 대립하는 구조, 먹는 양식도, 추구하는 것도 다르다는 말씀이다.
위에서 실상을 본 사람과 우물에 갇힌 개구리가 본 세상이 같을 수 있을까? 우긴다고 같아지나? 아니다. 플라톤의 동굴 비유를 기억하나? 아래 세계가 그림자 세계라면 위의 세계는 진짜 세계, 아래 세계가 환상의 세계라면 위의 세계는 실재의 세계, 아래 세계가 시간의 시계라면 위의 세계는 영원의 세계, 아래 세계가 변화의 세계라면 위의 세계는 불변의 세계, 아래 세계가 암흑의 세계라면 위의 세계는 빛의 세계, 아래 세계가 물질의 세계라면 위의 세계는 영의 세계다.
위의 세계에서 빛을 본 사람이 아래 세계인 암흑의 세계로 내려오면 처음에는 모든 게 어둡고 서툴 수밖에 없다. 적응 기간이 필요하다. 빛의 세계에서 온 사람이 자기가 본 것을 말하며 대화를 시도하지만 아래 세계, 어두운 세계에 묶여 사는 사람들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지도 못하면서 빛의 세계에 대해 말하는 사람을 이상한 사람 취급한다. 그리고 위험한 존재로 몰아붙여 죽이기까지 한다. 소크라테스가 그렇게 죽었다. 예수님도 십자가 상에서 그렇게 돌아가셨다. 실재를 보지 못한 사람들이 우긴 것이다.
본문에 위에서 보았던 자의 답답함이 묻어나온다. 예수님처럼 예수 믿는 우리도 위에서 난 자들이다. ‘거듭나다’는 단어가 ‘아노센’(ἅνωθεν), ‘다시’(again)라는 뜻과 ‘위로부터’(from above)라는 뜻이 있는데 니고데모는 ‘다시’(again)로만 알아들었지만 예수님은 ‘다시’를 포함한 ‘위로부터’(from above)라는 의미로 말씀하셨다. 23절의 ‘위에서’라는 말이 ‘아노’(ἅνω), 니고데모나 사마리아 여인이나 38년된 병자나 오병이어를 경험한 벳세다 광야의 무리 같은 영치(靈癡)들은 못 알아듣는데 예수 믿는 사람들은 ‘위에서’ 난 자들, 사도 바울은 이를 “새로운 피조물(New Creation)이라고 더 포괄적, 적극적으로 표현했다(고후5:17). 요한과 바울이 다른 말을 하는 게 아니다. 바울은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빌3:20)고 했다. 역시 소속이 다르다는 말이다.
그래서 먹는 양식도, 추구하는 것도, 살아가는 방식도 다른 거다. 어떤 의사들의 친목회가 있었다. 다 의사인데 수의사 한 사람이 거기에 회원으로 있었다. 그러자 이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권위적이고 교만한 한 의사가 모임에서 이 수의사를 내쫓기 위해 기발한 생각을 했다. 망신을 주면 저절로 나갈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어느 모임 때 수의사에게 물었다. “당신은 개나 돼지, 소와 같은 것들만 고친다면서요?” 그러자 수의사가 빙그레 웃으면서 “네, 그렇습니다. 어디가 아프신가요? 제가 고쳐드리지요” 세상은 빵을 먹고 돈과 높은 자리를 선호하지만 위에서 난 자들은 진리를 먹고 높은 자리보다 사랑을 나누고 선행을 베푸는 것, 섬기고 하나님 뜻을 따르는 것을 자기 양식으로 삼는다. 이 땅에서보다 하늘에 이름 남기기를 더 좋아하고, 썩어질 이 땅의 보화보다 하늘나라에 쌓는 보화를 즐긴다. 언어가 다르다. 불만의 언어보다 감사와 찬양의 언어, 긍정의 언어를 즐긴다. 기억하라. 우리는 위로부터 난 자다.
“No more chance!”
21절부터 24절까지의 말씀은 예수님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유대인들에게 “너희에게는 기회가 없다”(No more chance!)를 단언하시는 무서운 심판 장면이다.
이게 바로 우리가 전도해야 할 이유다. 이 세상에서 마음대로 살다가 죽기 직전에 믿으면 될 것 같지만 아니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고 기회가 없을 수 있기 때문이다(No more chance!). 출애굽 때 애굽의 바로 왕이 그랬다. 바로는 작정하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했던 인물, 재앙이 너무 견디기 힘드니까 몇 번 회개하는 척하기는 했지만 진정한 회개가 아닌 것이 드러나자 하나님은 그에게 더 이상 기회를 주지 않으셨다(No more chance!).
예수님의 말씀에 또 다시 오해한 사람들, 이번에는 완전히 틀어졌다. 그래서 “그가 자결하려는가”(22절), 유대인들에게 자살은 엄청난 죄인데 예수님이 자살하려는 줄 알았다고 한다. 그때 하신 말씀이 “우리는 소속이 다르구나”(23절), 정죄하려는 자들 앞에서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우리는 소속이 다르다”고 하셨다.
한국 교회는 코로나 펜데믹 때 우리 사회로부터 코로나의 온상이라도 된 것처럼 오해당하고 무시당했지만 당당했다. 현장 예배 인원수 제한이라는 해괴한 방침까지 세우고 타겟으로 삼아 교회마다 담당 공무원들을 보내 매주 현장을 확인하는 기가 막힌 방해까지 당하였지만 우리는 그저 소속이 달라서 세상으로부터 공격받는 것으로 여겼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기에 타향살이의 서러움은 감내했던 것이다.
단언컨대 우리는 이 세상 시스템에 의해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래서 고난이 있다. 하지만 고난은 오히려 좋은 것, 세상과 타협하지 말고 진짜 하늘나라 소속임을 드러낼 기회로 삼으면 된다. 기회가 없는 것은 저들이지 우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God is with me”
예수님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24절)고 하신다. ‘내가 그’라고 자기 정체를 밝히셨는데 28절에서도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그’라고 하셨다. 헬라어 원문은 ‘에고 에이미’(εγω ειμι), 영어의 ‘I am who I am’, 이건 구약에서 하나님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이사야서에 보면 이런 표현이 나온다. “너희가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사43:10), “나 여호와라 처음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사41:4)
많은 증거와 증언을 통해 자신의 정체를 밝히셨던 예수님, 여기서는 직접 ‘내가 그’라고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하신다. 당황한 그들은 “네가 누구냐” 물었다. 예수님은 즉각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라” 구차하게 설명하지 않으셨다. “I am God”이라는 말씀, 그리고 바로 십자가와 부활, 승천에 대해 말씀하신다. 28절의 ‘인자를 든 후에야’, 이 표현이 바로 ‘십자가에 예수님을 매단 후에’라는 뜻과 ‘승천 후에’라는 뜻이 담긴 말이다.
당신이 하나님이라고 정체를 밝히신 예수님의 ‘에고 에이미’ 선언의 특이점은 술어가 없다는 점이다. 나는 있는데 나를 설명하는 술어는 없다. 결국 ‘나’는 비었다. 28절에 보면 예수님은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자주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은 자기 말을 하신 분이 아니다. 마치 당신 생각은 없는 분처럼 당신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이라 하시고, 당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신다.
다음절도 마찬가지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29절). 예수님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분, 당신은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고 하셨다. 그 연합이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주는 해독제였을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이신다. 이렇게 예수님이 하나님을 생각하니 하나님도 예수님을 생각하신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만드신다. “I am with You” 하나님은 예수님과 온전한 하나됨을 이루신다.
우리도 이런 자세, 자신은 비우고 순종하는 자세가 되면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실 것이다. 이게 바로 기도 응답의 비결이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어느 도시에 소문난 효자가 있었다. 시골에 살다가 도시에 올라와 자수성가하여 부자가 되었다. 그래서 시골에 홀로 계신 어머님을 모시고 와서 큰 집에 좋은 차에 날마다 좋은 음식으로 모셨다, 그런데 자신은 정성을 다하는데 어머님의 표정은 행복하시지 않다. 시골에서 농사 짓고 고생하며 사는 것보다 좋아하실 만 한데 얼굴에 기쁨이 없으시다. 하루는 어느 시골에 소문난 효자가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수소문하여 그 집을 찾아갔다. 허름한 초가집에 재래식 부엌, 재래식 화장실, 그야말로 평범한 시골집이었다. 어머님은 부엌에서 식사 준비를 하고 계셨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소문난 효자가 나뭇짐을 지고 사립문으로 들어오는데 그 아들을 본 어머님이 버선발로 달려나가 아들의 손을 잡고 마루턱에 앉히더니 부엌에서 따뜻한 물을 세숫대야에 담아 아들의 발을 씻기신다. 그러시는 어머님의 얼굴이 환하다. 너무 행복해 하신다.
그때 도시 효자가 시골효자에게 “소문난 효자라 한 수 배우려고 왔는데 잘못 온 것 같군요. 어떻게 연로하신 어머님께 당신의 발을 씻기도록 하시나요?” 그러고 돌아가려 하는데 시골 효자 왈, “나는 효도가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나는 어머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시게 하려고 합니다. 어머님이 자식을 위해 밥을 짓고 내 발을 씻기시는 것을 기뻐하고 행복해 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겁니다”
자신의 뜻대로 어머님을 모시는 것보다 어머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해드리는 것, 그게 진정한 효도다. 하나님의 일도 마찬가지다. 가인은 자기식으로 제사하다가 실패자가 되었다. 하나님이 언제 대리석으로 집을 지어달라고 하셨나? 땅을 사달라고 하셨나?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영혼구원 아닌가? 다른 일 열심히 한다고 하나님의 기쁨이 될까? 자기들이 좋자고 일하면 안 된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 무엇인지부터 생각해야 한다. 다른 것 없다. 영혼 구원, 한 영혼이라도 전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영혼 구원이 즐거움이 되어야 한다. 논어에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고 했다. 공부도 운동 경기도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고 하지 않나? 소속이 다르다면서 이 세상일만 할 건가?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할 것(I am with you always)이라 하셨다. 소속이 어딘지를 기억하고,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