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에서 살아남는 비결은 다른 데 있지 않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함으로 기다려야 한다. 말씀 없이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다는, 하나님을 향한 절박한 믿음으로 살아가야만 광야의 행진이 승리에 이를 수 있다. 성도는 모일 때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구해야 한다. 눈을 들어 하나님의 영광을 목도하기를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생명처럼 소중히 지켜내려는 구별되고 헌신된 이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 이 땅 위에 하나님의 영광이 계속해서 충만히 임해야만 진정한 회복과 부흥이 임하기 때문이다. 예수님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의 예표인 구약의 제사장들에게만 이스라엘의 이동을 알리는 나팔을 맡기셨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목자가 되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메시지를 발견한다. 예수님은 우리를 영원히 살리시는 생명의 복음을 십자가에서 실현하셨고, 그것을 이제 그분의 제자인 우리에게 맡기셨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 복음을 맡아 생명을 걸고 복음의 증인으로 살았다(행 20:24). 따라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에게도 주님의 은혜로 성루에 세워진 나팔수가 되는 사명이 부여되었다.
이제훈 – 광야에서 만나는 하나님
나는 평생토록 하나님을 믿어 왔다. 이것은 위험한 시인처럼 들릴 수 있다. 종교적 신념은 역사적 사건의 문제, 즉 어릴 적의 훈육 또는 자신의 부모를 기쁘게 하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의혹을 곧바로 갖게 하지 않는가? 물론 이 주장은 양쪽으로 열려 있다. 어머니의 품에서 무신론을 배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시인한 말은 내가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이 합리적 논거나 주의 깊은 증거 탐구를 통해서가 아님을 시사한다. 그러한 의혹에 대해서는 나도 곧바로 동의할 수밖에 없다. 신이 계심을 입증하기 위해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시대 이후로 이용되어 온 소위 유신론적 증거들을 듣기 오래전에 나는 하나님을 믿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의 엄밀한 철학적 사유 과정의 결과로 하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은,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극소수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당연시하며 단순히 “태초에 하나님이…”라고 선언한 다음에 진짜 신비로 보는 것을 기술한다. 그 신비란 하나님의 존재가 아니라 우주의 존재다. 시편 기자에 따르면,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지만(시 19:1), 이는 하늘이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증거라는 뜻은 아니며, 그분이 ‘아마도’ 존재하실 거라는 증거라는 뜻은 더욱 아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존재하심을 당연시하며, 하늘이 무궁히 펼쳐진 그 복합성과 아름다움으로 선포하는 것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영화로우시다는 것이다.
도널드 매클라우드 – 흔들림 없는 믿음
사람마다 소중히 여기는 것이 있습니다. 운동하는 사람은 우승 트로피나 메달을, 음악하는 사람은 자기 악기를, 또 어떤 사람은 사진이나 편지 등 아주 사소한 것들을 소중히 여기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소중하게 생각하나요? 크리스천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 인생의 마지막까지 꼭 붙들어야 하는 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문제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크리스천의 삶은 믿음의 삶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시작되고,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성장하며, 마침내 믿음으로 완성됩니다. 믿음은 꿈을 꾸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무 꿈이나 꾸는 것을 믿음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믿음은 주님 안에서 거룩한 꿈을 꾸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꿈을 주십니다. 각 사람에 맞게 다양한 꿈을 주시지만, 그 목적은 하나입니다. 죄의 고통으로 신음하며 절망하고 있는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고,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꿈을 주십니다.
이영훈 – 영적 부흥의 파도를 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