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자들과 그 옹호자들은, 동성애는 타고나며, 결코 전환(회복)될 수 없다고 말한다. 나아가 미국 심리학회는 동성애의 원인에 대해 다양하다고 하면서, 굳이 “선택”(choice)은 아니라도 말한다. 그런데 동성애는 선택이 아닌가?
킨제이는 1948년 잘못된 보고서를 씀으로 악명이 높지만, 지금 보면 그가 말한 것 중에 주목할 만한 것이 있다. 그는 미국인의 경우, 평생 한 번이라도 동성 성교를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전체 인구의 37%라 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한 통계 결과에 근거하여, 그는 『킨제이 동성애 척도』를 만들었는데, 이는 전적으로 이성애만 하는 경우 0에서 전적인 동성애만 하는 경우 6까지, 7단계의 척도이다. 즉 0에 체크하는 사람은 전적인 이성애자이고, 3에 체크하는 사람은 양성애자이고, 6에 체크하는 사람은 전적인 동성애자인 것이다. 이 척도는 동성애-양성애-이성애의 관계가 스펙트럼이라는 것을 시사하며, 결국 성지남이 유동적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그 척도는 지금도 유효한데, 연구 대상을 규정할 때, 또는 대상의 동성 관계가 어떻게 변화하였는지를 추적할 때 사용한다. 즉 킨제이는 동성애자가 때에 따라 이성애도 한다는 것, 즉 “선택”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킨제이 자신도 자신만의 어떤 방법으로 전환치료를 시도한 바 있다.)
2000년대 들어, 레스비언이면서 심리학자인 Lisa Diamond와 역시 게이이면서 심리학자인 Savin-Williams 등은 성지남에, 유동성(fluidity)이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즉 저절로, 자연스럽게 동성애자가 이성애자라고 말을 바꾼다든지, 또는 이성애자가 동성애자로 변한다든지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유동성 이론은 동성애자 공동체로부터 비판과 공격을 당했으나, 이제는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보편적 지식이 되고 있다. 연구에 의하면 동성애자가 이성애자가 되는 유동성은 이성애자가 동성애자가 되는 유동성보다 크고, 청소년에서 성인보다 유동성이 크며, 레스비언이 게이보다 유동성이 크다. (젠더도 유동적이라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 이를 gender-fluid라 한다.)
미국의 통계를 보면, 과거에는 양성애자가 (가족이나 배우자에게 알려질가 봐) 커밍아웃하는 경우도 적어, 인구조사시 비율이 매우 낮았고, 또 정신건강문제도 더 심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동성애자보다 양성애자 비율이 보다 훨씬 높다. 2023년 Pew 연구소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미국인 전체 인구 중 2%가 게이 또는 레스비언이며, 5%가 양성애자라 한다. 특히 18-29세 사이 젊은이들 중에서는 8%가 게이이거나 레스비언이며 12%가 양성애자라 한다. 2024년 미국 캘럽조사도 비슷한 통계를 발표하였다. 즉 이전에는 양성애자임을 숨겨왔는데, 이제는 가끔이라도 동성간 성교를 하는 이성애자는, 양성애자라고 커밍아웃하는 것이다. 이렇게 현재 동성애자나 양성애자가 모두 증가한 이유는 지난 50여년간 동성간 성교가 정상적이며, 타고나는 행동이며, 동성애자가 차별받지 말고 존중되어야 한다는 “홍보”가 널리 받아들여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특히 젊은이들, 즉 Z-세대에서 비이성애자가 성인 비이성애자들의 두 배가 되는 것은 그 사이 학교에서 개방적 성교육을 받은 것 때문으로 보인다. (우리는 성윤리 문제에 관한 한 미국을 본받을 이유가 없다)
그런데 성지남이 유동적이라면, 동성간 성교를 할 수도 있고, 그만 할 수도 있고, 동성애자가 이성애자로 변할 수 있다. 즉 동성애는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이 이야기가 왜 중요한가? 우리는 동성애자들이 변화하여 새로운 선택을 하기를, 즉 치유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치유되기 원하는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동성애에 관련된 세속 의학적 팩트들이 동성애는 치유 가능한 병적인 상태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① 동성애가 유전되다거나 선천적이라는 증거가 없다. ② 동성애 행동은 신체 건강과 정신건강 면에서 자신에게 해롭다. 특히 결과적으로 불임이다. ③ 사회에 부담을 준다. 성병을 전파하고, 가족체계를 와해시키고, 기타 비윤리적 도착적 성 행태를 확산시킨다. ④ 성지남은 유동적이다. ⑤ 동성애는 과거, 즉 주로 어린 시절의 경험, 특히 트라우마 경험과 원인적으로 관련이 있다. 앞 칼럼에서 설명했듯이 정신역동적으로 동성애 원인은 과거 트라우마 경험이다. “선택”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동성애는 무의식적으로 성적 대상으로 동성을 “선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⑥ 동성애는 역동적으로 과거 트라우마를 해결할 수 있다면, 치유될 수 있다.
둘째, 우리는 트라우마가 반드시 병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트라우마(스트레스) 후 인격이 더욱 성장, 성숙해 질 수도 있다. 트라우마 경험을 통해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지금, 동성애자이면서 유명인이 된 사람들 중에 자신은 동성애자이기를 선택하였다고 당당하게 말하며, ‘선택’이라는 단어를 두려워하는 것을 그만둘 때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셋째, 인간은 기계적인 동물과 달리, 의지(will)라는 덕목이 있다. 이성애가 자연적이며 건강한 것임을 안다면 자기 의지의 힘으로 동성애를 안 할 수도, 또는 이성애를 할 수도 있다. 즉 동성애 “행동”을 금욕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의지로 선택-결심할 수 있다, 또한 동성애자로서의 “정체성”은 전적으로 심리적인 문제임으로 그야말로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동성 끌림은, 동성애에 익숙해져 있으면, 쾌락의 기억과 그에 따른 학습된 자동적인 생리적 반응 때문에 없애거나 바꾸기 어렵다. 즉 성중독처럼 항문성교의 쾌락에 중독이 되면, 알코올중독이나 마약 중독처럼 중단하기 어렵다. 그래서 오랜 노력과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당연히 예방이 중요하다. 중독이 되기 전에 초기에 중단하여야 하는 것이다.
넷째, 동성애는 동성애자들 자신들만의 상호 쾌락 이외, 도움 되는 것이 없다. 물론 동성애자들도 인간으로서 쾌락이나 행복을 누릴 ”권리“가 있다. 그러나 오로지 상호 쾌락을 위해 자신의 건강과 가족체계와 “인류의 생육과 번성함”을 희생시킬 수 없을 것이다.
끝으로 크리스천으로서는 성경이 동성애를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권위와 권고를 거부한다면 이는 크리스천이라고 보기 어렵다. (역사적으로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고 동성애를 옹호하는 이단들이 많았다) 흔히 동성애 옹호자들이나 성경의 신적인 권위를 부인하는 사람들은, 성경이 “좋기는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기독교 진리는 영원하다.
이러한 사실들을 안 이상, 이제 우리의 과제는, 계몽과 교육이다. 즉 사람들에게 동성애의 문제점을 알리고 동성애를 선택하지 말도록 계몽하고, 소아청소년들이 정체성을 의심하기 전에 동성애에 대해 올바르게 생각하도록 교육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크리스천은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여야 한다. 우리 크리스천은, 인간은 다같은 죄인임을 고백하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진실한 크리스천은,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죄를 죄라고 말하여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진정한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사람들이 성경 말씀대로 따르기를 요청한다.
성경은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신명기 30장 15-16절)
민성길(연세의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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