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주변 학문에 대하여

오피니언·칼럼
칼럼
최철호 목사(한국교회연합 바른신앙수호위원장, 예장 합동총신 증경총회장)

Ⅰ. 들어가는 말

최철호 목사(한국교회연합 바른신앙수호위원장, 예장 합동총신 증경총회장) ©합동총신

신앙(信仰)이란 무엇인가? 사전적 정의는 이렇다 “신불(神)佛 등을 굳게 믿어 그 가르침을 지키고 그에 따르는 일”.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신앙이란 유일한 신인 하나님에 대한 확신(faith)과 신뢰(trust)로 그분을 믿는(believe) 삶 그 자체를 말한다. 그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믿는다는 차원을 넘어, 그분이 내 삶의 중심이요 모든 것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앙과 삶은 양립되거나 이원화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이다. 그것은 어떤 대상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과는 전혀 다른 범주에 속한, 생명의 영속성이다. 따라서 신앙은 가장 본질적이고, 가장 근원적이고, 가장 쉽고, 그러면서도 가장 어렵고, 가장 현실적이고 물질적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고차원적이고 형이상학적이다. 그러므로 신앙을 결코 쉬운 범주에 스스로 가두어서는 안 되고, 보다 가까운 측면만 살펴서도 안 되고, 더 이상 가까울 수 없는 자신의 내면을 살피면서, 전혀 인식할 수 없고 지각할 수 없고 깨달을 수 없는 불가시적 차원의 세계까지 믿음으로 바라보며 끊임없이 탐구하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 왜냐하면 신앙은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 본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짧은 논고에서는 기독교 신앙에 있어 과연 성경(책)만으로 족한지, 아니면 다른 주변 학문도 필요로 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Ⅱ. 기독교 신앙의 주체인 하나님

우리의 신앙 대상, 즉 주체는 당연히 하나님이다. 성경에서 ‘엘로힘’, ‘여호와’, ‘주’ 등으로 불리는 하나님의 명칭은 순전히 인간을 위함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호칭도 필요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왜 그런 단어가 호칭으로 사용되었는가 하는 의문은 어리석은 질문이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이 처음 아브라함에게 “나는 전능한 하나님”(창 17:1), “나는 그들의 하나님”(창 17:8), 그리고 야곱에게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창 28:13)고 한 말씀을 통해 그 호칭을 명확히 인식할 뿐이다.

그런데 처음 기독교에 입문한(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고, 물과 성령의 세례를 통하여 거듭난) 초신자나, 오랜 신앙생활을 해 온 집사․권사․장로․전도사․목사 할 것 없이, 하나님에 대하여 ‘삼위일체’라는 말을 붙이면 여전히 쉬운 것 같으면서도 참으로 어렵다. 흔히 삼위일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고 묻는다면, 좀 어려운 한자를 사용하여 “성부도 하나님이시고, 성자도 하나님이시고, 성령도 하나님이신데, 하지만 하나님은 ‘세 분’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이시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정답인가? 아주 불완전한 정답이다. 그래서 좀 더 신학적 지식을 동원해서 말하면 “본질은 하나이시고(이것을 ‘동일본질’이라 한다), 위격으로는 셋이다”라고 하는데, 알쏭달쏭하기 그지없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책은 무수히 많다. 그런데 지금까지 목회를 하고 신학을 하면서 접한 책 중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이 단연 독보적이다. 라틴어 원전과 병행하여 국내에 번역된 그의 책은 무려 1391페이지에 달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그에 못지않아, 그의 방대한 저서 ≪신학대전≫ 가운데 무려 책 3권(제22문제-제43문제)을 할당하여 삼위일체론을 논하였다. 하지만 이 방대한 삼위일체론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도 여전히 간단명료하게 삼위일체 하나님을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 신앙의 축약된 고백서인 니케아 신조(AD. 325),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AD. 381), 칼케톤 신조(AD. 451) 등은 사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선언문이다. 이들 신조는 수많은 주의 종들이 교회의 공적 회의(공의회)를 통하여 수없이 회합하여 목숨 걸고 치열한 논쟁을 거친 끝에 로마 황제의 권위까지 덧붙여서 공포한 것이다. 하지만 그 내용을 여기서 다룰 필요는 없겠다.

Ⅲ. 하나님을 설명하는 독특한 용어

하나님은 불가시적인 영적 실재이다(하나님은 형체가 없다). 그것도 시간 안에서 공간을 점유하고 존재하는 유한적 실재가 아니라, 그 시간과 공간을 무에서 창조하신, 그리고 영원 전부터 스스로 존재(자존)하시는 실재이다. 그분은 창조주이시다. 인간은 그분의 모상에 따라 지음 받은 피조물이고, 따라서 인간 존재의 근원이요 출생의 자궁이기 때문에 인간은 본성적으로(하나님을 믿든 믿지 않든) 그분을 사모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 3:11)고 한 것이다. 여기서 ‘영원(eternity)’이란 ‘나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고 싶다’고 할 때의 그 영원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의 주체요 근원이며 제1원동자인 하나님을 말한다.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을 설명하는 두 가지 중요한 개념은 ‘본질(本質)’을 의미하는 ‘우시아(라틴어는 숩스탄티아substantia 혹은 에센티아essentia)’, 그리고 ‘위격(位格)’을 의미하는 ‘휘포스타시스(라틴어는 페르소나persona)’이다. 원래 이 두 용어는 그리스 철학에서 모두 사물의 ‘본질’ 또는 ‘있는 그대로의 실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오리게네스(185-284)는 ‘휘포스타시스’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영원 전부터 구별된 세 위격”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우시아’와는 구별하였다. 니케아신조가 공포되었을 때만 해도 두 개념은 구별되지 않고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니케아신조 공포 후 약 45년 쯤 지나서 가이사랴의 감독 바실(330-379)이 자기 동생 닛사의 그레고리(335-395)에게 보낸 서신에서 두 개념을 명확히 구별함으로써 삼위일체론의 용어 확립에 확고한 기준을 제시하였다. 본질에 있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동일하다. 하나님이 세 분이 아니라 한 분이신 중요한 근거가 바로 이 ‘동일본질’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요 14:10)고 하셨다. 하지만 성경에 직접 하나님을 가리켜 ‘본질’이란 말을 사용한 바는 없다. 다만, 누가복음 15장 12,13절에 두 번 ‘재산’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휘포스타시스’에 대해 좀 더 살펴보자.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할 때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라”(히 1:3)고 하였고, 믿음을 말할 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히 11:1)라고 하였다. 여기 ‘본체’, ‘실상’은 모두 그리스어로 ‘휘포스타시스’이다. 이 용어는 원래 ‘~아래 서는 것, 어떤 것의 기초’를 의미한다. 그리스 철학에서 널리 사용하던 이 용어를 삼위일체 하나님을 설명하는 데 ‘위격’이란 개념으로 사용한 것이다. 라틴어 ‘페르소나’는 원래 연극배우가 쓰던 가면을 가리킨다. 다시 거꾸로 말해서, 페르소나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프로소폰’인데, 본래 의미는 얼굴을 의미하고, 이를 통해서 개별 인간을 뜻하게 되었다. 페르소나는 심리학에서도 중요한 용어로 사용된다. 정신과 의사 칼 융은 페르소나를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집단정신의 한 단면으로 보았다. 하여튼 ‘휘포스타시스(페르소나)’는 하나님을 제1위격인 성부 하나님, 제2위격인 성자 하나님, 제3위격인 성령 하나님, 이렇게 구별할 때(교리신학자들은 ‘구분’과 ‘구별’이란 용어를 엄격히 나누어서 사용한다) ‘위격’이란 개념을 사용한 것이다. 여기서 잠깐, 영어의 person(인간), personality(인격)는 모두 라틴어 persona에서 유래한 것이고, 따라서 하나님을 가리켜 “인격이 있다, 성령도 인격적이다”라고 하는 표현은 대단히 잘못된 것으로,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기도 하다.

하여튼 삼위일체 하나님을 설명하는 두 가지 중요한 개념의 용어는 그리스 철학에서 빌려온 것으로, 이점에 있어서는 ‘말씀’을 의미하는 ‘로고스’도 마찬가지이다. 이 개념을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의적으로 사용하였는데, 이후 이성, 판단, 개념, 정의, 근거, 관계 등으로 번역되어 왔다. 이와 같이 철학은 기독교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다. 우리는 그러한 면면을 초대교부 아우구스티누스,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 마이스터 엑크하르트 등, 여러 신학자들의 저서를 통해 알 수 있다. 반면에 신학은 철학에 좀 더 분명한 통찰을 제공한다. 왜냐하면 철학이 절대궁극자인 신(神)을 이성으로 탐구하는 학문인 반면, 신학은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한 분 하나님을 이성과 영성으로 탐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Ⅳ. 설교와 학문

설교(說敎)란 무엇인가? 사전적 정의는 “종교상의 교리를 널리 설명함”이다. 교리(敎理)란 그 종교가 지향하는 가르침에 대한 이치를 말하는데, 따라서 기록된 내용을 단순히 전달하거나 조금 덧붙여 설명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성과 영성을 동원하여 파악하고 깨달은 바를 잘 가르치는 데 있다. 따라서 교리 설명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흔히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설교는 아주 쉽게 해야 합니다. 원어, 전문 용어를 동원하면 안 되죠. 문맹인도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진리는 쉽게 전할수록 좋다. 하지만 반드시 모든 진리가 쉬운 것은 아니듯, 모든 설교는 쉬워야 한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설교 전달 방법은 상황에 따라 달라야 한다. 영적 어린아이(고전 3:2; 벧전 2:2) 수준인 초신자나, 공부한바 없는 연세 많은 노인이나, 치매 환자가 입주해 있는 요양원에서 하는 설교는 아주 쉬워야 한다. 하지만 의사나 교수 같은 지식인들 앞에서, 그리고 목사들 앞에서 그렇게 설교했다가는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비유컨대, 젖먹이 아이에게는 “까꿍!”하면서 “맘맘맘!” 한다. 이유식을 먹으라는 말이다. 만약 성인에게, 의사나 교수나 목사에게 그렇게 했다가는 정신병자 취급 받을 것이다. 설교를 한다는 것이 그러하다는 말이다. 설교는 영적 음식을 먹여주고, 그리고 스스로 먹을 수 있도록 돕는 영적 행위이다.

설교를 준비하는 것은 영적 음식을 조리하는 것과 같다. 그것을 먹여주는 방식, 스스로 먹게 하는 방식은 천차만별이다. 설교자에게 보다 근원적인 것은 영적 음식을 조리하는 과정 그 자체이다. 어떤 재료를 어떻게 사용해서 어떻게 조리할 것인가는 그 사람의 능력에 속하는데, 능력은 세 범주로 나뉜다. 태생적인 것(재능), 훈련과 노력(공부), 하나님의 도우심(성령의 조명과 영적 통찰)이다. 재능이야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설교자인 목사는 평생 공부해야 한다. 공부에 게으른 설교자는 무식할 수밖에 없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전적 은혜이고, 경험에 따르면, 기름 부어(안수) 세우심을 입은 목사는 하나님으로부터 그런 은총(은사)을 부여받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보편적으로 목사들이 설교를 잘하는 이유이다. 설교는 논문을 발표하는 행위가 아니다. 따라서 반드시 논리 정연할 필요는 없다(하지만 설교집으로 문서화할 때에는 사정이 다르다). 그리고 새로운 신자들이 계속 늘어나는 대형교회의 주일설교는 딱딱한 음식이 아니라 젖이나 이유식 같은 음식일 수밖에 없다. 처음 교회에 등록하고 출석했는데, 강대상에서 목사님이 구원, 중생, 성화, 십자가의 대속, 영벌, 이런 말을 남발했다가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해 더 이상 출석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강조점은, 준비와 전달은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설교자가 청중의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설교할 수 있으려면, 먼저 설교자 자신이 그 내용을 충분히 숙지해야 한다. 하나를 전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열, 스물을 알아야 한다. 안다는 것은 곧 지식을 말한다. 어떤 설교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영권(靈權)이 강해서, 설교할 때에는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이 모두 알려주기 때문에 공부할 필요가 없다. 단언컨대, 그런 사람은 영적 사기꾼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역사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에는 영적인 것만 있지 않고, 물질적인 것도 충만하다. 하나님은 이런 것을 모두 당신의 나라를 위해 두루 사용하신다. 설교자(목회자)에게 있어 지식의 제일 원천은 당연히 성경이다. 하지만 과연 하나님은 성경만 사용하라고 하시는가? 목사(목회자)에게는 성경 이외 다른 학문(철학, 과학, 생물학, 심리학, 사회학 등)이 필요 없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아직도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기도로 병을 치유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병이 기도로 낫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병원이나 약국으로 가는 것이 더 쉽고 빠를 수 있다. 아마 병원․의사를 전적으로 배척하는 목사는 없을 것이다. 이들은 어떤 경우 건강관리를 위해 병원을 더 자주 찾는다. 설교, 더 나아가 신앙생활 한다는 것이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성경 외에 다른 학문에 대해서도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Ⅴ. 영적 통찰

흔히 말하는 ‘환상을 보는 것’과 영적 통찰은 다르다. 환상은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영혼)에서 일어나는 신비로운 이미지이다. 그런 이미지의 근원은 대략 세 가지이다. 열망에 기인한 정신적․감정적 현상, 하나님이 주시는 어떤 계시적 메시지, 악령이 부여하는 유혹이다. 악령이 가져 주는 것에 대하여는 초대교부들 그리고 중세의 수많은 영적 거장들이 수없이 경고한 바이다. 소위 성령과 악령의 ‘양신역사(兩神役事)’는 언제나 발생한다. 따라서 성령에 의한 환상인지, 악령이 가져다주는 환영인지 잘 분별할 수 있어야 하고, 그래서 분별력과 분별의 영이 필요하다.

하지만 영적 통찰은 그런 신비적 요소를 별반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믿는 자 안에 성령이 계신다고 한다(행 2:38; 고전 6:19; 갈 2:20 등). 성령은 ‘돕는다’는 의미를 지닌 ‘보혜사’(요 14:16,26; 16:7)이시고, 따라서 우리의 신앙생활을 여러 방면으로 도우신다. 좀 어려운 말로 하면 ‘성령의 조명(照明)을 받는다’. 성령 하나님이 믿는 자 안에서 그 사람을 위해 영적이고 신비한 빛을 비춰주시어 무엇이든지 잘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이런 영적 통찰이 필요한데, 그 중에서도 목회자에게 더욱 필요하다. 영적 통찰의 쓰임새를 좀 보자. 성경을 읽고 연구할 때, 이성(理性)만으로 하는 것과 영적 통찰로 하는 것은 천지차이이다. 철학박사 학위를 소유했다 할지라도,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성경에 관한 부분에 있어 결코 진리의 중심부에 진입할 수 없다. 그리하여 겉만 맴돌 뿐이다. 영적인 것은 영적으로만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고전 2:13).

이 은총은 성경 이외 다른 학문에게까지 확장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동서양의 고전 내지 철학 서적을 읽을 때 이성에만 의존하면, 일반적으로 학교에서 배운 수준 이상을 넘지 못한다. 이를테면 플라톤이 말하는 ‘하나’ 혹은 ‘최고선’ 혹은 ‘궁극자’는 거저 하나이고, 최고선이고, 궁극자일 뿐이다. 하지만 영적 통찰에 의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그런 플라톤이 그런 깨달음을 얻게 된 근원은 무엇인가? 그것을 심리학자 칼 융은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 집단적으로 잠재해 있는 ‘원형’이란 개념으로 설명한다. 성경은 아주 쉽고 일반적이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플라톤이 하나님을 믿든 믿지 않든, 그의 무의식 속에는 아담 이후 유전되어 온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 원형으로 들어 있다는 말이다. 이는 동양의 주역이나 사서삼경, 노자, 열자, 인도의 베다 문헌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들 속에는 창조질서와 자연질서, 인간의 영적작용과 절대자와의 상호작용에 관한 저술이 무수히 들어 있다. 그것을 단순한 철학적 사유로만 그친다면 더 이상 얻을 것이 없다. 하지만 영적 통찰이 가미되면 그 속에서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 이외 학문을 접할 때 영적 지경을 넓혀 자세히 살피면서 연구할 필요가 있고, 이것이 풍성한 자양분이 되어 우리의 설교를, 깨달음을, 영적이고 물적인 신앙생활을 보다 더 윤택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Ⅵ. 나가는 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존재를 존재케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 이를 다스리시는 통치주 하나님, 그 결과에 대해 헤아리시는 심판주 하나님에 의함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런 바탕 위에 전개되는 것이고, 목회자는 이 일이 잘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부름 받은 주의 종들이다. 원래 모든 존재는 선하며(창 1:16 이하 참조), 그 속에는 물질뿐 아니라 인간 사유(思惟)의 산물인 제반 학문도 포함된다. 그릇이 크면 더 많은 것을 담을 수 있고, 재료가 풍성하면 더 맛있게 요리할 수 있다. 몸에 좋은 영양분만 엑기스로 뽑아 먹는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만유의 향유(享有)와도 어긋날 것이다. 진실로 주변 학문은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바, 편견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선한 것들을 배척하기보다는, 육적․영적 지경을 넓혀 만유를 포용하는 가운데 참된 진리를 발견함으로써 우리의 신앙생활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더 합당하리라.

#최철호 #최철호목사 #원로목사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