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잡혀서 수난당하신 고난주간을 향해 가고 있다. 해마다 이맘때면 예수님 죽으심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와 그 사건이 그분에게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까를 묵상하게 된다. 예수님 죽으심의 의미에 대해서는 모르는 이가 없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분의 죽으심이 그분에게 얼마나 고통스럽고 꺼려지는 일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은 한계적 육신을 가진 우리와는 달리 신이란 신분을 가진 분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인성과 함께 신성을 지니고 계신 분이시기에 결국은 십자가 수난의 고통을 이겨내실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할 수만 있다면 십자가를 거부하고 싶을 정도로 견딜 수 없는 고민과 고통이었다는 사실에 눈뜨지 못하게 만든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능하다면 십자가라는 무거운 잔을 옮겨달라고 기도하셨다(마 26:39)
아마도 이것은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이래로 유일하게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게 올린 기도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꽤 실망스런 기도 아닌가? 예수님의 이 기도에 낙심해서 “예수도 우리와 별 차이 없는 인간이었다.”라며 교회를 떠난 이들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예수님이 우리와 같이 약한 인간의 몸을 입고 있었기에 그럴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게 답하는 이들이 실제로 많다.
과연 이 실망스러워 보이는 기도를 그분의 인성 탓으로 돌리는 것으로 만족할 만한 답이 되었다고 볼 수 있는가? 절대 아니다. 예수님도 우리와 같은 인성을 입으셨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만 이해하고 그쳐 버린다면 지극히 인간적으로 보이는 예수님의 이 고뇌에 가득 찬 기도의 깊은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없다.
예수님께서 왜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 기도하셨을까? 죄인들을 위한 대속의 제물이 치러야 할 대가가 얼마나 큰지를 예수님이 너무나 잘 아셨기 때문이다.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죄인이 당해야 할 대가는 하나님으로부터 단절이요 영원한 고통이다. 이 대가를 우리 대신 예수님이 치르셨다. 예수님이 인간 한 사람의 죄를 뒤집어 쓰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 덮어 쓰시는 것이다. 그 죄의 무게가 얼마나 큰 것일지 상상해보라.
그뿐 아니라 그 죄에 대한 대가지불, 다시 말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고 심판을 받아야 하는 엄청난 형벌이다. 예수님이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혼자서 그 모든 죄의 대가를 지불받으셔야 했다.
그 결과 하나님으로부터 저주와 심판을 받아서 비록 잠시라 할지라도 처음으로 사랑하는 성부 하나님과 단절되어야 하는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형벌의 의미이다.
아무리 하나님 중 한 분이신 예수님이라 할지라도 그것만큼은 감당하기가 정말 어려운 일 아니었겠는가. 죄의 삯, 즉 죄의 대가지불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조차도 두려워 떨 정도로 무시무시한 것이었다는 말이다. 그 일을 누가 당했어야 했나? 우리가 감당했어야 할 몫 아니던가. 그걸 누가 대신 감당하셨나? 우리 주님이다.
십자가 대속을 그토록 꺼릴 수밖에 없었던 예수님 기도의 의미를 이제야 알겠는가? 십자가의 잔을 옮겨달라는 예수님 기도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고 나면 그분에게 실망할 것이 아니라 깊은 감사가 절로 터져 나올 수밖에 없다.
요 19:30은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고 말씀한다. 여기에 “영혼이 떠나가시니라”는 내용이 있다. 영혼이 떠나가면 사람은 죽는다.
그런데 이는 너무도 잘못된 번역이다. 원문대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영혼을 떠나보내시니라.” 이 단어의 헬라어 동사는 ‘파라디도미’(παραδίδωμι)인데, 이것의 의미는 ‘포기하다’(give up), ‘넘겨주다’(hand over)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영혼(생명)을 스스로 포기하고 넘겨주고 떠나보내셨다는 말이다. 영혼이 떠나면 죽음이다. 만일 우리의 영혼(생명)을 잡을 수만 있다면 그걸 포기하고 떠나보낼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십자가의 저주를 피하고 생명줄을 잡을 수 있었지만 그 소중한 줄을 놓아버리셨다. 누구 때문에? 우리 때문에 말이다. 요 10:18에 이런 말씀이 나온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자기 목숨을 빼앗지 못하게 할 수도 있었지만 ‘스스로 버렸다’고 되어 있음을 보라.
사 53:12b도 그렇게 말씀하고 있음을 보라.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자기 영혼을 버려”라는 내용이 보이는가? 그렇다. 예수님의 수난과 대속의 죽음은 그분조차도 꺼리고 피하고 싶을 정도로 엄청난 대가였다.
그런데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자발적으로 자기 영혼(생명)을 버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편을 선택하셨다. 그래도 그분의 내키지 않는 듯한 기도에 실망스러워할 것인가? 그렇게 감내하기 힘든 무시무시한 대가를 우리를 위해 자발적으로 감당하신 그분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크고 깊은 것인지 이제야 알겠는가? 그렇다면 해마다 이 시즌을 맞는 시점에서 우리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지 스스로 판단하고 그에 합당한 변화를 가져와야 하지 않겠는가?
#신성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