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7년 10월 31일 부패한 로마 카톨릭 교회의 면죄부(면벌부, 大赦-lndulgentia) 대량 판매를 지적하고, 비텐베르그 교회 문에 95개 조 반박문을 게시하면서 종교개혁, 교회개혁 운동이 일어났다. 이 종교개혁 운동이 17세기 초까지 계속 이어지며 중세의 교권 통치 시대를 무너뜨리는 결정적 역할을 하고 중세와 근세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한다.
물론 종교개혁 운동 이전에도 교회 개혁 시도는 있었다. 교황과 교회의 절대적 권위와 사회적 지지를 충분히 얻어내지 못해 무고한 희생만 치르며 번번히 실패했지만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를 위시한 개혁가들이 마치 안달난 사람들처럼 포기하지 않고 개혁을 계속 시도하자 하나님께서 시대적 배경이 뒷받침되게 하셨다. 문예부흥(Renaissance)으로 인권에 대해 자각하게 하시고 이성적 신앙이 강조되면서 중세의 일방적이고 맹목적인 신앙 강요가 더 이상 먹혀들지 않게 하셨으며, 문화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개혁의 분위기가 무르익게 하셨다. 이뿐이 아니다. 1445년에는 구텐베르크(Gutenberg)의 금속활자 인쇄술이 발명된 후에 많은 번역성경이 대량으로 인쇄되게 하셔서 성경해석이 새로운 전기를 맞게 하셨다.
종교개혁은 한 마디로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다. 중세 천 년 동안 교회가 정치화, 권력화, 제도화되면서 기독교에서 초대교회의 순수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되면서 복음이 변질되고, 진리가 왜곡되며, 신학이 교회 권력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면서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한 종교개혁, 개혁의 핵심은 성경의 권위 회복이었다.
개혁가들은 안달이 난 듯 성경 보급에 앞장섰고, 그 결과 교회의 터무니없는 타락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면서 교회는 성경 그 자체를 중시하게 되었다. 그래서 종교개혁의 가장 기본적인 정신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 첫 번째였다.
중세 가톨릭 교회의 타락을 준열하게 비판하고, 성경의 복음 정신으로 복귀할 것을 역설하여 종교개혁에 큰 영향력을 끼친 에라스무스(Erasmus)나 법률 공부 중 자신의 삶과 구원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다가 낙뢰로 친구가 죽자 부친의 만류를 뿌리치고 수도회에 들어가 사제가 되어 교회의 부정부패를 비판하는 '95개조'를 비텐베르크 대학 정문에 붙이고, 교황으로부터 받은 파문 칙령을 불태우고, 의회에 소환되어 자신의 주장을 취소할 것을 강요당했으나 이를 거부하여 마침내 제국에서 추방되는 처분을 받고도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등 종교개혁의 선구자가 된 마르틴 루터, 그리고 25가지 질병 때문에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이라 불리면서도 『기독교 강요』를 저술해 신학적 토대를 구축하고 음란과 폭력이 가득했던 제네바를 거룩한 도시로 바꾸었던 칼빈(Jean Calvin), 그외에도 쯔빙글리(Zwingli),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 멜랑톤(Melanchthon) 등은 성경으로 돌아가자는데 안달이 난 사람들이었다.
성격은 전혀 다르지만 본문에도 안달난 사람들이 나온다. 예수님을 잡아 임금 삼으려던 사람들 얘기가 아니다. 그들은 종교개혁가들과 달리 예수님을 잡지 못해 안달난 사람들이다.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들
초막절에 예루살렘 성전에 가신 예수님과의 대화(Dialog)는 ‘하늘로부터 온 교훈’이라는 것이 첫 번째였고, 두 번째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그리고 세 번째는 “내게로 와서 마시라”였다.
“내게로 와서 마시라”는 예수님의 메시지는 광야 40년 동안 가장 빈번했던 불만의 주제이자 지난 7일간의 절기 동안에도 무리가 가장 신경 쓴 ‘물’과 관련된 것이었다.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예수님은 자신이 므리바의 반석이며 생명수라고 증거하셨다. 바울도 훗날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10:4)고 표현한다.
하지만 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반응은 ‘분열’이었다.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40절), 여기서 ‘그 선지자’는 요한복음이 줄기차게 비교하려 한 선지자, 신명기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신18:15)라고 한 바로 그 선지자를 가리킨다. 무리 중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가 그리스도 아니냐”라는 발전된 반응을 보인 사람들도 있었다.
감동받고 예수님을 영접하려는 자들도 있었지만 거부하려는 자들도 있었기에 그들 사이에 쟁론이 벌어진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라는 반응을 보인 사람들은 그래도 괜찮은 사람들, 갈릴리 사람이지만 그리스도인듯하다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예수를 꼭 잡아야겠다는 생각에 안달이 난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성전 경찰까지 동원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거부한 이유는 편견 때문,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해 알기 때문에 예수는 그리스도일 수 없다는 편견을 갖고 있었다(26,41,47,52절). 그 편견은 그리스도는 베들레헴 출신이어야 한다거나, 그 출신을 알지 못하도록 신비적이어야 한다거나, 갈릴리에서는 절대 메시아가 나올 수 없다는 편견이다. 자신의 생각이나 경험을 절대화한 것 때문에 갖게 된 편견으로 보인다.
예전에 옥한흠 목사님이 살아계셨을 때 사랑의교회 제자훈련 세미나가 유명했다. 그때 옥 목사님은 자기는 50세 이상은 제자훈련에 받아주지 않는다고 하셨다. 이유는 사람이 50세가 넘으면 편견으로 변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런 측면이 있다. 나이가 들수록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다. 피차 자기 말만 계속하기에 대화가 잘 안 된다. 설교도 마찬가지다. 몇십 년을 들어도 생각이 바뀌질 않는다. 자기 생각과 방식을 고수하고 거기에 맞는 것만 받아들이고 은혜받았다고 한다.
우리만 그런 것은 아니다. 놀랍게도 우리나라는 실질 문맹률이 OECD 통계로 최하위라고 한다. 무려 75%가 문맹으로 분류된다. 글자 읽을 줄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글자 읽는 문맹률은 1%가 안 되지만 문장이나 글에 대한 해독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약병에 쓰인 주의사항이나 설명을 듣고 이해하는 정도가 그렇다. 나이 들수록 더 심하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독서량의 절대 부족 때문이다. 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아예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 많다. 또 자기 경험과 지식을 절대화하기에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이해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래서일까? TV에 정치토론이나 기자들의 질문을 보면 수준이 한심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고집만 부린다. 편견 때문이다.
교만했던 사람들
편견을 고집하기보다 겸손과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 신앙생활 연조가 좀 되면 알 건 안다는 태도를 지니기 쉬운데 안 된다. 겸손히 듣겠다는 마음이 아니면 죽은 신앙이 될 수 있다. 교만한 가운데 믿는 하나님은 자기 사고의 조롱박에 갇힌 하나님이지 크고 무한하신 하나님이 아니다. 기억하라. 교만하면 성장 없다.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라는 틀을 강화하는 데만 집중하기 때문이다.
성전 경찰을 출동시켜 예수님을 체포하려던 시도가 무위로 끝난 후 3장에 나왔던 니고데모가 나선다. 니고데모가 산헤드린 의원들과 논쟁을 벌인 것이다. 물론 예수님에 대한 강력한 변호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예수님을 위한 변론이었다. 그의 주장은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50절), 갈릴리 출신이라 메시아일 수 없다는 동료들에게 최소한의 진상조사도 없이 사람의 말만 듣고 하는 즉결 심판은 안 된다는 것이다.
유대교를 대표하는 니고데모가 한마디 했음에도 불구하고 수그러들지 않았다. 바리새인들은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47-48절) 그런다. 교만하기 때문이다. 교만한 지도자들은 유력한 자들, 그들은 지적 엘리트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다며 사람이나 학파의 권위를 들먹이는 것과 같은 말을 한다. 하지만 똑똑하거나 힘 있는 사람들의 말이면 그게 진리냐? 우리는 그들이 진리 가운데 있는지부터 봐야 한다.
예수님은 이 바리새주의와 이스라엘의 율법 체제를 깨뜨리는 뜨인돌과 같이 그들에게 서슴없이 도전적인 말씀을 하신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23:12-13). 그뿐이 아니다. ‘눈먼 인도자’ ‘어리석은 맹인들’이라며 ‘화있을진저’를 연발하셨다. 그리고 급기야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23:33), 예수님은 피를 토하듯 그들을 질책하셨다. 그들이 너무 교만했기 때문이다.
회개할 줄 모르는 사람들
예수를 잡으러 갔던 아랫사람들이 빈손으로 와서 하는 말이 재미있다.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46절), 다른 성경에서는 ‘권세 있는 새 교훈’이라는 말까지 한다. 성전 경찰들이 감동 받고 은혜 받았다는 뜻이다.
무슨 말인가? 지도자들을 향해 “당신들이 틀렸다”는 것이다. 그 정도되면 지도자라 할지라도 회개했어야 한다. 그런데 그들은 아랫사람들의 말을 듣기보다 예수는 절대 그리스도일 수 없다는 생각을 굳힌다.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42절), 회개하기는커녕 예수님의 출신을 따진다. 예수는 갈릴리 사람으로 베들레헴과는 상관이 없고 그래서 메시아일 수 없다는 말이다. 여기서 요한은 예수님이 고향은 갈릴리이지만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는 말을 굳이 하지 않는다. 출신이 아니라 예수, 그 분의 말을 들으면 그게 진리인지 거짓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말씀의 하나님’이시다. 말씀으로 당신을 계시하신다. 맞다. ‘말이 곧 그 사람’ 아닌가? 비범한 말을 한다면 비범한 사람, 진실된 말을 한다면 진실된 사람 아닌가? 그런데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외치시는데 생각이 많은 그들은 제대로 알아듣지를 못한다. 그래서 회개하기는커녕 감히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를 잡아야겠다고 안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 니고데모가 이렇게 말한다.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51절). 심판하려고 하지 말고 사건의 전모부터 조사하라는 말이다. 행동이 가장 큰 소리를 내는 법, 선한 행동을 하고 선한 열매를 맺으면 그 말이나 그 사람은 선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진실성을 잃었다. 지도자들부터 욕심이 너무 크다. 그리고 심지어 정치적으로 진실과 욕심을 이용하기 때문에 말과 행함이 분리되는 경향이 있다.
성경은 말한다.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7:17-18). 예수님의 말씀이다. 말이나 믿음이나 사람됨은 열매로 나타나는 것, 아무리 번지르한 말을 할지라도 그 행함이 반사회적이고 미신적이고 폭력적이고 폐쇄적이면 그것은 거짓이다. 때로 우리의 생각이나 말이 일치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행함이 사랑이고 친절이고 평화이고 포용이고 정의이고 깨끗함이라면 일단은 진리에 가까울 수 있다.
믿음도 마찬가지다. 행함으로 증명되지 않으면 그것은 없는 것과 같다. 그래서 내 믿음이 옳은지부터 점검해야 한다. 성경은 경고한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1:22). 말 때문에 속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사랑한다고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희생하심으로써 그 사랑을 온몸으로 우리에게 보이셨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아는 것이다.
못 잡아 안달난 사람, 다른 측면이기는 하지만 우리도 이래야 한다. 사람 낚는 어부로 부름받은 우리라면 고기를 못 잡아 안달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악인들은 예수님을 못 잡아 안달났는데, 또 이단들을 교회를 접수하려고 안달 났는데, 우리는 어떤가? 구원할 사람을 못 잡아 안달나야 하는데 너무 태평한 것은 아닐까? 열이 많아 자주 물을 먹어야 하는 사슴이 목말라 헐떡거리듯 생명수에 목말라 하고, 구령(救靈)에 목말라 하는 그게 교회의 본질, 우리는 구령에 안달난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