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탄생과 죽음 사이에 발생하는 생명에 관계된 문제들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기도 하고 고민스럽게 하기도 한다. 의료윤리에도 어떤 원칙이 있다면 그 원칙에 대입시켜서 쉽게 상황을 파악하고 판단하기 쉬울 것이다.
미국의 생명윤리로 유명한 2곳의 연구기관이 있다. 하나는 조지타운대학에 있는 케네디 연구소이고 다른 하나는 뉴욕에 있는 해스팅스 센터이다. 해스팅스 센터에서 함께 일했던 의료윤리학자인 비첨(T.L.Beauchamp)과 기독교 윤리학자 차일드리스(J.F.Childress)가 1979년 생명의료윤리의 원칙들(Principles of Biomedical Ethics)을 처음 출판했다. 현재 8판까지 개정판이 나온 상태다. 이들은 이 책을 통해 자율성 존중 원칙, 악행금지의 원칙, 선행의 원칙, 정의의 원칙을 제시했다. 오늘날 생명윤리 논의에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생명윤리 영역에 이 원칙들을 적용해 보면 행위의 윤리적 판단에 매우 유용하다.
이 네 원칙은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자율성 존중 원칙(The Principle of Respect for Autonomy)
이 원칙은 소극적 의미로는 개인은 누구나 자신의 일을 결정할 자율권을 가지며 그것이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그 권리를 침해받아서는 안 된다는 원리이다. 적극적 의미로는 인간 대상 연구나 의료행위를 하기 전에 전문가들은 대상자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제공한 정보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자발적으로 합당한 동의를 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행동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술 전에 작성하는 수술동의서, 임상실험 전에 작성하는 임상실험 참여 동의서, 사전의료 의향서, 연명의료 결정서 등이 여기 해당된다. 무엇보다도 충분한 정보에 근거한 동의(informed consent)가 환자의 자율성 보장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또한 제공된 정보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결정할 수 있는 능력과 환경이 중요하다. 자율성을 발휘할 수 없는 능력이나 상황에 놓인 경우나 우월한 입장에 있는 자로 하여금 강요나 착취의 가능성이 있는 경우 자율성의 원칙을 적용하지 않는다. 어린 아이나 정신지체자, 자살하려는 사람, 약물중독자, 약자의 입장에서 작성된 동의서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의사조력자살( Physician Assisted Suicide )를 하려는 사람들이 자신의 생명을 결정할 자율성을 주장하는 경우가 간혹 있는데, 케네디 연구소 소장을 역임함 다이엘 칼라한 (Daniel Callahan)은 ‘고삐 풀린 자율성’으로 표현했다. 인간이 스스로 결정했다고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낙태나 안락사와 같이 생명이 달린 문제나 장기매매, 생식세포를 통한 비혼 출산 등은 자율성의 경계를 넘어선 행위들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지고, 예수님의 핏값으로 구속받은 몸을 함부로 다루는 것은 비윤리적인 것을 넘어 하나님께 죄를 짓는 행위이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7)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고전 7:23)
우리나라에서 의료영역에서 자율성의 원칙은 대한의사협회 의사윤리지침(2017년 개정)에 ⓵ 진실을 말하라 ⓶ 타인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라 ⓷ 환자에게 획득한 정보를 보호하라 ⓸ 환자에게 개입해도 좋다는 동의를 얻어라 ⓹ 요청이 있을 때 타인이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라 등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담고 있다.
2. 악행금지의 원칙(The Principle of non-Maleficence)
피해를 주는 일에는 의술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원칙이다. 악행(피해)이란 넓게는 명예, 재산, 사생할, 자유 등의 훼손을 의미하나 좁은 의미로는 신체적, 심리적 이해관계의 훼손을 말한다. 의사에게 요구되는 살인하지 말라, 고통을 가하지 말라, 불구로 만들지 말라, 재화를 빼앗지 말라 등으로 더 구체화 될 수 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통해 ‘Do No harm’으로 알려져 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라는 원칙이다. 의료영역에서 꼭 알아야 할 의학지식이 부족하거나, 능력이 되지 않는 수술을 하거나, 부주의로 환자에게 피해를 주는 모든 경우에 해당한다. 단, 예외를 두는 경우도 있는데 이중효과의 원리를 적용하여 악행금지의 원칙에서 제외한다.
3. 선행의 원칙(The Principle of Beneficence)
선한 일을 위해 의술이나 연구를 시행하라는 것이다. 온정적 간섭주의(paternalism)가 관여된다. 온정적 간섭주의란 부모가 어린 자녀에게 좋은 음식이나 행동을 선택하도록 이끌어 주는 것처럼 전문적인 정보나 행위의 결과에 대해 잘 모르는 대상자에게 최선의 선택지를 적극적으로 권하는 것을 말한다. 악행금지의 원칙이 어떤 행위를 하지 말라는 소극적 의미를 가진다면, 선행의 원칙은 어떤 행위를 하라는 적극적인 의미를 가진다. 악이나 해가 되는 것을 막고, 제거해야 하며, 선이 되도록 행하거나 증진시켜야 한다고 규정한다.
종종 선행의 원칙은 자율성의 원칙과 충돌하는 경우가 많다. 전문가는 최선의 방법을 제시했지만, 대상자가 자신의 자율적 결정권을 내세워 자신의 치료나 행동을 결정하는 경우다. 수혈이 필요한 상황에서 의료진은 수혈을 해야 한다고 판단하지만 여호와의 증인의 경우 수혈을 거부하는 경우다. 실제로 이런 상황이 각 나라에서 발생하고 있으며, 나라마다 판결이 다르게 나고 있다. 크리스천은 수혈받는 것을 죄로 여기지 않는다. “피 채 먹지 말라”(창 9:3~4, 신 12:20~28)는 구약의 말씀을 잘못 적용한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기준은 크게 3가지로 구별하여 받아들이고 있다. 도덕법과 시민법과 의식법이다. 십계명이 도덕법에 해당한다. 시대와 무관하게 반드시 지켜야 하는 기준이다. 도덕법과 달리 구약의 시민법이나 의식법은 그대로 따를 필요가 없다. 시민법은 이스라엘 민족의 문화와 장소를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것으로 살인에서부터 소가 들이받은 사람에 대한 배상, 구덩이를 덮지 않아 나귀가 빠졌을 때 나귀를 구해야 할 책임 등이 해당한다. 시민법은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게 기준을 정하여 지키고 있다. 마지막으로 의식법은 대표적으로 레위기의 제사법이 있다. 성막에서 지켜야 할 규정, 유월절 규정, 할례 의식, 나실인에 관한 법, 식생활 법, 나병환자나 피부병 환자에 대한 정결 예식, 집에 곰팡이가 생겼을 때 행하는 정결 의식, 유출병 환자에 대한 정결 의식 등이 있다. 이 모든 의식법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단번에 우리 죄를 사해 주심으로 지금 신약 시대에는 폐기되었다.
모든 의료행위에 대한 결과가 다 좋을 수만은 없다. 예를 들어 비행기 안에서 응급환자가 발생하여 의사를 찾았을 때 환자에 대해 최선의 처치를 했지만 환자에게 안 좋은 결과가 발생할 수 있다. 이런 경우 ‘선한 사마리아법’을 적용하여 응급환자를 돌본 의료진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 하지만 선한 사마리아법이 실제로 적용되지 않아 선의로 응급환자를 돌보았지만 선행을 한 의료진에게 거액의 배상금을 청구하는 일이 발생하고 있어 안타까운 현실이다. 우리나라에서도 한의원에서 봉침을 맞은 후 아나필락틱 쇼크가 발생하여 같은 층에 있는 가정의학과 의사가 달려와 도와주었지만 환자가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유족들은 응급상황을 도와준 가정의학 의사에게 9억 원대 민사 소송을 제기했다. 가정의학과 의사는 5년 만에 소송 끝에 무죄 판결이 받긴 했지만 선의로 도와준 행위에 대해 매우 가혹하고 무정한 일이 아닐 수 없다.
4. 정의의 원칙(The Principle of Justice)
정의의 원칙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주어진 모든 재화의 분배가 공평하게(=정의롭게) 되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이식할 장기를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를 정하는 문제가 여기에 해당한다. 한정된 의료자원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적절하고 공정하게 배분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원칙이다. 상황에 따라 나라마다 합의된 기준을 만들어 지켜가고 있다.
우리가 부딪히는 생명윤리적인 문제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결정해야 할지 위 네 가지 원칙에 상황을 대입시켜 보면 해답이 찾을 수 있다. 이 네 가지 원칙으로 모든 의료윤리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지만 가장 명쾌하게(clear) 윤리적인 문제를 파악할 수 있는 좋은 도구(tool)로 사용할 수 있다. 이 원칙을 생명윤리 문제뿐만 아니라 우리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일들에 대입시켜 보아도 좋은 판단을 할 수 있어서 어려운 문제를 만날 때마다 이 원칙을 적용해 보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이명진(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 운영위원장, 의사평론가, 의료윤리연구회 초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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