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작가들의 말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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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종교에 매이지 않은 그리스도인」

기독교는 종교를 뛰어넘는다. 다른 모든 종교에는 기본적인 특징이 한 가지 있는데, 신도가 자신의 노력으로 신에게 닿고, 신을 찾으며, 신을 기쁘게 하려 한다는 것이다. 즉 종교는 인간이 신을 향해 손을 뻗는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에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손을 뻗으신다. 기독교는 인간이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 오셨다고 말한다.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었고 길을 잃었다. 우리는 죄인이며 마귀의 손에 붙잡힌 포로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다시 사기 위해 지불할 수 있는 최고의 몸값, 곧 자신의 생명을 주셨다. 우리가 원래 예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 대가는 십자가를 통해 그분 자신의 목숨으로 치러졌다. 예수님께서는 은이나 금이 아닌 피로 우리를 사셨다(행 20:28). 하나님은 당신의 영혼만을 구원하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당신 전체를 구원하셨고, 여기에는 당신의 몸도 포함된다. 그리스도인이 눈과 귀와 입과 손으로 하는 행동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몸을 헌신할 만큼 진지하게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면, 그제야 그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대로 행할 준비가 된 것이다.

프리츠 리더나워 – 종교에 매이지 않은 그리스도인

도서 「늙은 둥치에서 새순이 돋아나듯」

예수의 겟세마니에서 싸움은, 우리의 모든 싸움을 처음부터 우리만 죽으면 되는 싸움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 자신의 한계 너머까지 ‘벗어나고’ ‘비우신’ 분의 사랑 가까이로 우리를 부르고, 거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고 명한다(막 14:34). 우리는 이 ‘머물러 깨어 있음’에서 오는 몸의 부침(浮沈)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이 얼마나 무겁고 힘겨운지, 또 얼마나 영적으로 불편한지 경험으로 알고 있다. 이는 사도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그렇게 하기를 주저했다. 이 기이한 싸움이 벌어지던 겟세마니 동산의 정원 위에 있지 않았고, 잠시도 거기서 깨어 있지 않았다. 사도들도 결국 우리처럼, 기도(싸움=agon)하지 못했다. 예수의 싸움을 싸우지 못했고, 따라서 사랑하지 못했다. 누가의 시선을 멈춰 세운 의인. 나사렛 예수는 바리새인과 같지 않다. 이 참된 의인 예수는 죄인과 약자를 내려다보지 않고 올려다본다. 그래서 삭개오가 미처 몸을 숨기지 못한다. 공개되고 탄로된다. 기어코 드러나! 보임을! 당하고 만다. 그리고 예수의 이 눈은 삭개오의 닫힌 눈을 열어 젖힌다. 삭개오의 삶 속에 이미 당도한 하나님 나라를 삭개오가 올려다(아나블레파스) 볼 수 있도록 초청한다.예수가 아니면, 예수가 가진 눈이 아니면, 결코 발견되지 않았을 인생이-그분의 나라로 옮김 받지 못했을 목숨이-우리 곁에는 참 많이 있다. 나 역시 예수의 그 눈이 아니라면 결코 발견되지 않았을 인생이다. 나(필자)는 내 눈이 더 이상 바리새인과 같지 않으면 좋겠다.

류재성 – 늙은 둥치에서 새순이 돋아나듯

도서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시는가」

인도하심에 관한 한,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면 선하고 지혜롭게 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한 것을 전부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자유롭게 우리 인생을 성경의 범위를 넘어서는 방식으로 인도하실 수 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다른 방법으로는 결코 도달하지 못했을 결정을 아주 특별한 어떤 일 때문에 내리게 된 경우가 아마 우리 대부분에게는 기억날 것이다. 뜻밖의 섭리, 또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느낌, 현명한 친구의 개입 덕분에 우리 인생행로가 바뀐 적이 있다. 그러나 탄탄하게 성경에 기반을 두지 않은 채 그러한 일에만 의지해서 살아간다면 결국은 실패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정말로 약속하시고 어김없이 행하시는 것은 바로 성경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이다.

폴 말라드 –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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