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열심히 운동하고 튀긴 음식이나 초콜릿을 먹지 않고 좋은 음식 찾아다니고 좋은 습관 가지려고 열심히 노력한다. 그런데 러닝머신 발명가는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Gym 발명가는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세계 보디빌딩 챔피언은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반면 KFC 발명가는 94세에 사망했고, 초콜릿 브랜드 누텔라 발명가는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담배 제조사 윈스턴은 102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아편 발명가는 116세에 지진으로 세상을 떠났고, 헤네시 코냑 발명가는 98세에 세상을 떠났다. 의사들은 운동이 수명을 연장시킨다고 하는데 꼭 맞는 말 아니다. 왜 토끼는 항상 뛰어다니지만 2년밖에 못살고, 전혀 운동을 하지 않는 거북이는 400년을 살까? 생명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가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렘2:13)라는 표현을 했는데 터진 웅덩이에 열심히 물을 붓고 있다면 그건 어리석은 짓,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7:37-38) 예수님이 선포하신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물이 귀한 중동지역 사람들에게만 솔깃한 말씀인가? 우리 현대인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초막절 마지막 날이었다고 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초막을 짓고 살았던 것을 기념하는 절기다. 원래는 가을 농사와 관련된 축제였다. 이때는 여름 건기가 지나고 가을에 이른 비가 내리면서 한 해의 농사가 시작된다. 그래서 초막절은 일종의 기우제 성격의 절기이기도 했다.
명절 기간 7일간 제사장들은 예루살렘의 주요 수원지인 기혼샘(Gihon Spring)에서 물을 길어오는 의식을 행한다. 기혼샘에서 성 안으로 물을 끌어들여 생긴 샘이 바로 실로암, 제사장이 이끄는 행렬이 새벽에 실로암으로 가서 황금 주전자에 물을 가득 떠 아침 제사를 드리는데 성전으로 행진하여 번제단 주위를 돌며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시118:25) 찬양하고 제사장이 이 물을 번제단에 붓는다. 물을 주시는 분은 여호와, 물이 풍성해야 풍요가 깃드는 것, 물이 곧 생명이라는 뜻이다.
초막절의 이 의식을 보신 예수님은 절기 마지막 축제의 날에 자신이 생수를 가져올 메시아라고 선포하셨다. “내게로 와서 마시라” 물이 대지에 생명을 주듯 자신이 영혼에 생명을 주는 생수라는 것, 자신이 영혼의 갈증을 해소시켜 주는 메시아임을 선포하신 것이다.
요한은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하셨던 가상칠언(架上七言) 중에 독특한 고백을 하셨다고 기록했다. “내가 목마르다”(19:28). 피를 많이 흘리며 고통스러우셨기에 목이 말랐겠지만 그 뜻이 아니다. 이 말씀은 인간이기에 느끼는 영원한 갈증을 대신하신 표현, 영원한 생수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졌기에 느끼는 인간의 궁극적인 갈증의 표현이다. 그리고 본문의 “내게로 와서 마시라”, 이건 갈증을 해소하게 해주겠다는 말씀 정도가 아니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몇 모금 준다는 게 아니라 생수의 강이 흘러넘친다고 하셨다. 엄청난 선언이다. 4장 수가성 우물가에서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4절)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의 대상은 한 여인, 개인이었지만 본문은 무리, 은밀한 대화가 아니라 공개적인 초청이다. 당연히 우리를 향한 초청이기도 하다. ‘내게로 와서 마시라’.
생수의 근원으로서의 초청
초막절에 물 깃는 의식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후 광야에서 생활할 때 반석에서 물을 내어 생수를 공급해 주신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고, 그 반석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예수님은 이런 유대인들의 초막절 의식을 배경으로 광야에서 물을 낸 그 반석의 실체, 생수의 근원으로서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초청하신다. 분위기에 딱 맞는 메시지 아닌가?
예수님은 생수의 근원이시다. 에스겔 47장에 사로잡힌 지 25년째, 예루살렘이 망한 지 14년 되던 해에 에스겔이 환상 중에 본 무너졌던 성전이 회복되는 장면이 나온다. 성전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흐르는데 그 물이 점점 불어난다. 발목에 오르고, 허리에 오르고, 급기야 물이 건너지 못할 강이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이 강물이 흐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흐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8절)이라 했다. 이 강이 사해를 살리고 죽은 이스라엘을 다시 살린다는 말씀, 예수님이 성전이시고, 이 성전으로부터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이 생명수 강은 천국을 상징한다.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계22:1-2) 그 강은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데 그 어린 양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이 일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졌다. 요한만 증언하고 있는 독특한 예수님의 모습이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고 그때 예수님의 몸에서 피와 물이 쏟아졌다는 것이다(19:34). 단순한 생리적인 현상을 기록한 걸까? 아니다. 생수의 강의 근원을 증거한 것, 주의 보혈과 물, 골고다의 그 십자가에서부터 인류를 살리는 생명의 물이 쏟아졌고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살아난다는 것이다.
그렇다. 그리스도는 생수의 강, 생수의 근원이시다. 샘물 정도가 아니다. 시편 1편의 복 있는 사람의 모습으로 제시된 시냇가에 심긴 나무의 복이 이루어질 것이다. 시냇가에 심긴 나무가 잎사귀가 푸르고 마르지 않고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듯이 예수님이 우리 인생의 생수의 강이 되신다면 우리는 복 있는 사람이 된다는 말씀, 심령이 마르지 않고, 얼굴이 빛나고 건강한 사람, 영혼이 만족하고 모든 일이 형통하고, 시절을 좇아서 열매를 맺게 된다는 말씀이다.
요한은 예수님이 ‘서서’ 외치셨다고 했는데 이 말씀을 듣는 자마다 벌떡 일어나 초청에 응해야 한다. 물은 생명, 물 없이는 살 수 없는 우리에게 생수를 준다고 하시기 때문이다. 대우주와 몸에 물이 필수이듯 우리의 영혼에도 물은 절대 필수, 그렇다고 아무 물이나 마시면 안 된다. 잘못 마시면 더 심한 갈증을 느끼게 되는 것, 감사하게도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께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초청하신다. 이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다.
갈증 해결자로서의 초청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든 갈증을 느끼기에 예수님은 그 목마름을 해결해주는 ‘갈증 해결자’로서 우리를 초청하신다. 그런데 육체적 갈증도 심각하지만 더 심각한 것이 영혼의 갈증, 이 갈증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데서 오는 은혜의 결핍에서 오는 갈증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존재인데,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하고 그로부터 오는 은혜를 받아야만 만족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인데 아담의 범죄 이후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면서 모든 인간이 다 영혼의 갈증을 느낄 수밖에 없게 되었다.
히포(Hippo)의 주교였던 교부 어거스틴(Augustine)의 말대로, 인간의 내면에는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빈 공간이 있다. 그 공간은 인간의 힘으로는 채워지지 않는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우리 내면의 영적 갈증을 해결하실 수 있다. 왜냐하면 바로 그분이 십자가에서 화목제물로 죽으심으로써 단절되었던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영접한 자는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함은 물론 그 회복된 관계를 통해 ‘내면의 빈 공간’을 채울 수 있게 된 것이다.
묻는다. 세상이 좋아졌다고 갈증이 사라졌나? 아니지 않나? 세상이 풍요롭고 편리해진 것은 맞는다. 행정안전부가 발표한 ‘2023년 말 기준 주민등록 인구통계’에 따르면 70대 인구는 632만 명이고 20대는 620만 명 정도, 첫 역전 현상이 일어났다고 하는데 그만큼 수명이 늘어났다. 과거에는 불치병도 많았지만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더 많은 두려움, 더 큰 불안감을 가지고 사는 것도 사실이다. 자살자도 늘어나고 있다. 정신의 갈증 때문이다. 영적인 문제다. 사람들은 이 갈증을 피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지만 길은 하나밖에 없다. “내가 곧 길이니”(The way, Jesus).
어떤 사람들은 16세기 스페인 사람들처럼 돈으로 갈증을 없애려고 애쓰고 있지만 금이 그들의 갈증을 풀어주었나? 아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지식이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줄 알지만 지식으로 만족을 얻나? 아니다. 오히려 지식 때문에 정신세계에 이상이 생기고 더 큰 고민이 생기고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권력으로 정신적 갈증을 면해보려 하지만 권력은 인간의 갈증을 해결해주기는커녕 오히려 더 큰 갈증을 가져다줄 뿐이다.
누가 현대인들의 영적 갈증을 풀어줄까? 예수님밖에 없다. 주님은 목마른 자들을 향하여 담대히 초청하고 계신다. “내게로 와서 마시라” 손 내밀어 주님의 손을 잡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부족과 허물을 고백하고, 주님과 나 사이에 가로놓인 담을 허물어야 한다. 우리가 주님과 손잡으면 날마다가 새 힘으로 넘치는 삶이 될 것이다.
그런데 과거 광야 시절 백성에게 물을 내었던 그 반석은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었고, 나사렛 예수님이야말로 그들이 그동안 고대했던 바로 그 메시아셨지만, 유대인들은 생수의 근원이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초막절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은 제쳐놓은 채 자기들만의 축제를 즐기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다를까? 혹시 교회의 예배와 행사들이 말로는 예수님 중심이라 하면서 사람 중심이 되는 경우는 없나? 교회는 철저히 그리스도 중심이어야 한다. 사람 중심의 예배나 모임들이 일시적으로 즐겁고 흥겨운 분위기를 제공할지 몰라도 그런 모임은 사람들의 깊은 영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그저 연고 좀 바르는 정도일 뿐이다.
그래서 바울은 강력하게 권한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3:15-17).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이 말씀은 초청의 말씀인 동시에 믿는 자가 누리게 될 은혜에 대한 약속의 말씀, 갈증의 해결자이신 예수님의 초청이다(사55:1).
생수의 강을 약속하신 초청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38절), 생수의 강을 약속하신 초청이다.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온다’고 했는데 누구 배인가? 믿는 자의 배다. 생수의 강은 예수님으로부터 흘러나오지만 이 물은 이제 믿는 자의 각 심령 가운데서 또 하나의 강이 되어 흐른다는 것이다.
이사야도 예언했다.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사58:11). 우리 각 사람이 예수님처럼 생수를 흘러나오게 하는 존재가 된다는 말씀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배부른 존재만이 아니라 5천 명을 먹이는 사람, 세상을 살리는 생수, 복의 근원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아프리카에 물이 없는 강이 많듯이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들이 물 없는 강처럼 억지로 흘러가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안 된다. 푸르고 힘 있게 흐르고, 막힘이 없어야 한다. 억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노래하듯 즐겁게 흘러가야 한다. 물론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이 생수의 강을 예수 믿는 자가 받을 성령이라 했다(39절).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성령으로 우리는 물댄 동산이 되고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이 될 수 있다는 말씀, 성령은 우리 안에 내주하시면서 생수의 강이 되신다. 주님의 약속이다.
창세기에 보면 “강이 에덴에서 흘러 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창2:10)라고 했다. 에덴동산은 강이 흐르는 동산, 그 강이 전 세계에 물을 흘러보내는 네 강(비손, 기혼, 힛데겔, 유브라데)의 근원이 되었다. 에덴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신 완벽한 하나님 나라의 모형 아닌가? 에덴이 왜 완벽한 창조인가? 물이 흘러나와 세계를 비옥하게 하고 아름답게 하기 때문이다. 물이 흘러야 비옥하고 아름다운 땅을 이룰 수 있다. 우리의 심령도 마찬가지다. 물이 흘러야 에덴으로 변화될 수 있다.
감사한 것은 주님의 말씀 중 ‘마시라’와 ‘믿는 자’의 동사 시제는 모두 현재형이라는 것이다. ‘반복’과 ‘계속’의 상태를 나타낸다. 그러니까 마시되 한 번 마시는 것이 아니라 반복하여 계속 마시는 것,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신앙 고백한 이후에도 계속, 전인격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그런 믿음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지속적인 성령의 은혜를 누리며 다른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생수의 강이 되면 주변이 달라질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수원지로 부르셨다. 그 수원지가 오아시스, 그곳을 중심으로 마을이 서고 도시가 형성되는 것, 예수님은 생수의 강을 약속하며 우리를 부르셨다. 우리가 살려야 한다. 우리가 생명의 강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