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하나님의 선교 개념에서 고민해야 할 점들
1.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목적인가에 대한 고민
하나님의 선교 개념은 전통적인 교회 중심 선교의 한계점들을 교정하도록 도운 면이 있다. 특별히 인간이 선교의 주인인 양 행세하면서 이기적인 동기로 수행되는 선교, 업적 자랑식의 선교, 인적 물적 자원의 중복 투자와 같은 폐해를 막는데 기여한 면이 있다. 이러한 점들은 하나님의 선교의 주요한 강점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교 개념에서는 고민해야 할 점들도 많이 있다. 이 장에서는 그러한 문제점들을 고민해보고자 한다.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문제점은 하나님의 선교 신학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뜻이 과연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뜻과 부합하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앞장에서 분석하였듯이 출애굽 사건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세상의 샬롬이나 해방과 같은 것이기 보다는 오히려 온 땅이 하나님을 알고 경배하게 되는 선교적 목적과 깊은 연관성을 지닌다. 하나님의 가장 우선적인 관심은 하나님을 등지고 배반한 인간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일에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선교 개념에서 에큐메니칼 진영은 하나님의 뜻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경향이 없지 않는지를 고민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하나님의 뜻을 파악할 수 있을까?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기독’ 즉 그리스도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다는 의미에서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스탠리 그랜즈(Stanly Granz)는 “..... 궁극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과 본성에 관한 모든 신학적 진술들을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서 판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일은 오직 나사렛 예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즉 나사렛 예수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가장 명확하게 알 수 있다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예수의 가르침과 어긋난 것은 진정한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인간의 자의적인 해석이 될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6장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이후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는 백성들을 향하여 그들이 자신을 찾는 목적이 바로 “...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요 6: 26)이라고 은근히 책망하시면서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요 6: 27)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요 6:40)라고 말씀하심으로서 하나님의 주된 관심이 사람들로 하여금 영생을 얻게 하는 것임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 영생을 얻도록 하게 위하여 빈곤 문제 해결이나 정치적 해방의 방법이 아닌 십자가를 선택하셨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하나님의 선교 개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뜻이 과연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뜻의 핵심을 파악하고 있는 것인지 고민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2. 구조악 척결이나 샬롬이 구원의 본질인지에 대한 고민
하나님의 선교에서 강조하는 구조악의 척결이나 샬롬의 구현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고, 하나님의 구원이 충만하게 이루어질 때 나타나는 한 모습이 될 것이다. 또 구원받은 교회는 당연히 구원 받은 자로서 이 세상의 구조악 척결을 위해 투쟁해야 하고, 이 세상에 샬롬이 충만히 이루어지도록 헌신해야 할 것이다. 이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다만 이러한 것들이 구원의 본질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본질이란 “1. 사물을 그 자체이도록 하는 고유한 성질 2. 한 사물이나 과정에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보편적이고 변함없는 요소들의 총체”라 할 수 있다. 즉 본질이란 그것이 없으면 사물이나 개념이 성립되지 않는 핵심사항이다.
그렇다면 구원의 본질은 과연 무엇일까?
하나님의 선교 개념에서 상정하고 있는 구원의 개념에 의하면 북한이나 이슬람권에서 철저히 자유를 유린당하고 헐벗고 가난한 상태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구원을 받은 사람일까 못 받은 사람일까?
다른 한편으로 어떤 사람이 자유롭고 풍족한 삶을 살면서 아주 평안한 삶을 살고 있지만 예수를 믿지 않고 하나님께 아무런 관심이 없다면 그는 구원을 받은 사람일까 아닐까?
바울은 여전히 종의 상태에 있는 성도들에게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엡 6:5)고 권면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선교 개념으로 보면 종들은 구원을 받은 것이라 보기 어려운 면이 있다.
하나님의 선교 관점으로 본다면 출애굽에서 하나님은 바로를 무너뜨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시고, 풍족히 먹을 수 있는 양식과 인간다운 삶을 누리도록 복지도 마련해 주셔야 온전한 구원을 주신 것이 아닐까? 이스라엘을 광야로 이끌어 배고픔, 목마름, 추위와 더위, 뱀 등의 공격 등에 노출시키면서 고생시킨 것이 과연 하나님의 선교 개념에서 생각하는 전인적인 구원의 모델이 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선교 개념은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구원의 본질적인 차원과 비본질적인 차원을 섞어서 혼합되게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고민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구조악이 척결되고 샬롬이 넘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교회의 중요한 윤리적 과제임이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구조악이 척결되고 샬롬이 넘치기만 하면 그 사회를 구원받은 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점에서 보쉬는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에서 우리는 복음의 심각한 감소 및 변질을 접하게 된다.” 라는 분석을 내놓았고, 김은수는 “신앙의 이름으로 구원과 관련하여 하나의 정치적, 경제적 이데올로기를 제공할 위험이 있다” 고 분석한 바 있다.
3. 선교의 핵심 역군인 교회를 약화시킬 수 있는 잠재적 위험성에 대한 고민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며 용서받은 죄인들의 모임으로 심각한 오류와 한계점을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기본적으로 특정한 사람들을 택하시고 그들을 통하여 당신의 구원 역사를 이루어오셨고, 신약시대 이후로는 교회가 바로 그 택함 받은 무리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여전히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교 개념은 이 교회를 약화시킬 잠재적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 이유를 몇 가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의 선교 개념은 교회를 하나의 첨가물로 인식하면서 교회를 소홀히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교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중요하며, 교회가 아니어도 세상의 다양한 기구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선교를 이루어 가신다는 주장은 성도로 하여금 교회를 소중하게 여기고 헌신해야 할 마음을 약화시킬 가능성을 높인다. 이런 가능성에 대해서는 크리스토퍼 라이트도 주장한 바 있는데, “선교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주장은 선교가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의미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왜곡된 신학은 사실상 전도를 무시해 버렸으며, 그 결과 당연히 지속적인 비판을 받게 되었다.”라고 언급하였다.
또 하나님이 선교의 주역이며 교회는 단지 여러 기구들 중의 하나라는 관점은 교회를 구경꾼으로 전락시킬 위험성이 있다. 이런 점에 대해서 밴 엥겐(Van Engen)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개념을 강조한 후켄다이크의 견해를 평가하면서 이 견해는 교회를 “하나님의 행위에 박수를 보내는 구경꾼”으로 전락시키고 자연스럽게 “교회의 안락사”로 이어지게 된다고 분석한 바 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무언가를 중요하다고 생각할 때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고 거기에 헌신하게 된다. 하나님의 선교 개념에서처럼 세상이 더 중요하고 세상의 다양한 기구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선교를 이루신다고 하면 교회는 자연히 약화될 위험성이 커지는 것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선교 개념은 선교의 방향 자체를 다른 방향으로 전환시킨 측면이 있다. 전통적인 선교는 어찌하든지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쏟아 부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교 개념은 샬롬을 강조하면서 종교간 대화나 타종교를 품는 자세를 중시하고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전도가 약화된 측면이 없지 않다. 또한 구조악 척결을 강조하면서 개인 전도보다는 구조악 해결을 위한 정치적인 사역을 중시하고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전도가 약화된 측면이 없지 않다.
즉 하나님의 선교 개념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전도의 열기가 많이 약화된 것이다. 이러한 점에 대하여 종교사회학자인 이원규는 “... 사회구원에 초점을 맞추는 선교이해와 다원주의 신학을 수용한 자유주의 주류 교파들의 경우 교인이 급격히 감소하게 되었다. 복음의 진리를 전하려는 확신과 관심이 없기 때문에 선교정신이 자유주의 개신교 영역에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라고 분석하면서, 이러한 결과로 “... 1940-1985년에 그 멤버 숫자가 감리교는 48%, 장로교는 49%, 감독교회는 38%, 그리고 회중교는 56%나 감소하였다.”고 분석한 바 있다.
박근원은 비체돔의 하나님의 선교 저술을 번역한 책의 붙임말에 하나님의 선교라는 개념을 발전시켜온 비체돔에 대하여 “‘하나님의 선교’개념을 발전시켜 온 장본인 가운데 한 중요한 학자였으나 1960년대 후반에 세계교회협의회의 신학이 너무 급진적으로 사회화함을 염려한 나머지, 페터 바이에르하우스(Peter Beyerhaus)를 위시한 반에큐메니칼 복음주의 신학자들과 동조해서 ‘프랑크푸르트 신학선언’에 서명까지 했다..”는 점을 말한다. ‘하나님의 선교’ 라는 개념을 발전시킨 사람마저 하나님의 선교 개념이 잘못된 방향으로 오도되었음을 지적했다는 점은 깊이 고민해야 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셋째, 하나님의 선교는 세상을 섬기고 세상의 샬롬과 구조악 해결을 위한 모든 활동을 다 하나님이 수행하시는 선교로 포함시키는 포괄적인 선교 개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제한된 힘과 시간을 지닌 교회가 선교를 수행할 때 효율성의 저하를 가져올 가능성이 크다. 물론 전통적인 선교에서도 복음전도 외에 매우 다양한 사역들을 전개했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활동은 복음전도를 목표로 하여 진행되어왔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교는 세상의 샬롬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잘 살게 만드는 모든 일을 다 선교에 포함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와 같이 무한대로 폭이 넓어지는 선교 행태를 보면서 스티븐 닐(Stephen Neil)은 “모든 것이 선교면 아무 것도 선교가 아니다” 라는 말로 경고한 바 있다. 심지어 WCC 활동을 초창기부터 열심히 했던 레슬리 뉴비긴 (Lesslie Newbigin)의 자서전에도 “... WCC가 다원주의 경향으로 기울고 기독론 중심의 연합체에서 변질되는 것을 강하게 비판한다. 또한 복음과 그리스도의 대속적 십자가 사역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는 콘라드와 WCC는 원래 연합정신의 중심을 상실한 것이라고 질타한다.”고 쓰여 있다. 하나님의 선교 개념을 적극 수용하고 발전시킨 WCC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진리를 소홀히 하고 모든 종교들과의 평화로운 관계를 중시하고, 세상을 잘 살게 하는 모든 일을 선교에 포함시키면서 결국 교회의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깊이 고민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요약 및 전망
하나님의 선교 개념은 선교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교회의 잘못된 선교 자세와 방향을 갱신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개념이란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하지만 모든 약에는 부작용 또한 있듯이 하나님의 선교 개념 역시 고민해야 할 점들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특별히 하나님의 선교 개념에서 제시하는 하나님의 뜻이 과연 참으로 하나님의 뜻과 부합하는 것인지 깊이 고민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본 장에서는 하나님의 선교 개념에 영향을 준 해방신학에서 자주 인용되는 대표적인 말씀인 출애굽 사건을 분석하면서, 그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과 관심을 찾아보았다. 그 결과 출애굽 사건에 나타난 하나님의 관심은 단순한 이스라엘의 정치적 해방과 복지 등에 있기 보다는 오히려 1) 이스라엘, 애굽, 온 천하가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 2)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는 것, 3) 앞의 사항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 백성을 형성하는 것 등에 있음을 보게 되었다. 하나님의 선교에서 강조하는 정치적 해방과 온 피조물의 샬롬 등은 그리 중요한 하나님의 관심 사항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게 된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선교를 수용하고 추진할 때 교회는 현재 하나님의 선교에서 주장하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 과연 참으로 하나님의 뜻과 부합하는 것인지, 그리고 하나님의 선교가 추구하는 구원의 방향이 과연 성경이 말씀하는 구원의 본질과 맞는 것인지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할 때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늘 추구하고, 하나님께 절대적인 신뢰를 두고, 철저한 겸손 가운데 선교를 수행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정치적 해방과 복지에 우선순위를 두거나 복음전도와 동일선상에 두는 우를 범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는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을 늘 기억할 필요가 있다. 로잔이 하나님의 선교를 말할 때 이러한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은 로잔의 발전과 세계선교를 위해 매우 중요한 포인트가 될 것이다. (끝)
안승오(영남신학대학교 교수, 선교신학)
※ 자세한 각주 등은 안승오. 『로잔 운동의 좌표와 전망』. 서울: CLC, 2023. 참조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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