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복을 주신 것을 기쁘게 받는 것처럼, 허락하신 재앙도 기쁘게 받아야 한다는 욥의 말은 신앙의 길을 가는 우리들에게 큰 감동을 준다.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욥의 신앙은 하나님께 신실한 자임을 나타내고 있다. 욥은 하나님을 저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복이든지, 재앙이든지 모두 다 받아들였다.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길을 감시하면서 그분의 길을 감독할 수는 없다. 더구나 욥이 하나님께서 불의를 행하셨다고 말한 것은 하나님의 공의를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것이다. 아무리 의인으로 살았던 욥이라고 할지라도, 그가 받는 고난으로 인해 하나님의 주권과 공의를 부인하거나 의심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과거에는 의인이었지만, 그의 무례함과 교만함으로 인하여 죄인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우리는 끈기 있게 끝까지 참고 견디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욥이 끈기 있게 고난을 참아낸 이야기를 들었고, 또 주님께 서 그에게 어떤 결말을 주셨는지를 알고 있다. 말세에 고난을 맞을 우리도 욥의 인내를 배워야 한다. 주님께서 욥에게 베푸신 자비와 긍휼은 말세의 성도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약 5:11).
한기돈 –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이겨낸 욥 선지자
죄의 핵심은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죄는 ‘우리를 안으로 굽게 하는’ 힘이다. 북아프리카의 감독 성 아우구스티누스(Saint Augustine)의 말 에 따르면, 인류는 인쿠르바투스 인 세(incurvatus in se)의 상태에 있다. 즉 자신을 향해 안으로 굽어 있다. 이 증상은 아주 심각하다. 우 리의 물리적 눈은 위를 올려다볼 수 있지만, 우리의 영적 시각은 흔히 자신에게로 지독히 굽어 있다. 이렇듯 우리의 관심이 편협하게 자기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보니 사랑이 설 자리가 없다. 세상의 권세는 우리 힘으로만 극복하기에는 너무 강하다. 개인적 고투를 벌이든 사회적 문제를 다루려 하든, 권세는 너무나 강해서 하나님 없이는 정복할 수 없다. 궁극적으로 세상의 문제는 우리 행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해 해결된다. 우리는 거기에 소망을 둔다. 우리가 하는 어떤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이루신 일에 소망이 있다.
리치 빌로다스 – 하나님의 사랑, 우리를 빚다
구원은 지은 죄를 씻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그저 첫 창조의 자리와 지위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현실이라는 시공간 속에서 우리의 반응을 통해 원래 창조 목적, 즉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목적을 그 이상으로 이루는 것입니다. 노아 홍수와 바벨탑 사건 등 아담의 타락 이후에는 하나님에게서 분리되자 생긴 현실이 본격적으로 펼쳐집니다. 바로 죄의 결과, 죽음입니다. 창세기 5장에 등장하는 수많은 이들이 900세 가까이 살지만 결국은 모두 죽습니다. 아무리 오래 살았더라도 예외 없이 모두 죽습니다. 죄악이 세상에 만연하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같이 악할 뿐인 인류를 심판하시고 노아를 통해 제2의 인류를 만드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분리된 인간은 궁극적으로 회복될 수 없음이 바벨탑 사건에서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노아 홍수 때 심판으로 경고하셨을 뿐 아니라 노아 다음에 일어난 바벨탑 사건에서도 인류의 공멸을 적극적으로 막으십니다. 하나님께 대항하면 죽을 수밖에 없고 죽어 마땅한데도 인류를 흩을지언정 최종 심판을 행하지 않으십니다. 여기가 역사적 신앙의 관점에서 질문해야 하는 대목입니다.
박영선 – 박영선과 함께하는 구약 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