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학술원(원장 김영한 박사)이 16일 오후 서울 양재 온누리교회(담임 이재훈 목사) 화평홀에서 제100회 월례학술포럼을 ‘프로이트, 비판적 성찰’이라는 주제로 개최했다.
포럼은 경건회와 발표회 순으로 진행됐다. 경건회에선 오성종 교무부장(기독교학술원, 전 칼빈신학대학원장)의 사회로 류성렬 목사(새남교회 원로목사)가 ‘국가를 위하여’, 김흥식 목사(수사, 생명나무교회)가 ‘교회를 위하여’, 이영송 목사(수사, 서울예림교회)가 ‘북한 구원과 우크라이나 종전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각각 기도했다. 이어 이상원 목사(前 총신대 부총장, 샬롬나비 공동대표)가 ‘겉사람과 속사람’(고린도후서 4:16)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이어진 발표회는 김영한 원장의 사회로 진행됐으며 박종서 목사(양지평안교회, 기독교학 박사)와 서충원 교수(샬롬누리영광교회, 서울신학교 겸임교수)가 발표자로 나섰다.
발표에 앞서 개회사를 전한 김영한 원장은 “동성애 인권운동은 네모-마르크시즘의 ‘성 정치학’에서 연유한다. 포스트모던 사상의 시대적 분위기에 힘입어 동성애 운동은 소수자 인권운동이란 양의 탈을 쓰고 교묘히 자리를 잡았다. 오늘날 유행하는 네오-마르크시즘은은 마르크스 사상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이 결합되어 만들어졌다”며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19세기에 있어서 정신분석이론을 제시함으로써 사회적으로 금기시된 성 문제를 공론화시킨 자였다. 그에 의하면 인간이라면 누구나 기본적인 욕망이 있으며 그 욕망 중에 특히 성욕이 억압된다면 큰 문제가 야기되므로 억압된 욕망은 반드시 해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했다.
그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론의 한계점은 인간 마음을 생물학적 욕망의 메커니즘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 정신이 아닌 하나님의 형상성이라는 생물학적 본능에 해소될 수 없는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는데 있다. 그리하여 그의 이론은 인간 행동이 이러한 본능적이고 생물학적인 비이성적인 무의식이라는 내적인 욕망 메커니즘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무의식 결정론에 빠졌다는 점이다”며 “그는 특히 모든 인간 행동을 성욕으로 해석하려는 범성욕주의에 빠짐으로써 성욕과는 무관히 독자적으로 기능하는 인간 정신의 고유한 역할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기인한 유아 신경강박증으로 기독교의 신앙과 도덕을 왜곡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기인한 유아 신경강박증은 그가 만들어낸 심리학적 가설로서 범성욕주의적 사상의 산물에 불과하다. 프로이트는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 ‘좋음’이며 이를 억누르면 정신병 혹은 우울증이 발병함을 말함으로써 인간 정신병 내지 우울증이 영적 소외에서 기인함을 간과하고 있다”며 “프로이트가 주장한 억압된 성욕의 해방 개념은 사회적 좌절에 빠져있던 마르크스 진영에 돌파구를 주었다. 그가 주장한 개인의 성적 욕망 해소 차원을 집단적 차원으로 적용하여 사회적 차원에서 성적 욕망의 해방을 주장한 사람은 그의 제자이자 마르크스 주의자인 빌헬름 라이히였다”고 했다.
끝으로 김 원장은 “사도 유다는 유다서에서 오늘날 프로이트 사상에 지배되는 범성욕주의와 동성애 사상에 대해 미리 경고했다. 사도 유다는 소돔과 고모라가 문란한 성으로 멸망받은 것처럼 말세에 범성욕주의자들이 일어나 미혹하게 될 것을 경고하고 있다. 오늘날 성경적 신앙을 가진 신자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서 우리 자신을 경건과 성화 가운데서 지키며 사랑과 긍휼의 인내로써 범성욕주의와 동성애에 물든 자들을 잘못된 사상과 생활관습에서 구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어 박종서 목사가 ‘프로이트의 기독교 비판 정당한가?’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박 목사는 “프로이트의 종교비판에 대한 생각은 그의 치료실에서 내담자와의 은밀한 대화에서 싹트기 시작한다. 그는 특별히 자신의 강박적 환자를 통해서 ‘강박적 의례’가 갖는 의미를 탐색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그가 종교연구를 할 수 있는 매개가 되었다”며 “종교를 문화의 한 부분으로 봤던 그는 이러한 종교에 대한 연구가 그의 정신의학이 문명과 학문, 예술 등의 분야로 넘어서는 촉매가 되기도 한다. 그의 탐구는 지성계의 신대륙이었고 그는 이곳에 그냥 발을 올려놓지 않았다. 그는 새로운 무기, 정신분석적 도구를 들고 선착했고, 유리한 고지에서 환자의 정신세계뿐 아니라 문화 전반에 대한 뿌리와 근원을 찾아내는 일로 나아가게 된다”고 했다.
그는 “인간의 의식자체가 이미 환상으로 오염되어 있다는 그의 논점은 인간이 진리를 찾을 수 있고 스스로 삶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근대성의 기반에 가공할 일격을 가했고 인간지성의 엄청난 전환을 가져올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공격이 근대성의 ‘반기독교적 태도’를 바꾼 것은 아니었다. 그는 계몽주의에 충실한 사람으로써 기독교에 대해 더욱 정교한 공격을 가했다”며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바탕은 ‘유아성욕’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이다. 이후 더 깊은 연구와 정신분석적 도구들이 발견되지만 그것들 역시 이 두 축의 기초 위에 세워진다”고 했다.
박 목사는 “프로이트는 1907년 <강박행위와 종교행위>, 1912년 <토템과 터부>라는 논문을 저술했다. 강박신경증의 주된 증상은 같은 의례를 반복하는 것이었고, 프로이트는 이 반복의 의미를 탐구했다. 강박적 의례를 통해 환자는 자신의 내부의 무언가와 타협의식을 반복하는데 그는 이 의식이 종교 관례의 의례와 유사하다고 생각하며 <강박행위와 종교행위>를 저술했다”며 “저술한 후 5년이 지나면서 프로이트는 <강박행위와 종교행위>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를 시작하면서 <토템과 터부>를 저술했다. 이 글은 강박행위의 기원을 인류학적으로 밝혀내기 위한 것이지만, 결국 엄청난 양의 인류학적 문헌들을 동원하여 종교의 기원을 학문적으로 파헤치는 논문인 것”이라고 했다.
이어 “프로이트는 삶의 욕동(에로스), 죽음본능(공격본능)의 긴장에서 죄책감을 만들어지는데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죄책감에 가장 취약하고 이로 인해 계속 같은 의례를 지속적으로 반복하는 강박신경증환자라고 생각했다. 그는 생각하길 ’도대체 왜 같은 요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의식을 반복적으로 행하는가‘라는 의문을 가졌다. 그는 이것을 자신의 강박증 환자들이 반복적으로 행하는 의례와 동일한 것이라 생각했다”며 “왜 우리에게 같은 장소, 같은 사람, 같은 시간, 같은 내용이 반복될까? 그 이유는 변화라는 것이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부에 있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말씀을 손에 매고 미간에도 표를 했다. 문설주와 출입문 안과 밖으로 말씀으로 부착하고 반복하여 말씀을 암송했다. 이것을 지루하게 여기면 그 말씀은 부적이 된다”고 했다.
박 목사는 “프로이트는 계몽주의 철학의 현대적 상속자로서 과학적 통찰을 이용해 정신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도 과학의 직무 가운데 하나라고 믿었던 자였다. 그는 과학에 대해서만 낙관적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성에 대해서도 낙관적으로 생각했다. 그는 리비도 발달에서 파생된 공격본능에서 죽음본능이라는 독립된 실체를 눈치채고도 더 이상 개진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모세와 유일신교>에서 본능 충동의 단념을 통해 자아가 고양되고 정신성이 진보를 이룩한 것이 유대교라고 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서구 문명은 히브리사상과 헬라사상의 큰 흐름 안에 있다. 두 흐름은 대극의 관계 또는 면증의 관계를 갖는다. 어떻게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신학의 성격과 시대의 성격이 드러난다. 프로이트는 갈등 없이 19~20세기의 시류에 따라 히브리인이면서 그리스 사상의 편에 섰다. 그의 학문의 모델이 된 오이디푸스는 욕망을 추구하기 보다는 앎을 추구하는 자였다. 어떠한 기만도 용납하지 않는, 심지어 무의식중에 저지른 무서운 행위도 백일하에 드러냈다. 이것은 근대 계몽주의 사상과 일치한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탁월한 지성을 가진 덕분에 전혀 예측 못했던 지식의 재난에 휩쓸려 버린다. 프로이트의 삶은 이것과 비슷했다”고 했다.
끝으로 박 목사는 “오이디푸스는 죄책감으로 장님이 되어 방황의 길을 갔다. 프로이트 역시 자신의 영적인 눈을 찌르고 오이디푸스의 길을 고집했다. 그는 어떤 권위에도 굴복하지 않는 프로메테우스의 비극적 영웅의 길을 간 것이다. 그는 오이디푸스로서 부친 살해(기존의 문명과 학문 및 종교)감행 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비국의 주인공이었다. 그가 유대인으로써 그리스 문명으로 내려와 성육신했다면 평가 또한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 문명으로 히브리 문명을 거부했다”며 “기독교 경건주의 신앙은 ’영과 육을 나누고 이승에서 저승으로 도망가게 하는 오르페우스 신화‘와 비슷하다. 이것에 비하면 오히려 비극신화가 기독교에 더 가까운 희망적인 불신앙이다”고 했다.
이어 서충원 교수가 ‘프로이트의 기독교 본질의 오해와 왜곡’이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서 교수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심리치료에 적용될 때 수많은 사람을 고통에서 건져주었다. 정신분석은 환자들에게 억압에서 풀어주는 공감적 환경을 제공함으로 감춰진 심리 내면의 진실에 직면하게 했다. 그리고 부당한 억압에서 나오게 하고 또 과도한 것은 적절히 제어하도록 도와 정상적인 생활을 가능하게 했다”고 했다.
그는 “프로이트의 심리학적 통찰은 인간에 대한 이해를 깊고 넒게 해 주었다. 그의 기독교 비판도 현실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병든 정서와 병든 신앙을 점검하게 만드는 긍정적인 역할을 해왔다. 기독교 신앙은 신경증자들을 낳는 경우가 있다. 하나님은 두려운 심판자를 보고 그를 만족시키려는 것이 원인이다. 이 때 하나님은 사실상 억압하는 아버지와 같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은 정신분석적으로 볼 때 건강하지 못한 정서를 지니고 있고 그것을 왜곡된 신학으로 정당화 하고 있다”고 했다.
서 교수는 “개신교회는 가톨릭보다 더 이원론적인 요소가 많고 유아적 환상에 머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신자들 중에 이런 병증을 드러내는 것을 인정하고, 그런 경향이 기독교 안에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프로이트의 유아성에 대한 비판, 초자아 비판은 수용해야 할 부분이 많다”며 “보이는 교회나 신자들에 대한 프로이트의 비판은 경청하고 수용할 부분이 많지만, 그가 성경에서 말하는 기독교 진리 자체를 신경증적이고 유아적인 환상르로 보는 것은 심각한 오해와 왜곡이다”고 했다.
이어 “프로이트는 병든 기독교, 진리에서 이탈한 영성을 보고서 그것을 기독교 신앙과 동일시하여 기독교에서 벗어나는 것이 현대 서구문명이 처한 위기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는 아주 왜곡된 결론에 이르렀다. 그는 신경증자의 유아성과 진정한 영성의 본질로서의 유아성을 혼동했다. 그는 초자아의 억압으로서의 죄책감과 도덕성의 증거로서의 죄책감을 혼동했다. 그는 문명에 역기능적 역할을 한 기독교 도덕과 진정한 문명의 토대로서의 기독교 도덕을 혼동했다. 프로이트의 이런 왜곡이 단지 아마추어의 기독교 이해에 그친다면 이를 심각하게 다룰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가 탁월한 사상가로 인정되고 있어 기독교적인 서구문명을 파괴하는 데 크게 일조하고 있다는 데 있다”고 했다.
서 교수는 “프로이트의 무신론과 유물론적 인간론은 현대 포스트모더니즘의 도덕폐기론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음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기독교는 진리는 독점하지 않는다. 우리는 성경진리를 수호한다는 이유로 무신론적 세속 이론들을 다 부정해서는 안 된다. 프로이트의 과학적인 인간 이해에는 우리가 경청하고 교회에 적용해야 할 일반 은총의 진리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철저히 성경의 계시에 바탕을 두고 사고해야 한다. 성경의 기준을 넘어설 어떤 이성적인 경험적인 논리는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프로이트의 무신론적인 철학은 문명의 토대에 대한 도덕적, 영적 공격이다. 영적인 공격에 대항하려면 먼저 교회가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하고 거룩해야 한다. 우리의 도덕성이 신경증적인 초자아의 산물이 아니라 깊은 영성의 산물임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르는 교회 외에는 문명을 바르게 보존할 기관은 없다. 교회는 세상의 빛이고 세상의 희망이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