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 속에 컴퓨터 칩? 현대 과학과 기독교적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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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론 머스크가 쏘아 올린 포스트휴먼 시대(上)
조덕영 박사

뇌도 일종의 세포다. 인간은 대략 1천억 개가 넘는 뇌 뉴런(신경세포)을 가지고 태어난다. 태양계가 속한 우리 은하의 별 숫자가 대략 1천억 개이니 뇌 신경세포 1천억이 얼마나 큰 숫자인지 알 수 있다. 임신 9개월 동안 태아는 획득한(?) 정보를 뚜렷한 목적성을 가지고 초당 평균 5천 개 가까운 신경세포를 쉬지 않고 만들어내는 셈이다. 이 뇌 세포가 인간의 인격(지성과 감정과 의지)과 행동 등 다양한 기능을 담당한다.

19세기 후반 무신론적, 과학적 유물론이 태동한 이후 뇌도 결국은 물질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유물론적 세계관이 세속 과학을 지배하게 되었다. 인간도 결국 물질에 불과하니 생명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다는 사상이 싹튼 것은 당연하다. 나치나 공산주의자들이 신앙인들과 달리 생명을 함부로 다루면서도 도덕적 죄책감이나 망설임이 없었던 것도 바로 그 세계관적 다름에 있다.

여느 세포들처럼 100,000,000,000,000(100조) 개에 달하는 우리 몸의 다른 세포들처럼 뇌 신경세포도 DNA를 비롯한 유사한 물질들로 채워져 있다. 그러니 뇌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무신론적 세계관 속에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 인류는 한 종류의 세포도 창조해내지 못하고 있다. 세포가 우연의 산물이라면 만물의 영장 인간이 자연계나 실험실에서 세포 하나 합성해내지 못한다는 게 더 미스터리다. 수만 종 고분자화합물의 생화학적 단백질 대사를 이끄는 DNA도 미스터리이나 마음과 생각과 지적 반응과 물리적 반응을 자유자재로 해내는 뇌의 신묘막측함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하지만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이니 인류는 세포를 적당히 변형하는 재주만큼은 탁월하다.

이 같은 우려는 현실이 되고 있다. 트랜스휴먼, 포스트휴먼의 길을 예견한 인물 중 한 사람인 옥스퍼드의 과학철학자 닉 보스트롬은 인류는 생물학적 시스템이 도달할 수 있는 인지 능력의 가장 꼭대기에 다다랐다고 볼 수 없고, 오히려 우리 인류는 생물종들 중 가장 똑똑한 것이 아니라 기술문명을 이룩할 정도의 지능에 도달한 존재들 가운데 가장 멍청한 생물종(the stupidest possible biological species)이라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했다. 닉 보스트롬의 <슈퍼인텔리전스>가 나온 지 이미 10년이 되었으니, 현생 인류(호모 사피엔스)가 더 이상 인간 종(種)을 대변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히 변화된 새로운 존재로 변이할 것임을 일찌감치 선포한 것이다.

최근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인간 뇌에 컴퓨터 칩을 이식하는 임상을 시작했다고 밝힌 것도 그런 일련의 과정에서 충분히 예견된 일이다.

머스크는 1월 29일 소셜미디어 엑스(X)에서 첫 번째 임상환자의 뇌에 이식물(임플란트)가 심어져 초기 결과에서 긍정적인 뉴런 스파이크(신경세포인 뉴런이 뇌와 신체에 보내는 전기·화학적 신호)가 탐지되었다고 밝혔다. 앞으로 생각만으로 휴대폰이나 컴퓨터, 모든 기기를 제어할 수 있으며, 팔다리를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초기 사용자가 될 수 있는 길을 연 것으로 볼 수 있다.

머스크의 Neuralink는 2016년 설립되었으며, 뇌에 전자 칩을 이식해 컴퓨터와 연결하는 '뇌 임플란트'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다. 일론 머스크는 수술 후 환자의 회복 상태가 원활하며, 뇌로부터의 신호 검출 결과도 유망하다고 설명했다.

Neuralink의 임상 시험 장치는 인간의 머리카락보다 얇은 64개의 실에 붙여진 1,024개의 전극을 통해 뇌 신경의 활동을 읽어낸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임상시험과 관련하여 뇌 임플란트에 탑재된 리튬 배터리와 전선의 유해성, 장치 제거 과정에서의 뇌 손상 가능성 등을 우려하고 있다. 뉴럴링크의 동물 임상 과정에서는 마비, 발작, 뇌부종 등의 현상이 나타났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닉 보스트롬도 이미 10년 전 책에서 전극(electrode)을 뇌에 이식하였을 때 감염, 전극의 위치 이탈, 내출혈, 인지력 감퇴 등이 우려된다고 했다. 다만 뇌와 정보를 주고받지 않고 전류로 자극만 주는 파킨슨병 환자에게 행해지는 임플란트는 일부 효과를 줄 수 있다고 보았다.

이번 첫 번째 임상시험으로 인해 Neuralink의 뇌 임플란트 기술의 가능성이 더욱 크게 주목받고 있다. 이 기술이 성공하면 신체적인 제약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 혁신적인 솔루션을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곧이어 중국에서도 유사한 연구를 진행 중인 것으로 드러났다. 생명의 윤리·도덕적 성찰에 관심이 별로 없는 유물론적 세계관을 지닌 중국이 다양한 생명 조작 실험을 발 빠르게 시도하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지난 2월 1일 중국 칭화대 연구진은 지난달 30일 회사 홈페이지와 중국 소셜미디어(SNS) 위챗 계정을 통해 ‘무선 뇌-컴퓨터 인터페이스(Brain-Computer Interface·BCI) 임플란트’인 ‘신경 전자 기회’(Neural Electronic Opportunity·NEO)를 개발해 첫 환자에게 이식한 결과 획기적인 진전을 이뤘다고 발표했다.

중국 연구진의 이번 발표는 머스크가 X(구 트위터)를 통해 자신이 소유한 뇌신경화학 스타트업 뉴럴링크가 인간의 뇌에 컴퓨터 칩을 이식하는 임상을 시작했다고 밝힌 지 겨우 8시간 만이다.

베리칩 666 소동 이후 새로운 666 이슈(?)를 찾고 있던 시한부종말론자들에게 또 다른 먹거리(?)가 되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기도 한다. 이번에는 손에 시술하는 베리칩이 아니라 이마 속에 시술하니 조금은 어색하게 신용카드나 컴퓨터나 스마트폰에게 적용하던 과거 시한부종말론 입장에서는 정교한 종말 중의 종말 계시가 시작되었다고 외칠 가능성이 있다.

성경해석만 그런 건 아니다. 과학 기술도 늘 오류를 바탕으로 발전되어왔다. 자연 과학은 그 출발 자체가 오류투성이였다.

자연 과학은 이오니아 밀레투스에서 시작된 자연 철학이 그 기원이다. 철학의 3대 원조, 물을 만물의 기원으로 본 탈레스(일식 예측)와 공기가 만물 기원으로 본 아낙시메네스(월식 예측) 그리고 원시 진화론을 착안한 아낙시만드로스(apeiron무한정자 이론)가 모두 밀레투스를 기반으로 자연 철학을 전개하였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을 호출(행 20장 참조)했던 철학자의 고향 밀레투스 풍경

수학 철학자 피타고라스나 코페르니쿠스보다 2천 년 전 지구의 움직임을 계산했던 아리스타르코스의 고향도 밀레투스 건너 같은 이오니아 지역의 사모스섬이었다. 과학자 뉴턴이 자신의 명저 <프린키피아>를 <자연 철학의 수학적 기원>이라 한 것도 자연 철학이 본격적인 자연 과학으로 자연스럽게 이첩되는 과정이었다 할 수 있다.

사모스 섬 피타고리오 항구의 사모스 출신 피타고라스 기념 조형물

자연 과학이 오류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아직 그 복잡미묘한 인간 두뇌를 실험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쳐야 할 것인지 일부 두려움마저 들기도 한다. 단세포조차 갖추지 못한 코로나19 바이러스 한 종류도 제어하지 못한 인간의 부족함을 인류는 체험했기에 더욱 그러하다.

포스트휴먼 시대를 예견한 닉 보스트룸조차 일부 의학적 도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의학적 부작용뿐 아니라 인간의 탐욕을 위한 시술(지능 향상을 위한 시술 등)은 단순한 치료 목적과 다른 훨씬 더 난해한 영역임을 숨기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 기술의 발달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영역으로 인류를 끌고 가고 있다.

세속 과학의 영역이 원리와 법칙과 실용을 좇다보면 가치의 문제가 불거지고 반드시 윤리적 문제와도 부딪히게 된다. 그렇다고 위험한 연구를 무조건 통제하거나 막으려 하지 않으며 막을 수도 없는 것이 오늘날 현실이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현대 과학도 연구가 눈덩이처럼 커져서 엄청난 모멘텀(momentom)을 가지기 전에 그 초기 단계에서 가능한 미래의 위험이나 부작용을 걸러내기 위해 사전 경고를 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기 시작했다.

로런스(William. W. Lowrance)는 ⌜현대 과학과 인류 가치⌟( Modern Science and Human Values)에 대한 논의에서 (1) 사회적 가치는 과학에서만 유도될 수 없으며 (2) 지식은 선과 악에 다 쓰일 수 있으나 가치 중립적(value free)이지 못하며 (3) 새로운 지식이 나타날 때 그것의 쓰임새에 주목해야 하며 (4) 기술 활동이 기술자들의 활동에 영향을 미치고 대중의 삶에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가치 의존적이며 (5) 기술 전문가들은 대중의 입장에서 대중을 위해 결정을 내려야 하며 (6) 과학이 문화적 전망을 바꾸거나 인간의 마음과 육체와, 우주, 인간 사회의 관념을 바꾸어버리거나 서로 다른 대안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한다는 점에서 우리 인류의 세계관적 판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보고 이들 여섯 가지 명제를 정리하였다.

로런스는 현대 과학이 필연적으로 가치의 문제와 부딪히게 마련임을 잘 간파하고 있다. 여기서 윤리적 논쟁이 반드시 싹트게 된다. 특별히 종교와의 긴장이 당연히 대두되는데, 종교든 윤리든 그 기조에는 정의가 있기 때문이다.

레스닉(David Resnik)은 자신의 12가지 과학 윤리 강령에서 과학자들이 자신들의 연구의 사회적 결과를 판단하고 대중에게 그 결과를 알리고 이 결과가 해롭다고 판단될 때에는 연구를 중단해야 하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세속 윤리학자나 과학철학자들 사이에서도 과학의 윤리 문제는 가치 중립(value free)적일 수 없음을 분명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 우리 기독교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보아야 할까? 기독교의 경우 그 정의가 기독교 종교 행위로 나타나고 그것은 성경의 윤리 사상으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 성서와 과학과 윤리는 삼두마차처럼 분리되어 생각할 수 없다.

필자는 이 부분에 대해 몇 가지 신앙적 관점을 살펴보려 한다. (계속)

조덕영 박사의 창조신학(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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