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라 너는 이 백성에게 전하라 하셨느니라 이 성읍에 사는 자는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으려니와 너희를 에워싼 갈대아인에게 나가서 항복하는 자는 살 것이나 그의 목숨은 전리품 같이 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얼굴을 이 성읍으로 향함은 복을 내리기 위함이 아니요 화를 내리기 위함이라 이 성읍이 바벨론 왕의 손에 넘김이 될 것이요 그는 그것을 불사르리라.” (렘21:8-10)
전리품이 된 유다 왕국 사람들
예레미야는 남 왕국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하기까지의 마지막 다섯 왕을 섬긴 선지자입니다. 따라서 예레미야서를 읽을 때는 어느 시대의 누구에게 어떤 내용으로 예언한 것인지 먼저 잘 살펴봐야 합니다. 본문이 속한 21장은 마지막 다섯 번째 시드기야 왕에게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한 내용으로 BC 586년에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둘을 두었다는 여호와의 말씀을 대언했습니다.(8절) 자칫 오해해선 안 됩니다. 둘 중에 생명의 길을 선택한다고 해서 ‘유다 왕국’이 구원 받아 멸망을 면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단순히 바벨론에게 ‘항복하는 사람들’의 목숨만 겨우 부지하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9절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항복하는 자는 살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목숨은 전리품(戰利品) 같이” 된다고 합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나라가 제 멋대로 약탈한 것이 전리품입니다. 여자는 처녀 유부녀 구분 없이 첩으로 혹은 종으로 팔립니다. 건장한 남자는 죽이거나 노예로 부립니다.
항복한 유다 사람의 앞날은 전적으로 승전국민의 재량에 달렸습니다. 그들의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은 정복자 느부갓네살 왕에게 완전히 일임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인간들의 왕인 그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역할을 대신하는 꼴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항복한다고 해서 즉, 하나님이 말씀하신 생명의 길을 택한다고 해서 일상적인 삶은 물론 목숨을 건질 수 있다는 보장도 사실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항복하지 않으면 그보다 훨씬 더 비참하고 잔인한 결과를 맞는다는 것입니다. 전부 죽을 수도 있습니다. 현실적으로는 둘 다 망하는 길인데 그 정도의 차이만 다르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 종, 노예, 첩으로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니 감사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그마저 이스라엘에게 과분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유다 왕국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멸망 혹은 구원 둘 중의 하나가 아닙니다. 유다에 대한 기대는 완전히 접고 돌이킬 수 없는 심판만 남았을 뿐입니다. 형벌의 고통이 적은 것을 택할 수 있다는 것이 그 백성들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자 위안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진노가 극에 달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명백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내가 나의 얼굴을 이 성읍으로 향함은 복을 내리기 위함이 아니요 화를 내리기 위함이라.”(10절) 복을 내리지 않고 화만 내린다고 합니다. 분노의 심판은 확정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확정하신 뜻은 어떤 인간도 돌이킬 수 없습니다.
지극한 분노는 지극한 사랑이다
예레미야가 어떤 경위로 이 예언을 하게 되었습니까? 시드기야 왕이 느부갓네살이 침공한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그에게 보내어 여호와께 기도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시면 느부갓네살이 떠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습니다.(1,2절)
그러나 하나님은 “친히 너희를”(5절) 즉, 바벨론 침략군이 아니라 유다를 치실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주목할 것은 진노, 분노, 대노라고 화를 낸다는 동일한 의미의 단어를 세 번이나 사용했습니다. 히브리어는 비교급 최상급 표현이 없기에 두 번 강조하면 비교급, 세 번 강조하면 최상급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최고조에 달한 것입니다.
그래서 7절 후반부에는 측은히, 긍휼히, 불쌍히 여기지 아니할 것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분노와 반대되는 단어를 사용한 동일한 어법으로 당신의 인내의 한계가 차서 단 한 치의 긍휼을 베풀 여지도 없다는 뜻입니다. 어폐가 있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동정심을 아무리 짜내려 했지만 도무지 분을 참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내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서 사르리니 능히 끌 자가 없으리라.”(12절) 하나님의 심판을 어느 누가 끌 수 있다는 말입니까? 예레미야 같은 신실한 선지자의 눈물어린 기도도 더 이상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이제 곧 느부갓네살 왕은 개인적 탐욕과 잔인한 성격대로 마음껏 유다를 유린할 것입니다. 지금 그 배경에 하나님이 그를 도구로 사용하신, 최소한 묵인하신 뜻이 있다고 성경은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는 엄청난 내용입니다. 이런 심판을 사실은 바벨론에게 내려야 합당하지 않습니까? 비록 유다가 가나안의 우상들도 숭배했지만 어쨌든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믿었고 따랐습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제사도 지냈습니다. 지금도 왕이 선지자에게 신탁의 기도를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반면에 바벨론은 온갖 우상을 음란하게 숭배했고 죄악으로 타락한 양상은 유다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훨씬 더 심했지 않습니까?
신자들은 오늘 본문 앞에, 아니 엄위하신 하나님 앞에 항상 두렵고 떨리는 자세로 서야 합니다. 하나님이 관심을 두고 사랑하여 구원해주는 대상은 가장 먼저 신자들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그분의 분노에 찬 징계와 심판도 신자가 그 일차적인 대상이 됩니다. 지극히 사랑하는 대상이 잘못을 범하면 지극히 분노하게 됩니다.
유다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면서도 우상을 동시에 숭배했습니다. 하나님과 돈이라는 두 주인을 모셨습니다. 본 남편을 두고 밖에 나가서 지속적으로 바람을 피웠습니다. 남편이 그러지 말라고 계속 경고했습니다. 회개하고 돌아오기만 하면 지난 모든 과오를 없었던 것으로 치고 용서해주겠다는데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더러 오직 당신만 주인으로 삼으라고 명합니다. 당신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십계명의 첫째 계명만 제대로 순종하면 다른 모든 것들은 책임져 주신다고 약속합니다. 선악과와 십계명과 예수님의 십자가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입니다.
요한계시록이 예고하는 마지막 때의 대환난에서도 즉, 적그리스도가 오늘 본문의 느부갓네살 왕보다 더 극심한 고통을 가할 상황에서도 유일한 구원의 기준이 됩니다. 성경 66권이 말하는 메시지의 핵심 아니 전부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만을 주인으로 삼으라는 너무나 간단하고도 당연한 계명을 어기는 바람에 바벨론의 전리품이 되었습니다. 이제 느부갓네살 왕을 하나님 대신에 자신들의 주인으로 모셔야할 판국이 되었습니다. 시드기야 왕 당대의 잘못 때문만이 결코 아닙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이스라엘에게 선포하고 백성들도 피 뿌림의 제사로써 순종 준행할 것을 서약한(출24:1-8) 후로 천년 동안이나 참고 참았던 분노가 결국은 불 같이 터진 것입니다.
지나간 버스, 손 흔들지 말라
본문의 내용을 한마디로 쉽게 비유하자면 “버스 지나간 뒤에 손 흔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시드기야 왕은 예레미야에게 이미 때늦은 기도를 부탁한 것입니다. 어떤 응답도 있을 수 없습니다. 단지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기도보다는 도리어 어떻게든 목숨만이라도 부지할 현실적인 궁리부터 했어야 합니다.
지금 시드기야와 이스라엘을 탓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가 비슷한 잘못과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과연 돈과 하나님 둘 중에 철두철미하게 하나님만 주인으로 삼고 살고 있습니까? 당장 저부터 예라고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합니다.
그나마 다행이고 감사할 것은 맡은 일이 매일 성경을 보고 연구해야 하고 교회사역을 감당해야 하므로 아무래도 회개하고 고칠 수 있는 기회가 자연적으로 생깁니다. 정말로 목사가 된 것은 저희 교회의 교인들보다 저에게 너무나 큰 은혜요 주님이 베푸신 긍휼입니다.
물론 우리 모두는 연약하고 죄의 본성이 살아 있어 수시로 넘어질 수밖에 없고 한 발은 교회에 다른 한 발은 세상에 둘 때도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범하는 더 큰 잘못은 문제는 자기가 일으켜 놓고서 기도만으로 해결하려 든다는, 바꿔 말해 하나님더러 책임지고 뒤치다꺼리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본문 같이 때늦은 기도가 우리 기도의 대부분이라는 뜻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을 해결사나 수호천사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신자들을 환난에서 건져주시고 어떤 어려움에 처해 있는지 이미 다 아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겪는 문제와 고난의 대부분은 그분과는 아무 관계가 없이 신자 쪽에 원인이 있습니다. 우리의 판단이나 계획의 착오이고 성실하게 일을 진행시키지 못한 탓이 큽니다. 질병도 평소의 잘못된 생활습관 때문입니다.
정말로 우리 죄 때문에 하나님이 징계하신 것이라면 지금 당장 건져달라고 기도하기 이전에 감수해야 합니다. 또 우리의 성장을 위한 연단이라면 인내와 소망으로 끝까지 잘 견뎌내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분별하여서 정금 같은 믿음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만약 흑암의 세력의 유혹과 시험이라면 피 흘리기까지 그 죄악과 싸워 이겨야 합니다. 세상과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말고 담대하게 맞서야 합니다.
여기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열두 사도와 스데반과 바울 등의 예에서 보듯이 그분의 일에 순종해도 순교로 이끌 수 있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이 세상에선 완전한 실패이자 멸망당한 셈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져서 그분만 영광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꾼으로서 귀하고도 막중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느부갓네살이 이스라엘을 전리품으로 삼아 갖고 놀았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선 그는 하나님의 전리품으로서 영원한 형벌의 멸망에 처해졌습니다. 열두 사도와 스데반과 바울 등은 세상 대적의 전리품으로 고통스런 죽음을 당했지만 영원한 구원을 얻고서 하나님 보좌 앞에 앉을 수 있는 엄청난 영광을 누렸습니다.
엄밀히 말해 신자에게 때늦은 기도란 사실상 없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문제와 고난의 정확한 원인을 미처 알 수 있을 만큼 영적인 분별력이 우리에겐 없습니다. 언제든지 죄와 허물이 생각날 때마다 주님 앞에 항복하고 회개의 기도를 하면 가장 빠른 기도가 됩니다. 그 전에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던 돈 대신에 하나님 한분만 전적으로 의지하면 버스 지나고 손 흔들어야 하는 그런 일들은 생기지도 않습니다.
2018/10/6
* 이 글은 미국 남침례교단 소속 박진호 목사(멤피스커비우즈한인교회 담임)가 그의 웹페이지(www.whyjesusonly.com)에 올린 것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맨 아래 숫자는 글이 박 목사의 웹페이지에 공개된 날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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