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조용기목사의 한국현대사에 미친 기여
1. 조용기목사가 한국사회에 미친 기여
해방후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건국과 수호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리고 그 이후 박정희와 그의 후예들은 1980년대까지 경제성장을 가져왔다. 그 다음에 등장한 김영삼과 김대중은 소위 민주화에 기여했다. 조용기목사의 주요 사역은 박정희와 그의 후예들이 일으킨 산업화시대에 이루어졌다. 이 당시 박정희의 정치, 정주영의 경제와 더불어 조용기의 종교가 한국사회를 이끌어 가는 중심 축이었다고 생각한다. 박정희, 정주용, 조용기는 가난에서 벗이서 우리 한번 잘살아 보자라는 시대적인 욕구에 맞추어서 이 시대를 이끌어 간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한 사회의 발전은 정신적인 변화가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조용기목사가 미친 영향을 우리는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조용기목사는 한국문화에 숨겨진 기(氣)를 회복시켰다. 우리 한국인들은 원래 흥이 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민족이다. 하지만 이런 기는 유교의 예의에 의해서, 불교의 고행에 의해서, 일제의 억압에 의해서 눌려왔다. 하지만 해방 이후 조용기목사의 부흥운동은 한국인의 죽어있던 기를 살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사라졌던 한국의 기는 전국에서 열리는 부흥집회를 통하여 다시 살아났고, 이것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둘째, 조용기목사는 오늘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을 자신의 중심과제로 생각했다. 조용기목사는 영생복락을 원하는 기독교의 근본진리를 분명하게 붙잡으면서 동시에 이 땅에서 천국을 맛보게 한다는 새로운 과제를 설정하였다. 그의 오중복음과 3박자 축북은 바로 이런 특징을 갖는 것이다. 조용기목사는 내세를 기다리는 신앙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는 삶을 강조하였다.
셋째, 조용기목사는 적극적인 사고를 강조하여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하였다. 조용기목사는 미국의 오순절운동과 빈센트 필과 같은 부흥사들의 영향을 받아서 한국인들에게 적극적인 사고를 전파하였다. 그는 항상 부정적인 측면을 바라보기 보다는 긍정적인 측면을 바라보도록 하였고, 이것은 그의 유명한 4차원의 영성을 만들었다. 이런 적극적인 사고는 어려움 가운데서도 한국인들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넷째, 조용기목사는 부를 죄악시했던 과거의 종교와는 달리 부를 긍정적으로 이해했으며, 이것은 해방 이후 산업사회에서 한국을 경제대국으로 만드는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중세 천주교는 부를 부정적으로 생각하였다. 한국의 전통적인 종교 역시 부를 부정적으로 생각하였다. 하지만 조용기목사는 부를 하나님이 주신 축복으로 이해했고, 이것을 과감하게 선포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부를 추구하는 것은 수치가 아니게 되었고, 강력한 경제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부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없었다면 오늘의 산업화나 경제성장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조용기목사는 해방과 6.25 이후 한국사회를 향한 예언자였다. 그는 단순히 과거의 메시지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상황에 맞추어 그 시대가 필요로 하는 메시지를 전했다. 미국의 인류학자 월러스는 전통적인 메시지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의미가 없어졌을 때 예언자는 기존의 메시지를 새로운 상황에서 재해석하여 새롭게 전하는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조용기목사는 1960년대부터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와 사회를 위해서 이런 일을 감당하였다.
2. 조용기목사가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
해방 후,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 조용기목사는 한국 개신교의 지형을 바꾸어 놓았다. 지금까지 한국 기독교는 장로교의 주도하에 감리교가 협조하는 체재였고, 그 밖에 성결교회가 있었고, 다른 교단의 존재는 미미했다. 해방 후 이같은 한국교회에 순복음교회와 침례교가 등장하였고, 특별히 순복음교회는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존재로 인해서 한국 기독교의 중심으로 부상하였다. 해방 이후 한국기독교 지형의 가장 중요한 변화는 순복음교회의 등장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조용기목사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조용기목사의 무엇이 한국교회에 영향을 미쳤는가?
첫째, 성경의 새로운 해석이다. 실은 조용기목사 이전에도 한국에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이라는 사중복음이 성결교회를 중심으로 전해졌다. 조용기목사는 여기에 성령세례로서의 방언과 축복의 메시지를 합하여 오중복음을 만들어서 한국사회에 전했다. 사실 그 이전에 방언은 한국기독교의 보편적인 은사가 아니었고, 축복은 비록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말씀이지만 공식적으로 강조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조용기목사의 5중복음이 소개된 이후 축복은 한국교회의 송식 메시지가 되었고, 방언은 한국신자들의 보편적인 은사가 되었다.
둘째, 대형교회의 등장이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세계 최대의 교회이다. 한국에는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이어서 수많은 대형교회들이 있다. 조용기목사의 목회성공은 수많은 목회자들에게 하나의 모델로 생각되었으며, 그리하여 많은 대형교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사실 대형교회는 도시화의 산물이다. 산업화로 도시에 인구가 밀려들었고, 교통의 편리로 거리를 불문하고 사람들이 교회에 출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대형교회는 신자들의 각종 영적 욕구를 채워줄 능력이 있게 되었다. 아울러서 대형교회는 기존의 교파시스템을 바꾸고 있다. 물론 형식적으로는 교파가 존재하지만 실질적으로 한국교회를 움직이는 힘은 대형교회에서 나오고 있다. 따라서 대형교회의 등장은 한국교회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셋째, 각종 소그릅의 활성화이다. 많은 사람들은 대형교회가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파괴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조용기목사는 한편으로는 대형교회를 추구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소그룹의 활성화를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였다. 여의도순복음교회에는 직업별, 지역별로 형성되는 수많은 작은 소그릅이 있고, 이런 소그룹을 통해서 매우 친밀한 공동체가 형성되고 있다. 순복음교회의 내밀한 능력은 이런 소그릅에 있는 것이다.
넷째, 근대문명의 수용이다. 조용기목사는 메시지는 초대교회의 오순절을 지향하지만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에서는 근대적인 문명의 이기를 신속하게 받아들인다. 조용기목사는 방송선교, TV방송, 국민일보등 수많은 근대 문명을 수용하였다. 순복음교회의 지교회 시스템은 이런 근대문명의 도움이 없이는 발전할 수 없는 것이다.
조용기목사는 20세기 후반에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용하신 하나님의 도구였다. 그는 사도행전의 옛 메시지에 새로운 옷을 입혀 한국사회에 전달하였고, 이것은 한국사회 만이 아니라 세계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맺는 말: 조용기, 절망의 시대에 희망을 전한 예언자
조용기목사는 자신이 절망 가운데 있었다. 그는 파산된 가정에서 자라 폐결핵을 앓게 되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조용기는 새롭게 들어온 오순절선교사의 메시지를 듣게 되었다. 절망에 빠진 조용기와 미국에서 들어온 오순절 메시지의 만남이 열매를 맺어 오늘의 여의도순복음교회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런 조용기의 경험은 자신의 경험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을 지나가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조용기목사와 같은 경험을 하였고, 이들은 조용기목사가 전하는 성령의 음성을 들으면서 자신들도 그 어려움을 이기게 되었다. 그 결과 오늘의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우뚝선 나라가 되었다.
조용기목사의 이런 메시지는 한반도를 넘어서서 전세계에 외쳐졌다. 그래서 절망가운데 있던 전세계의 기독교인들이 조용기목사와 한국교회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들도 절망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한국과 온 세계에는 절대 절망의 상황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런 측면에서 조용기목사의 메시지는 오늘에도 역시 필요한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하는 것은 그의 제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감당할 몫이다. (끝)
#박명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