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예수 바라바와 나사렛 예수의 차이
예수가 열심당원으로 고발되어 처형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그가 열심당원이었다고 간주할 수는 없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은 예수가 지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종말론적 이해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이해할 수도 없었다. 예수의 행동은 열심당원을 크게 실망시켰으며, 이 같은 실망이 가룟 유다가 스승을 배반하는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마가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가 체포된 당시에 열심당원이었던 바라바도 체포되었다. 이 바라바는 “민란을 꾸미고 이 민란에 살인하고 포박된 자”(막 15:7)이다. 사도 요한은 “바라바는 강도”(요 18:40)라고 말한다. 희랍어로 강도라는 단어는 당시 팔레스타인의 상황에는 “저항투사”라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바라바는 전에 반란에 가담한 적이 있었다(막 15:7). 그리고 반란에 연루되어 살인죄로 고발당했다(눅 23:19, 25). 마태는 “바라바는 유명한 죄수”라고 말한 것은 그가 뛰어난 저항 투사 가운데 하나로서 반란의 주모자였음을 보여준다(마 27:16). 바라바는 메시아 같은 인물이었다. 단지 메시아 사상이 달랐을 뿐이다. 바라바는 어원적으로 바르-압바(Bar-Abbas)에서 나왔고 그 뜻이란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메시아를 가리키는 전형적인 이름이었고 메시아 운동의 뛰어난 지도자를 숭배하는 뜻으로 붙여진 존칭이었다. 주전 132년에 유대인의 마지막 메시아 전쟁이 이었는데 이 전쟁을 이끌었던 지도자의 이름은 바르-코흐바였다. 이는 “별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그도 자신을 메시아로 생각했다.사복음서가 모두 전해주는 이 바라바는 “예수 바라바”인데 이는 “아버지의 아들 예수”를 뜻한다. 말하자면 예수 바라바(Jesus Baraba)는 나사렛 예수(Nazareth Jesus)와 동명이인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군중들의 요구에 의하여 전투적 메시아로 간주되는 바라바는 놓임을 당하고, 평화적 메시아인 예수는 십자가에 처형당한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앞으로 예루살렘에 다가올 민족적 재난에 대하여 예언을 하신다. 복음서 저자 누가는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 “그들이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눅 23:31). 그들이란 자기를 사형에 처한 로마 병정을 가리키고 있다. 이 구절에서 푸른 나무란 예수 자신을 가리키며, 마른 나무란 열심당원을 가리키고 있다. 이 말씀의 뜻은 로마 병정이 열심당원이 아닐 뿐 아니라 열심당에 대하여 경고를 마지 않았던 예수 자신도 이렇게 처형하는데 진정한 열심당원에게는 어떻게 하겠는가라는 뜻이다. 이것은 40년 후에 유대 열심당이 반란을 일으켜 로마에 대한 전면전을 하게 되고, 그리고 로마가 최종 승리할 것에 대한 역사적 예수의 마지막 예언이다. 이 예언은 주후 70년 로마 장군 디도가 이끄는 로마군대가 예루살렘을 함락되고 성전이 유린되고 유대라는 국가는 역사에서 사라짐으로써 성취되었다.
III. 평화주의자 그리고 인종 무차별, 보편주의자 예수
1. 평화주의자 예수
예수는 열심당원으로 오해받을 수 있었으나 그는 전혀 열심당원(the Zealot)이 아니었다. 예수는 평화주의자였다. 예수는 열심당에 가담하지 아니하였다. 열심당의 수단과 목적이 예수의 그것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예수는 로마 황제나 헤롯 왕에 대하여 군중들이 반란을 꾀하도록 설교하지도 아니하였다.
예수는 어떤 형태의 폭력도 반대하였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후에 예수는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보낸 큰 무리, 로마 보병대에 의하여 체포된다. 이들은 예수를 잡으려고 “칼과 몽치를 들고”(마 26:47) 왔다. 이들이 예수를 잡으려고 하자 제자 중 하나(베드로)가 검을 꺼 내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그의 귀를 쳐 떨어 뜨린다(마 26: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신다: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 26:52). 여기서 우리는 평화주의자 예수와 7세기에 나온 무함마드(Muhammad)와 차이를 명백히 하게된다. 무함마드(Muhammad, 570~632)는 이슬람교를 전파하는 데 메디나 시기 이후 꾸란과 칼을 사용하였다. 그는 칼을 가지고 비이슬람교도들을 정복했고 신앙을 강요했으나 예수는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라는 가르침을 주셨다. 역사적으로 중세 십자군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정통기독교 선교에는 칼로 신앙을 강요하는 강압적 선교는 없었다. 기독교 복음은 복음이 선포하는 사회에 평화를 가져오는 데 기여하였다. 이에 반하여 오늘날 중동지역에서 이슬람 수니파 무장단체(Islam State, IS)가 무차별적으로 비무슬림 주민들을 학살하는 것은 너무나 끔찍하다. 이런 폭력행위는 무함마드 자신의 가르침과 행동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수는 폭력을 사용하지 말 것을 천명하신다. 이러한 예수의 말씀은 제자들의 수가 적어 싸우기에 불리하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예수는 말씀하신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 아느냐”(마 26:53). 예수는 자신도 원한다면 충분히 열 두 군단 천사들의 병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순수히 체포에 응하신다. 예수는 자신의 메시아 사명이 십자가에 달려 속죄제물이 되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이러한 메시아 의식에서 그가 저항하지 않고 순수히 붙잡히시는 장면을 이해해야 한다. 예수는 이들에게 강도를 잡는 것처럼 칼과 몽치를 가지고 왔다고 나무라신다: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칼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마 26:55).
2. 인종 무차별, 보편주의자 예수
나사렛 예수는 당시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지상의 왕이나 세계의 주권자로서의 메시아에 부응할만한 아무런 세상적인 부나 권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유대 민족주의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마음이 가난하고 청결하고 화평과 의를 추구하는 자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된다고 가르쳤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3-10)
예수는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면서 구원얻는 자가 적은 이유에 대하여 묻는 질문을 받으시고 율법을 가르치나 불법을 행하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에 대하여 경고하는 비유로 대답하신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눅 13:24-27). 이 비유에서 종교 지도자들은 주인의 이름을 행세하고 가르쳤으나 불법과 악행을 행한 자들이다. 거룩한 복음 사역을 한다 하드라도 자기의 권력과 명예를 위하여 행한 자들은 보내신 주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자들이다. 종교적으로 큰 교회를 세우고 많은 자들을 회개하도록 하고 큰 업적을 내는 성공을 거두었다고 하드라도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자들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세속적 “성공이 아니라 오로지 봉사”(not success but service)를 목표로 일한 자들은 주님이 기뻐하신다. 이는 조선의 테레사라고 불리운 독일 출신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 파송 푸른 눈의 간호 선교사 서서평(徐舒平, 천천히 평온하게, Elizabeth Johanna Shepping, 1880-1934년) 선교사의 선교 모토였다. 그녀는 조선인들도 멸시한 고아와 과부, 나병환자 등을 먹이고 교육하며 예수의 섬김을 실천했다. 가진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모두 내어주고 정작 자신은 영양실조로 삶을 마감하였다([김영한 기고] 영화 <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를 보고 : 오피니언/칼럼 : 크리스천투데이 ChristianToday 2017.05.01.). .
예수는 가버나움에 주둔한 수비대의 비유대인 군인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면서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 8:10). 예수는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 대하여 질책을 가하시면서 앞으로 동서로부터 많은 인종들이 복음을 믿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을 시사하는 인종 무차별 보편주의자였다: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마 8:11-12). 예수는 불법을 행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쫓겨 나가고 동서남북으로부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믿음을 가진 이방인들이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을 말씀하신다: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눅 13:28-30).
폴 존슨은 그의 저서 『유대인의 역사』(I)에서 다음같이 피력한다: “그는 폭도의 지도자나 민주주의자 혹은 게릴라 두목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그는 신학자이자 희생당한 피해자이며 삶과 죽음을 통해 모범을 보인 선생이다”(Paul Honson, A History of the Jews(I), 『유대인의 역사』(I), 287)
마태는 예수의 말씀 “동서로부터의 사람”이라고 기록한 데 반하여 누가는 이를 더욱 “동서남북으로부터 온 이방인”으로 확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예수는 유대 민족주의가 아닌 하나님 나라의 복음 앞에서 복음을 믿는 지구촌의 모든 사람들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유대 나라가 아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이 저들의 하나님이 되는 하나님 나라 보편주의를 가르치고 계신다. (계속)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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