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원적 질문: 아담아 네가 어디있느냐?(창3:9)
창세기 타락설화에 보면, 아담과 이브가 금지된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져 자기들의 벌거벗음을 알고 나무 사이에 숨어있는데, 그가 하나님의 찾는 소리를 듣는다고 기록되어있다. “아담아(사람아) 네가 어디있느냐?”(창3:9). 하나님의 물음은 아담과 이브가 숨어있는 장소가 어디냐고 묻는 물음이 아니다. 나무 사이인지, 바위 뒤인지, 동굴 속인지 지리상의 좌표위치를 묻는 질문이 아니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지켜야 할 자리 사람다움의 정위치(正位置)를 벗어나서 이탈해 있다는 경고성 발신음이다.
인류 정신사를 뒤돌아보면, 위대한 사상가들은 모두 이구동성으로 인간은 자신의 본질 질문을 스스로 묻고, 찾고, 외면하고, 배신하고, 그리고 또 그리워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어떤 땐 양심, 무의식, 불성, 하나님 형상 등 다양한 표현으로 나타나지만 인간의 본래성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경우는 없다고 말한다. 현대는 인류문명이 지구적 차원에서, 국가마다, 사회마다 격심한 혼란과 분열에 큰 고통과 시련에 직면해있다. 근본적으로 보면 아무리 사회가 변해도 사람다움의 정위치(正位置)에서 너무 이탈해버리면 안되는데, 지금은 방향이 상실되어있다. 사람다움의 정위치에로 돌아가려면, 사람의 핵심적 본질이 무엇인지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오늘 칼럼은 함석헌의 종교시 중에서 “맘”이라는 시에 나타난 3가지 은유적 표현을 음미하면서 사람의 본래적 진면목을 다시 한번 함께 생각해보려 한다. 함석헌은 “맘”을 9가지 사물을 은유로 하여 인간 심성의 오묘한 성격을 노래했는데, 9가지 비유적 대상들은 꽃(난초), 시냇물, 구름, 산봉우리, 호수, 별, 바람, 씨알, 그리고 처녀이다. “맘”이라는 제목의 9가지 비유는 아홉 단락의 시련(詩聯)을 구성하고 있는데, 지면상 이 컬럼에서 꽃(난초), 씨알, 처녀로서 은유한 3개 시련(詩聯)만 음미하기로 한다.
맘은 꽃 / 골짜기에 피는 란(蘭) / 썩어진 흙을 먹고자라 / 맑은 향(香)을 토해.
맘은 씨알 / 꽃이 떨어져 여무는 씨의 여무진 알 / 모든 자람의 끝이면서 / 또 온갖 형상의 어머니.
맘은 차라리 처녀 / 수줍으면서 당돌하면서 / 죽도록 지키면서 아낌없이 바치자면서 / 누구를 기다리어 행복 속에 눈물을 지어.
첫째 련 난초 꽃 : 사람 생명은 홀로 존재하는 주체적 자아가 아니다.
근현대 서구철학과 사상역사는 인간을 자유로운 존재, 주체적 존재, 단독자, 근본적으로 독립적인 인격체로서 인식하는 ‘주체 중심 철학’이 주류를 이루어 왔다.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모든 사회가 특히 그 점을 강조한다. 사람을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인격체로 생각하는 인간 이해는 인간의 존엄성과 불가침적인 의지적 자유를 행사하는 존재로서 이해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이론이다.
그러나 오늘날 21세기의 포스트모던 사상은, 종교개혁 이후 오늘날까지 약 400여년 동안 절대적 신념 체계로 자리 잡아온 ‘주체 중심 철학’에 진지한 반성과 혁신을 수행하고 있는 중이다. 함석헌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씨알의 주체적 책임성과 자유의지를 강조해오던 종교사상가요 역사가였다. 그러나, 오늘 되새김하는 “맘”이라는 대표적 시 첫번째 시련(詩聯)을 깊이 음미해 보면 함석헌의 인간 이해는 ‘주체 중심 철학’이 아니라 철저한 관계적 존재, 타자에 빚진 존재, 형성되어가는 존재, 인연생기적(因緣生起的) 존재로서 파악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함석헌은 “맘”이라는 본래 글자는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한국 모음 글자 아래아(ㅇ)라고 본다. ‘몸’이면서 ‘맘’이다. 사람 생명은 몸이면서 맘이다. 육신이면서 정신이다. 몸과 맘의 통일체로서 사람을 한송이 꽃, 그것도 골짜기에 피어있는 가냘픈 잎을 지닌 란(蘭)으로서 비유한다. 그런데 그 꽃 난초는 혼자서 독불장군처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썩어진 흙을 먹고 자란다”고 갈파한다. ‘썩어진 흙’이란 몇 년간 가을이면 떨어져 쌓인 나뭇잎들과 부러진 가지들이 흙과 섞이어 퇴비가 된 것을 말한다. 가냘픈 란(蘭)은 퇴비 속에 뿌리를 내리고 양분을 흡수하여 ‘맑은 향기’를 내뿜는 고상한 자태의 난초로 지금 여기에 현존한다.
사람이란 존재를 난초에 비유한 은유적 인간학이다. 인간이란 단단한 소라껍질 속에 몸을 숨기는 자폐증 환자 같은 ‘독립적 주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의 내가 개개인 한 사람으로서 존재하기 위해서, 직계 부모님을 위시하여 수많은 사람들과 생명체들의 ‘거룩한 희생’ 덕분으로 오늘의 인간존재 하나하나가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상상이거나 철학적 인간학이 억지로 만든 이론이 아니다. 현실이고 진실이다. 성경 말씀 중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고전4:7)라는 말씀이 있다. 각자 개인이 재산을 비롯하여 소유하고 있는 ‘가진 것’만 아니라 각자 개인의 ‘존재 현실 자체’가 모두 받은 것이다. 이 현실과 사실을 알면 알수록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고 모르거나 부정하면 ‘짐승’인 것이다. 오늘 우리 사회 문제의 본질이 거기에 있다. 각자도생, 자기중심의 이기주의, 개인적 자유방임, 양극화의 빈부격차 등등은 잘못된 철학이요 가짜 인간학이요 공멸로 달려가는 것이다.
여덟째 련: 사람의 짧은 생애 안에 35억 년의 진화역사가 담겨있고 미래가 있다.
함석헌의 역사철학가로서 사상적 특징 중 빼놓을 수 없는 점은, 그의 생명 이해와 역사 이해가 “생명은 자라면서 영글어간다”는 진화사상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이 그의 스승 다석 유영모와의 차이를 드러내는 특징이 된다. 함석헌 사상은 30여 권의 전집 속에 잠들어 있지만 알고보면 오늘 우리가 지금 음미하고 있는 ‘맘’이라는 종교시 속에 그의 사상의 알짬이 다 응축되어있다.
함석헌은 사람 영성의 핵심을 “꽃이 떨어져 여무는 씨의 여무진 알”이라고 노래한다. 수목원 농사꾼의 입장에서 보면 농사짓는 목적이 관상용 꽃, 싱그러운 잎, 탐스러운 과즙 열매 얻기에 있다. 그러나, 나무 그 자체 목적은 마지막 ‘여무진 씨와 알곡’을 맺자는데 있다. 함석헌이 인간생명체 본질을 “꽃이 떨어져 여무는 씨의 여무진 알”로서 은유하려는 의도는, 사람 생명체의 역사성을 강조하려는데 있다.
인간생명체는 삼성전자 평택공장에서 최근의 기술공학적 이론을 통하여 만들어낸 <우수한 두뇌 기능을 장착한 공산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 생명의 엄숙성과 경외심은 아무리 하찮은 일급을 받고서 식당에서 허드렛일하는 날품팔이 여성일지라도, 35억 년간 길고 긴 생명 여정의 길을 견디고 이겨온 결실물이라는 것이다. 내 생명이 35억 년의 지구 진화사의 우여곡절을 견디고 지금 여기에 현존한다는 사실만큼 놀랍고도 귀중한 일이 또 있을까? 그러나 그것은 소설적 과장이 아니고 과학적 진실이다.
뿐만 아니라, 각자 생명체는 앞으로 태어나서 전개될 무한한 가능성을 담지한 ‘온갖 형상의 어머니’라는 것이다. 그 씨종자 중에서 도둑놈도 나오고 못된 놈도 나오겠지만 위대한 정치가, 사업가, 의사, 발명가도 나올 것이다. 종교시 “맘”의 여덟 번째 시련(詩聯)이 주는 메시지는, 사람다운 사람이라면 자기가 ‘역사적 존재’라는 것을 꿰뚫어 깨달아 알고, 역사의 중요성과 역사에 대한 책임적 참여를 하라는 것이다. 가깝게는 조선 독립운동가들의 자기희생적 역사적 사실, 1950-90년 어간의 민주주의를 확립하기 위한 수많은 청년들, 노동자들, 언론인들, 종교인들과 지식인들의 역사적 희생 대가로 이룬 땀과 피로 이룬 현대사 의미를 가볍게 여기는 인간들은 엄청난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된다.
아홉째 련(聯): 사람은 지조를 죽도록 지키고 아낌없이 님에게 주는 존재
종교시 ‘맘’의 마지막 시련(詩聯)은 처녀라는 은유를 가지고 끝맺는다. 함석헌의 시인다운 면모가 여실히 드러나는 국면이다. 처녀다움의 성격 특징을 ‘수줍움과 당돌함’으로 압축했다. 처녀는 자기 몸과 맘을 능히 기쁘게 바칠 사랑하는 님을 만나기 전까지 죽도록 자기 정조를 정결하게 지킨다. 조선시대 유명한 화류계 기생마저도 진짜 기녀는 부귀와 돈에 호락호락 자기 정조를 팔지 않는다. 권력이나 겁탈에 은장도로서 자결할지언정 몸을 더럽히지 않는다. 그러나, 정작 임이 나타나면 아낌없이 몸과 맘을 몽땅 다 바친다. 자기 전존재를 아낌없이 바칠 님이 나타나기 이전엔 “희망을 가지고 눈물을 남모르게” 흘리기도 한다.
마지막 아홉째 시련(詩聯)에서 함석헌은 인간이란 “뜻에 살고 의미를 찾는 존재”라는 것이다. 폴 틸리히의 유명한 어휘로 표현하자면 인간은 하찮은 것에 관심 갖는 속물이 아니라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을 갖는 존재라는 말이다. 그 사람의 ‘궁극적 관심’의 질과 품격이 그 사람의 사람됨을 결정한다. 총선 선거철이 다가오니 온갖 자칭 애국자들이 갑자기 넘쳐나게 나타나서 국민의 뜻, 참된 민주주의, 상식과 공정, 자유와 번영 등 온갖 명분을 내세우며 소란하기 그지없다. 깨어있는 시민들의 냉철한 심판이 요청되는 선거철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