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자존감, 깨어진 관계, 몸의 질병, 죄의 문제, 오랜 방황을 경험하며 그리스도인은 내내 회복을 바랐지만, 실상 변화 없는 상황과 응답 없는 기도의 시간을 버텨간다. 이제 그리스도인에게 남은 것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데서 오는 막막함이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약속을 굳게 붙잡으려는 그리스도인이기에, 멀게만 느껴지는 삶의 회복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사그라들게 하며 어둠을 더욱 짙게 드리운다. 그렇다. 그리스도인은 묻고 싶다. 회복, 그게 정말 삶에서 일어날까?
저자 오지영 작가는 십자가로 향하는 마지막 여정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삶이 회복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따뜻한 시선으로 풀어낸 내용을 이 책에 담아냈다. 아울러 독자들을 예수 그리스도가 공생을 살았던 당시의 세계로 들어서게 한다.
저자는 책 속에서 “‘여자여’는 헬라어로는 ‘귀나이’(γύναι)라고 한다. 예수님 시대에 고귀한 여자를 부를 때 정중하게 사용하는 호격이다. 예수님의 어머니이셨던 성모도 이 호칭으로 아들에게 일컬음 받은 바가 있었음을 기억해 주시길 바란다(요 2:4; 19:26). 예수님은 여자에게 ‘등 굽은 자여’ 하고 부르지 않으셨다. ‘거기, 귀신 들려 고꾸라진 사람’이라는 말은 더욱이 사용하지 않으셨다. 그녀의 겉모습이 어떠하든지 예수님께 이 여자는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담은 귀하고 아름다운 인격체이다”고 했다.
이어 “아직도 나무 속에서 저녁 그림자처럼 웅크리며 숨어 계신 분이 계시다면 어서 그 나무에서 내려오길 바란다. 예수님이 당신을 대신하여 십자가 나무에 올라가, 당신의 외로운 눈물을 끌어안으셨음을 온전히 믿고 지금 내려오시기를 바란다. 세상에서는 자리가 없는 ‘작은’ 사람이기에 몰래 예수님의 얼굴을 보고 싶은 당신의 마음을 주님이 아신다. 오랫동안 따돌림과 소외로 아픔이 농축된 당신의 마음 집에 지금 주님은 영접되기를 갈망하신다. 당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건 거대한 지진 같은 사건도 아니고, 큰 광풍 같은 사건도 아닌, 세미한 주님의 음성이다. 당신의 삶이 변화되는 순간은 당신의 이름을 조용히 불러 주시는 그 세심한 목소리를 들을 때이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과거가 어떠했는지에 따라 서로를 판단하고 싶지 않다. ‘일곱 귀신’ 못지않은 ‘악한 영’이 몸과 마음과 정신과 영혼을 시달리게 했든지, 가치 없는 생각과 선하지 못한 감정과 부정적인 정서가 진흙에 구르도록 했든지, 건강하지 못한 집착과 불안과 두려움에 매여 있었든지 개의치 않는다. 중요한 것은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로 우리가 온전해졌다는 것이고,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지금 그 마음이다. 그 마음이면 된다. 보고자 하는 갈망으로 몸을 힘껏 내밀고, 목을 길게 뺀 채로 성루에 선 파수꾼의 심정이면 충분한다. 사랑은 물러서지 않는다. 거친 광야도, 십자가 밑도, 무덤도 찾아가는 것이다. 사랑은 사랑받는 대상을 유일한 존재로 만든다. 단 한 분이신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다. 그분을 간절히 원하는 불굴의 애모(愛慕)하는 심령이 있다면 무덤 가운데서 지성소를 마련하시는 생명의 주님을 만날 것”이라고 했다.
끝으로 저자는 “관계의 건짐과 구원이 오직 예수님께 있다. 옳고 그름이라는 차가운 현실 앞에서 죄인이 호소할 곳은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은혜 외에는 없다. 베드로는 약 3년 전 그때처럼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이 대답조차 드릴 수 없었다. 언제라도 주님은 베드로의 삶에 다시 임하셔서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하며 못내 찾아오실 분이기에 그렇다. 베드로를 사랑하시되 어김없이 ‘끝까지’ 사랑하실 주님이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