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신앙생활에도 자기중심성 벗지 못하는...
미가의 일침 ‘너, 이사람아!’
“하나님 뜻 모르지 않아...단지 원치 않을 뿐”
청파감리교회 김기석 목사가 2024년 새해 첫 설교 말씀을 전했다.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미 6:6-8)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한 김 목사는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 등을 강조하며, 이에 대해 풀어서 설명했다.
김기석 목사는 “새해가 되자, 많은 사람들이 내게 축복하는 메시지를 보내줬다. 다양한 내용이 있었는데, 새해를 설렘으로 맞이하는 것은 동일했다. 그런데 새해 첫 주일인데 벌써 새해가 낡아버린 것처럼 느껴지는 까닭은,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아서”라며 “일본의 지진, 하네다 공항의 비행기 사고, 이란에서는 솔레마이니 혁명 수비대 사령관의 4주기 추모식의 폭발물 테러와 이란의 보복 천명,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으로 레바논 근처에서 많은 드론 폭격을 자행했고, 주권국가에 대한 유린의 문제 제기가 터지고 있다. 예멘 후티 반군은 홍해를 지나는 선박을 위협하여, 미국과 영국의 참전으로 국제 유가가 치솟고 있다. 유럽에서는 핀란드, 스웨덴이 때아닌 한파에 시달리고 있고, 영국은 홍수의 피해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지구가 앓고 있다는 징후가 곳곳에서 보인다”고 했다.
이어 “우리나라도 새해 벽두부터 유력 정치인에 대한 테러가 벌어졌다. 증오와 혐오가 눈덩이처럼 벌어진 세상이다. 이것이 우리가 설렘으로 맞이한 새해의 실상이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게 보이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때일수록 근본에 충실해야 하고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오늘 미가 선지자의 이야기를 통해 다시금 근본이 무엇인가 되돌아봐야 한다”고 했다.
그는 “미가의 활동 시기는 주전 8세기로, 아시리아가 주변 세계를 피로 물들이고 있던 시대이다. 아시리아는 메소포타미아에서 등장했던 어떤 나라보다 잔혹했던 나라이다. 잔혹함을 심지어 자랑하기도 했다”며 “이스라엘의 사랑을 받던 히스기야는 이 아시리아에게 저항하려고 했다. 산헤립은 대군을 이끌고 유대왕국을 침공했다. 남왕국이 오랫동안 건설해 왔던 46개의 성읍을 초토화시켰고, 남유다의 운명은 풍전등화처럼 보였다”고 했다.
이어 “어떤 이유로, 산헤립은 포위를 풀고 잠시 돌아섰다. 그러자 유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개입하셨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괜찮다’고 안심했다. 그때, 선지자 미가는 ‘잠시 우리가 참화를 피했다고 하지만, 결국 예루살렘은 망할 수 밖에 없다’고 이야기한다”며 “이를 보면 예언자가 인기 없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해주지 않기 때문이다”고 했다.
김 목사는 “미가 선지자는 예루살렘에서 남서쪽으로 35km 떨어져 있는 모래셋(Moreshet)이라는 곳에서 살았다. 예루살렘에서 많이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지도층의 삶의 방식을 아주 예민하게 살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모래셋과 그 인근의 있는 사람들의 아주 피패해진 삶의 상황을 알았기 때문에 예루살렘과 지방 사이의 상상할 수 없는 격차는 미가를 격분하게 만들기도 했다”고 했다.
이어 “산헤립의 공격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어 유다 사람들이 안심하고 있을 때 ‘예루살렘은 파괴되고 말 것이다’고 말했다. 미가는 눈 밝은 사람들처럼 국제정세를 예민하게 알고 있다가 이것을 분석한 탁월한 정치평론가이었을까?”라며 “그러나, 어떤 사람은 예언자를 하나님의 눈으로 역사를 주석하는 자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예언자들에게 그분의 마음을 심어주시기 때문에 예언자들이 그분의 마음으로 역사를 바라보고, 이것이 통찰력을 주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그래서, 미가는 그 시대는 ‘망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 시대 예루살렘의 백성의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정의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선한 것을 미워하고 악한 것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다. 백성들의 뼈를 발라내고, 그들을 삶아 먹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의 착취가 얼마나 극심했으면 미가가 이런 표현을 썼다”며 “‘관료와 재판관들은 법을 바로 세워야 하는 사람임에도 뇌물을 받고 법을 굽게 만드는 일이 일수였다. 백성들을 올바로 가르치고, 잘못된 지도자들을 꾸짖어야 할 종교 지도자들이 타락해서 삯을 받지 않고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았다.’ 총체적인 타락이 일어난 것”이라고 했다.
이어 “그런데,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무엇인가? 그 공고한 기득권의 연대가 하고 있던 말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재앙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며 “미가는 분노했다. 하나님의 신적 분노에 사로잡혔다. 그 지도자들이 얼마나 파렴치한 사람인지를 직설적으로 표현했다”고 했다.
백성들의 고름 빼 먹는 뻔뻔한 종교 기득권층...
잔혹한 아시리아의 침략 앞에서도 “하나님이 지키실 것”
“악한 궁리나 하는 자들, 잠자리에 누워서도 음모를 꾸미는 자는 망한다. 그들은 권력을 쥐었다고 해서 날이 세자 마자 음모대로 해치우고 마는 자들이다. 탐나는 밭을 빼앗고 탐나는 집을 제 것으로 만든다. 집의 임자를 속에 집을 빼앗고 주인에게 딸린 사람들과 유산으로 받은 밭을 제 것으로 만든다.”
김기석 목사는 “지금으로부터 2800년 전의 이야기지만, 왠지 현대적으로 들리는 이유는 우리가 후기 자본주의에 살기 때문이다. 돈이 세상을 지배하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며 “출애굽 공동체는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갈리지 않는 평등 공동체를 꿈꿨다. 어떻게 가능한가? 이것은 힘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힘으로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힘없는 사람들을 떠 받들어 줄 때 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이어 “이사야는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는 세상’을 꿈꿨다. 한안상 선생은 ‘사자의 식성이 바꿔야, 세상이 바뀐다’고 말했다. 어떻게 자신의 본성을 바꾸는가? 이것은 상징이다. 소가 먹는 여물이라는 것은 분수껏 먹는 것이다. 사자가 먹는 살코기는 남의 사정 아랑곳하지 않고 제 뱃 속만 채우는 것이다. 사자로 상징 되는 사람들이 흉포한 자기의 욕망에 따라 살지 않고, 어려운 사람의 입장에 서보는 일들만이 세상에 평화가 온다”고 했다.
그는 “초대교회와 출애굽 공동체가 그런 일을 가능케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해방의 기쁨과 설렘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 우리 마음에 기쁨과 감격과 감사가 있을 때, 타자에게 너그럽다”며 “우리에게 이것이 사라지는 순간 타자에게 싸늘해지기 시작하고, 그들을 배제하기 시작하고, 교양과 믿음을 통해 안에 숨겨두고 있던 자기중심주의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게 된다”고 했다.
이어 “‘범사에 감사하라, 항상 기뻐하라’고 가르치는 바울의 이야기는 ‘그냥 한번 해 봐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임을 알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는 세상의 꿈을 성경은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자기중심주의’가 고개를 드는 순간 그런 꿈은 사라져 버렸다”고 했다.
예배의 본질은, 공로나 행위 아냐...
‘하나님의 부르심과 인간의 응답이 마주치는 현장’
김 목사는 “오늘 본문 말씀은 그런 시대적 배경을 염두해 두고 볼 때, 제대로 급진적인 그 의미가 드러난다. 사람들이 묻는다. ‘내가 주님 앞에 나갈 때 무엇을 가져가야 합니까?’, 그 의미는 하나님 앞에 갈 때, 빈손으로 가지 말라는 출애굽기와 신명기의 말씀과 연관이 될 것이다. 하나님 앞에 가려는 사람들은 무엇을 가져가야 한다는 것인데, 예배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인간의 응답이 마주치는 현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이어 “성도들이 때로 예배 나갈 때, 귀찮거나, 가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마음을 떨쳐내고 예배에 나갈 수도 있겠다. 그런데 사실 예배는 내가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이 허락해주시지 않으면 우리가 예배드릴 수가 없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분에 대한 그리움을 심어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나갈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이것을 성경은 기가 막히게 보여준다. 출애굽기 40장에 성막이 세워지고 회막이 세워진 후 구름이 가득 차고 하나님이 임재하셨을 때, 성경은 모세가 거룩한 장소인 그곳에 갈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출애굽기가 마치고 레위기가 시작되자, 레위기 1장 1절에 ‘하나님이 부르시자 모세가 그곳으로 나갔다’고 말한다”고 했다.
이어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우리는 무엇을 가져가야 하는가? 1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면 될까요? 이런 수사의문문은 ‘아니다’라는 말이다. 그다음에 과장법이 등장한다. 1천 마리의 양을 바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가? 아니다. 만 갈래의 줄기를 채울 만큼 올리브 기름을 가져가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씻어달라고 맏아들을 바치면, 기뻐하실까? 성경에서는 직접 말하지 않고 있지만 ‘수사의문문’이 말하는 ‘아니다’가 우리에게 아주 강하게 강렬하게 들려온다”고 했다.
김기석 목사는 “그러면, 미가 선지자는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너, 사람아’라고 말한다. ‘여러분’이라고 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사람이 염치없이 구는 것을 보면 ‘아유, 이 인간아’라고 한다. 약간의 애정이 묻어난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아담’이라고 한다. 영어 성경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이라고 번역한다. 즉,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이 뭔지 모르는가? 모르지 않는다. 다만, 그 뜻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이다. 그 내면 깊은 곳에...”라고 했다.
이어 “그래도 우리는 자꾸 갈림길에 설 때마다, 하나님께 길을 여쭙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욕망의 방향으로 가게 되어있다. ‘너 사람아’ 이것이 우리다. 우리가 평생을 신앙 생활 해도, 자기중심주의를 극복하지 못하면 이 소리를 듣는 것이다. 정직하게 얘기하면 우리 모두가 다, ‘이 사람아’”이라고 했다.
그는 “미가가 이것에 간단하게 말하고 있다. 이것은 삶의 기본 개념이다.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다. 노자도 도덕경에서 3가지 보물을 이야기한다. 그는 ‘내가 3가지 보물이 있다. 이는 내가 잘 간직해서 보호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자애로움과 검약하는 것, 그리고 천하 앞에 나 자신을 두드러지게 드러나게 하지 않는 것’이라며 이것도 미가의 말과 상통한다”라고 했다.
갈 길을 잃은 종교성에...선지자 미가가 말하는 본질
‘공의, 자애, 하나님과 겸손히 동행’
이어 “존 웨슬리는 3가지 생활원칙, ‘해를 끼지치 말 것, 선을 행할 것, 하나님의 사랑안에 머무를 것’을 명심하라고 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웨슬리의 3가지 원칙은 미가 선지자의 번역본이다”고 했다.
김 목사는 “첫 번째, 해를 끼치지 말라는 것은 공의를 실천하는 것으로 내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삼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신체적으로 남을 해하거나 재산상 불이익을 끼치는 것을 넘어, 나도 모르게 나의 눈빛이, 나의 말 한마디나 몸짓으로 상대방에게 씻기지 않는 모욕감을 주는 것을 우리는 삶을 통해 많은 경험을 했다”며 “나의 의도가 그렇지 않다고 해도, 나의 눈빛과 태도가 다른 사람들에게 폭력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죄가 중력처럼 우리를 아래로 잡아당길 때, 자기중심으로 사로잡힐 때, 우리는 거칠어 지고, 냉소적이되고, 남들을 모욕하는 말을 서슴없이 하게 된다. 사람들이 분열적인 태도를 하기도 한다”고 했다.
이어 “해를 끼지지 않게 해 달라는 말에 담겨있는 의미는 ‘내가 살얼음판을 걷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사람들을 격려하는 마음으로 살게 해 달라는 말’이다. 여기 신앙의 비밀이 하나 있다. 그것은 ‘내가 그렇게 타자들을 존중하고 조심스럽게 대하기 시작할 때, 타자들에 대한 두려움이 내 속에서 눈 녹듯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비에 속하는 말이다. 그래서 서로에게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우리 사이에 모셔두는 것”이라고 했다.
김기석 목사는 “두 번째는, ‘선을 행하라’는 말은 인자 해야 한다는 말과 통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인자 해야 한다. 인자한 사람이 얼굴에 ‘내 천(川)’자를 그리고 사나운 표정을 그리고 있나? 물론 인자한 사람도 때때로 그럴 수 있다. 그런데, 평상시에 항상 얼굴을 찌뿌리고 있는 사람도 있다”며 “그렇다면 그의 내면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의 내면에 날카로운 것이 있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화를 잘 내는 사람은 그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다 나쁘기 때문에 화를 잘 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 화가 많아서 그런 것이다. 자기 속에 날카로운 것이 만기 때문에 남들을 찌르는 것이다. 우리가 경험적으로 다 안다”고 했다.
이어 “김준태 시인의 ‘인간은 거룩하다’라는 시에서 마지막에 자신의 꿈을 이렇게 이야기 한다. ‘땅 위에 칼들을 녹슬게 하고, 바람의 소리에 귀 기울이자.’ 이것이 시인의 꿈인데, 단지 그의 꿈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꿈이고, 바로 우리의 꿈”이라며 “바로 내 마음 속의 날카로운 것들을 녹여야 한다. 내 마음 속에 있는 칼날 같은 것들을 녹슬게 해야 한다. 그래야 내가 평화의 사람이 인자의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물론 분열되고, 적대감이 넘치는 사회에서 선을 행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존중하기 어려운 사람들도 있고,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가끔 ‘우리가 선을 행하는 것에 있어서, 한계선은 무엇인가?’라고 묻기도 한다. 한계는 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생각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며 “타자의 말이나 행동에 따라 우리의 행동의 방향을 전한다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우리가 선을 행해야 하는 이유는, 상대방이 내게 선을 행하도록 만들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어 “수 없이 많은 악의에 시달리면서도 바울은 ‘사랑에는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악한 것을 미워하고 선한 것을 굳게 잡으십시오, 형제의 사랑으로 서로를 다정하게 대하며,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시오’라고 로마서 12장에서 말한다. 바울 사도가 어려움이 없었기 때문에, 자기를 환대하는 사람들과 살았기 때문에 그런가? 아니다. 그는 수없이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김기석 목사는 “세 번째는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라’는 웨슬리의 말과도 통한다. 우리도 삶에서 경험하지만, 나와 동행하는 사람이 누군가에 따라 우리의 처신이 달라진다. 우리는 여러 가지의 사회적 가면을 가지고 산다. 어떤 상황에서는 이런 가면을, 저런 상황에서 저런 가면을 쓰고 산다. 나도 내 아들과 손자들을 대할 때 쓰는 가면과 교우들을 대할 때 쓰는 가면이 다르다. 가면 자체가 위선은 아니다. 이것은 함께 살 때, 필요한 태도라고 얘기할 수도 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동행자에 따라서 우리의 태도에 달라 지기도 한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어 “내가 거침없이 행동하기도 하고, 사뭇 조심스럽게 나를 돌아볼 때도 있다. 나는 자동차가 없어서 교인들의 차를 얻어 탈 때가 있다. 교인들이 운전을 하다가, 운전을 거칠게 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화를 내려다 참는다. 나에게 ‘목사님이 같이 계셔서 화를 못 냈다’고 얘기한다. 그런데 겨우 나를 태우고도 처신이 다른데,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겠는가?”라고 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뿌리내리면 거두는 열매는,
다름 아닌, ‘생명과 평화’
그는 “지금 내 삶은 ‘내가 누구와 동행하는가’가 결정한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할 때만 떠올리는 분이 아니다. 우리 일상의 모든 순간 그분과 동행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신 사람으로 시종일관 사는 것으로 하나님을 모신 사람은 경거망동할 수 없다”고 했다.
이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산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내 인생의 뿌리를 깊게 내리고 단단한 기둥 하나가 서게 하는 것이다. 정말 우리가 주님의 마음에 뿌리를 내린 사람이라면, 주님이 세상에서 거두었던 인생의 열매가 우리에게도 맺혀져야 한다. 무엇인가? 생명과 평화이다. 주님은 우리가 불의한 세상에서 생명과 평화의 열매를 맺도록 우리를 부르셨다”고 했다.
김 목사는 “어두고, 냉냉한 세상에서 우리는 빠듯하게 살아가고, 겨우 나를 지켜내는 것이 아니고, 세상이 어떻든, 세상이 어두워도 ‘나는 불 한 점 밝히겠다’는 마음으로, 세상이 냉혹해도 ‘나는 내 주변을 따듯하게 물들이겠다’는 마음으로, 우리는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꿈이 이 땅에서 이뤄지고, 공의를 실천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작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지기를 기도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