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야가 자기 시대에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위대한 자격을 갖추었다면, 또 다른 주의 종 역시 동일한 자격을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분의 양식과 음료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요 4:34) 것이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안타깝게도 너무나 종종 우리 시대의 하나님의 역사는 능력 있고 유명한 설교자와 명사와 유력한 자들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은 명성이 아니라 믿음을 찾으시며, 재물이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을 찾으시며, 고명(高名)이 아니라 의지하는 마음을 찾으신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데 필요한 유일한 자격은 부르심에 대한 순종이다. 그것은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왕상 17:1)을 믿는 것이며, 바알 대신 오직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레이먼드 딜라드 – 열왕기, 그리스도 중심 성경읽기
나는 예술의 힘을 믿는다. 종교와 예술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세상을 이롭게 하냐고 묻는다면 단연코 후자라고 답하겠다.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수많은 폭력과 전쟁의 역사를 우리는 똑똑히 기억한다. 지금도 지구상 곳곳에서 종교는 신의 뜻이라느니 거룩한 전쟁이라느니 애먼 소리로 순진한 사람들을 꼬드겨 삿된 이득을 취하는 데 몰두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종교의 분탕질을 예술은 꿋꿋이 고발한다. 독일의 노벨문학상 작가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을 펼쳐 보라. 시대의 양심이어야 할 교회가 히틀러의 앞잡이로 전락했을 때조차 오스카의 양철북은 자기 소리를 잊지 않는다. 군국주의의 북소리를 해체하는 다른 리듬으로 새로운 세상의 가능성을 열어젖힌다. 예술의 고유한 능력이다. 로마서 16장의 이름들은 이런 맥락에서 언급되었다. 가장 먼저 나온 이름이 겐그레아 교회의 뵈뵈다. 겐그레아는 고린도에서 가까운 도시다. 그녀는 바울에 앞서 바울의 편지를 들고 로마 교회로 가는 선발대의 우두머리다. 바울은 그녀를 “우리의 자매”라고 부른다. 자매는 (로마 황제가 아니라) 예수가 구세주라는 믿음을 공유하는 ‘불온한’ 사람들의 모임에 속한 여성을 일컫는 각별한 부름말이다. 로마제국 곳곳에 점조직처럼 퍼져 나가던 신생 세포조직인 ‘하나님의 에클레시아’ 네트워크에서 형제와 자매는 서로를 환대할 책무를 지닌다.
구미정 – 교회 옆 미술관
우리가 사는 시대를 포스트모던 시대라 합니다. 절대 가치관과 절대 기준을 상실한 시대입니다. 모든 것이 상대화되었고 그래서 붙들고 살 기준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명기는 우리에게 다시 약속의 말씀을 경청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약속의 말씀을 다시 붙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성경의 첫 권을 모세오경이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다섯 권을 토라라고 부릅니다. 신명기는 토라 중의 토라입니다. 약속의 말씀을 다시 요약하여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약속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붙들고 약속의 땅으로 가야 합니다. 이 말씀을 경청하는 모든 분들을 축복합니다. 그들은 인생의 기준을 다시 세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을 정복하는 승리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으로 우리는 새 시대의 희망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신명기의 축복이 우리 모두의 축복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이동원 – 너희는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