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오병이어(五餠二魚, The Feeding of the 5,000), 즉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 아이들과 여자까지 합해 약 2만 명으로 추정되는 무리에게 원대로 주시는 기적을 행하셨다. 남은 것도 12바구니, ‘불가능한 가능성’(Impossible Possibility)이랄까? 마치 광야시절 ‘만나’를 연상하게 하는 표적 이야기(sign-act)다.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건너편 빌립의 고향 벳세다 근처에 가셨을 때 행하신 기적인데, 말에 신앙이 담기기에 그 기적의 현장에서 요한이 들었던 빌립과 안드레의 말,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초점을 맞춰본다.
“어디서 사 먹여요?”
먹을 것 제공이 불가능하다는 빌립의 대답이다.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왔는데 J.R.힐에 의하면 그들은 육로로는 약 14㎞, 배로는 약 6㎞ 가량이나 따라온 군중이다.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순례자들까지 합해지며 엄청난 숫자가 되었다. 요한이 4절에서 굳이 유월절이 가깝다는 것을 밝힌 것은 오병이어의 기적에 출애굽 사건이 갖는 의미를 부여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다. 예수님을 제2의 출애굽을 이루는 메시아로, 모세보다 더 위대한 해방자이자 구원자로 부각시키려는 듯하다. 예수께서 억압과 수탈, 가난과 질병에 찌든 군중에게는 희망이요 위로, 한 마디로 영웅(hero)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시면 해변을 걷든 배를 타든 좇아갔다. 인가나 먹을 곳이 없는 빈들에도 따라갔다. 본문에 ‘큰 무리’라는 말이 반복된다. 얼마나 가슴 뭉클한 장면이었을까? 마가는 예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고 했다(막6:34). 병자여서 그랬나? 아니다. 구원을 갈망하며 구원자를 찾아 헤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큰 무리’가 바로 지난 세기 우리의 모습이었다. 1973년 빌리 그래함 집회와 엑스플로 74, 그리고 80년 세계복음대성회 때 우리는 여의도 광장에 연인원 100만 명 이상씩 모였다. 그 시절에는 좋은 말씀이나 강연이 있으면 어디든 찾아갔다. 그런데 지금은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없다. 한 마디로 배가 부른 시절이다.
공생애 기간내내 예수님이 가시는 곳곳에서 부흥회가 열렸다. 병자들이 고침받고, 통쾌하게 유대 지도층을 공격하는 말씀에 군중들은 환호했다. 율법이 새롭게 해석될 때 그들은 놀랐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가 곧 다가오고 있다는 희망으로 그들은 행복했다. 그날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말씀을 듣다 보니 식사할 시간이 지났다. 그런데 무리를 인가로 보내 먹게 하기에는 너무 멀고, 그냥 돌려보낼 수도 없다. 예수님은 친히 먹이기로 하셨다. 때는 저물고, 장소는 빈들, 그때 그곳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나는데 예수님은 기적에 앞서 먼저 벳세다가 고향인 빌립에게 물으셨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5절) 요한은 예수님이 빌립을 시험하기 위해서 물으셨다고 부연 설명했는데 시험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아마 이 시험 이후 빌립은 엄청 업그레이드(upgrade) 되었을 것이다.
그때 빌립의 대답이다.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7절) 빌립은 계산에 빠른 사람, 재빨리 계산하고 이렇게 대답했다. 1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 이백 데나리온이면 노동자의 8개월치가 넘는 품삯인데 “어디서 사 먹여요?” 매우 논리적이며 합리적인 대답, 대책이 없다, 안 된다는 말이다.
빌립의 이 현실적인 태도가 바로 현대를 사는 우리의 모습이다. 현실적인 것이 나쁜가? 아니다. 계산도 없이 허무맹랑한 것보다 낫다. 신앙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오히려 이런 현실적 마인드 아닐까?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다는 말씀을 과신하며 대책 없이 무모한 사람들이 많다.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도움을 기대하다가 안 좋은 결과 앞에서 당황해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나? 건물만 올리면 하나님께서 채워주고 빚도 갚아주시겠지 하다가 낭패 보는 교회가 많다. 그런 믿음은 곤란하다. 전에는 됐는데 왜 지금은 안 되지? 당황스러울 것이다. 그런데 이거 아나? 예전에도 계산은 있었다. 그리고 그때는 밀물 때였고, 교회 성장기였다. 사람들도 순수하고 헌신적이었다. 은연중 그런 계산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무대뽀가 신앙인가?
물론 기적은 예외 상황이다. 하지만 기적도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뜻으로 주셨지 기적을 믿으라는 뜻으로 주신 것이 아니다. 그래서 어거스틴(Augustine)은 예수님의 능력을 간과한 빌립을 “박식한 무지(docta ignorantia)를 드러낸 헛똑똑이였다”고 했다. 빌립의 계산이 틀린 계산인가? 아니다. 그런데 계산은 맞지만 그 계산에 주님의 능력, 예수님이라는 절대 상수가 빠졌다. 인간은 무능해도 예수님은 전능하신 분, 빌립은 예수님을 감안했어야 했다.
“이게 얼마나 되겠습니까?”
묻지도 않았는데 안드레가 나섰다. 요한은 은근히 안드레를 빌립과 대비시킨다. 안드레는 신속하게 현장 조사를 한 것 같다. 그 역시 난감함을 느꼈다. 하지만 안드레는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현장을 뛰어다녔다. 물론 그가 구한 것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어린 아이의 작고 소박한 도시락 하나뿐이었다. 웬만큼 사는 사람은 먹지도 않는 보리떡은 가난한 서민의 양식, 물고기는 소금에 절인 작은 고기, 그때 했던 말이 “이게 얼마나 되겠습니까?”, 어림없다는 불신의 말이다.
예수님의 능력을 생각하지 못한 것은 안드레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안드레가 낫다. 빌립에 비해 비합리적이기는 해도 계산하지 않고 예수께 들고 온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마인드가 작은 도시락과 함께 ‘기적의 마중물’이 되었다. 빌립이 머리로 계산만 한 것과 달리 안드레는 발로 뛰어 작지만 먹을 것을 가져온 것, 기적이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아무것도 없을 때는 아무 리액션도 없었지만 그 도시락 하나를 보신 예수님의 리액션이 기적이었다.
안드레는 신앙인들이 위기 상황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우선 문제가 아무리 거대해도 좌절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작더라도 하나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 그 하나가 쌓여 언젠가는 결국 큰일을 이룬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이랄까? 작지만 한 가지에 집중한 것이 기적을 만들어낸다.
작은 헌신이 만들어낸 놀라운 결과는 19, 20세기에 풍미했던 자유주의자들의 해석에서도 엿볼 수 있다. 자유주의자들은 성경의 기적을 부인하며 이것을 이성적으로 설명하려 하였다. 그 중 독일 루터교 신학자 하인리히 파울루스(Heinrich Paulus)의 오병이어에 대한 해석이 흥미롭다. 예수님 앞에 몰려든 사람들이 배고파하자 한 어린아이가 자기 도시락을 주님께 내어놓으며 얼마 되지 않지만 가진 것은 이것뿐이니 이거라도 필요하면 쓰시라고 했고, 사람들이 그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껴 몰래 감추어 두었던 것들을 꺼내 나누게 되면서 모두가 배불리 먹고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면 오병이어는 ‘나눔의 기적’이 된다. 나눔도 기적이다. 전 세계에 기아 선상을 헤매는 빈곤층이 많다. 유엔 식량농업기구에 의하면 세계 기아 인구는 2019년 6억 9천만 명에서 2020년에는 8억 1천만 명으로 추계된다고 했다. 지금은 기후변화와 경기 침체로 1억 3천만 명이 넘는다. 문제는 그들이 식량 생산이 모자라서 고통을 겪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세계 식량 위기 고조를 둘러싼 역설은 인류가 현재 필요 이상의 많은 식량을 생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식량 폐기물이 어마어마하다. 그 폐기물은 온실가스의 주요 배출원으로, 기후변화를 가속화해 미래에는 오히려 식량생산을 제약하는 주요인이 될 것이다. 식량 생산량이 모자라지 않는다는 얘기다. 선진국은 동물 사료로 사용하고도 남아서 버리지만 제 3세계는 모자라서 굶어 죽는다. 통탄할 일, 잘 나누기만 해도 전 세계는 풍족히 먹을 수 있다.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기적은 그 이후에는 재연되지 않은, 2천년 전 팔레스타인 땅에서 단 한 번 일어난 기적이다. 그렇다면 인류 역사에 딱 한 번 있었던 기적을 우리는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 나눔의 기적은 아니었지만 이 말씀을 최소한 ‘나눔으로 적용’한다면 우리는 현대사회에서도 얼마든지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다. 한 사람의 헌신과 나눔이 수많은 사람을 먹여 살린다. 이것이 오병이어의 기적이다.
“원대로 나눠주고 남은 것은 거둬라”
오병이어를 들고 축사하신 후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다(11절). 사람들은 대책이 없었지만 예수님은 대책이 있으셨다. 안드레의 작은 헌신을 받아주시면서 “사람들을 앉게 하라”고 하셨다. ‘앉게 했다’는 말은 저녁 만찬을 위해 고대 중동인들이 취하던 식사 자세, 팔꿈치로 딛고 비스듬히 눕게 한 것이다. 그 수가 오천 명, 아니 2만 명, 엄청난 숫자다. 모두가 다 숟가락만 들고 예수님을 바라본다.
값싼 보리떡, 너무 초라하고 하찮은 도시락, 분량도 고작 다섯 개뿐이지만 예수님은 코미디 하시듯 하늘을 향해 축사, 곧 감사의 기도를 올리셨다. 그리고 떡과 물고기를 나누어주라고 하셨다. 여기서 ‘앉다’ ‘축사하다’ ‘나누다’ 이 세 단어가 중요하다. 기적은 앉아 있을 때 주어진다. 몸도 앉는 게 편하지만 마음이 앉는 게 중요하다. 가끔 예배당에 몸은 앉았는데 마음은 서 있는 분들이 있다. 그들은 집중하지 못하고 분주하다. 불안과 초조함을 앉혀야 한다. 마음이 앉아야 은혜받는다. 그 다음은 축사, 감사하신다. 오병이어, 적다고 불평하지 않고 감사했다. 감사는 행복해지는 연습이고 불평은 불행해지는 연습, 감사가 기적을 만들고 감사가 지옥을 천국으로 만든다.
2차 대전이 끝나고 한 해군 장교가 고향에 돌아와 보니 모든 사람이 기아에 허덕이고 온 동네가 폐허가 되고 자기 집도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 마음속에 분노가 생기고 증오심이 생기고, 불평과 원망이 생겼다. 그러다 화병이 나고 급기야 전신마비가 되었다. 그래서 병원에 갔는데 병원장이 불평과 불만이 꽉 차 있는 사람인 것을 확인하고 이런 처방을 내렸다. “당신은 내가 주는 약을 먹기 전에 하루에 세 번씩 감사하고 먹어야 합니다. 그래야 병이 낫습니다.” 그래서 그날부터 의사의 처방대로 감사하기를 몇 개월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중학교 다니는 딸이 학교 갔다가 아버지를 면회하기 위해서 오면서 길거리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풀빵을 사와서 “아빠 먹어” 했단다. 전 같으면 길가 음식을 사왔다고 야단을 쳤을 텐데 그날은 딸이 주는 풀빵을 받는데 정말 감사한 마음이 솟아올라 풀빵을 받으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했는데 그 순간 마비가 풀렸단다. 놀랍다. 감사할 때 풀린 것, 감사가 기적을 불러온 것이다.
그리고 나눈 것, 오병이어밖에 없지만 나누기 시작하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아무리 나누어도 바닥이 나지 않는다. 모자람이 없다. 나오고 또 나오고 계속 나온다. 2만 명 모두가 원하는 대로 다 나누어 주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부족할 것”이라던 빌립의 어림없다는 대답과는 너무 다른 대박, 질량 불변의 법칙을 깬 기적이 일어났다. 이백 데나리온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해결되었다. 마치 엘리야로부터 놀라운 기적을 경험했던 사렙다 과부의 경우와 같다. 그때 과부는 기근이 끝날 때까지 3년 정도 병의 기름과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않는 기적을 경험했다.
그런데 벳세다 광야의 바구니에서도 끊임없이 먹을 것이 나왔다. 기적이다. B. 비렌슨은 “기적은 그것을 믿는 자에게 일어난다”고 했고,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만일 기적이 없었다면 나는 기독교인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 했다. 그리고 프랑스 격언에 “기적은 기적을 믿는 이에게만 나타난다”고 했다.
벳세다 빈들에서 일어난 기적, 사람들의 반응이 재미있다.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14절),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는 출애굽기 때의 모세와 같은 역할을 할 분으로 오실 메시아를 염두에 둔 말이다. 그들은 오병이어의 표적을 광야에 내린 만나의 재현으로 여겼다(출 16:13-15).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다(15절). 예수님이 풍성한 인간 수요의 공급자가 되셨기 때문이다. 비록 사람들의 의도대로 임금이 되시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왕이시며, ‘생명의 떡’(35절)으로서 인간이 즐거워할 가장 풍성한 향연(饗宴)으로 당신이 스스로 메시아라는 사실을 드러내셨다.
오병이어의 기적,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 있어서 큰 분수령이 되었다. 예수님이 정치적인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거부하심으로 인해(51절) 이 사건 이후 무리로부터 본격적인 배척과 핍박을 당하게 되신다. 하지만 오병이어의 기적이 예수님이 우리 삶의 모든 문제의 궁극적 해결자이심을 보여준 사건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빈들에까지 따라온 무리처럼 구원을 갈망해야 한다. 성경은 말한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진지하게 주님을 찾고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예수님이 해결자이심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예수 안에서 생명 얻고 풍성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