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삶으로 드러난다. 삶의 모습은 그가 무엇을 믿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삶이 사회적으로 비난과 지탄을 받는다면 그것은 분명 우리의 믿음에 문제가 있다는 증거다. 참된 믿음이란 구원으로 인도하는 것이어야 한다. 만약 믿음이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믿음이라면 그 믿음은 허무하며 거짓된 믿음이다. 구원이 결여된 믿음은 참된 믿음일 수 없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했을 때 그 믿음의 실체가 무엇인지가 중요하다. 믿음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관계적 믿음, 또 하나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다. 관계적 믿음이란 사람 사이의 믿음(Faith in people)을 말한다. 믿음 은 단지 종교를 가진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인만의 전유물도 아니다. 모든 이들의 삶의 밑바탕에는 믿음이 있다. 부부 사이, 부모와 자식 사이, 친구 사이, 동료 사이 등 모든 만남과 관계를 이어주는 것은 믿음이다. 이러한 ‘관계적 믿음’을 다른 말로 ‘신뢰’라고 한다. 어떤 사람에 대한 최고의 믿음, 최고의 신뢰를 표현한다면 이런 것이 아닐까? “나는 그 사람 말이면 다 믿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어!”
장승권 – 유턴
“나는 누구인가?” 이 물음에 답할 때, 우리는 자신에 관한 더없이 기본적인 진리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 진리란 우리가 창조된 존재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7).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여느 동물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르지만, 여전히 피조물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 의존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책임이 있다. 모든 피조물에게 더없이 기본적인 진리는 하나님께 의존한다는 것이다. 시편 145편 15-16절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사람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때를 따라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시나이다.” 이 구절은 일차적으로 동물을 가리키지만, 의존의 원리는 인간에게도 적용된다. 양식. 대부분의 측면에서 우리는 동물과 마찬가지로 의존한다.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 의미심장한 차이가 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경작하여, 곧 일을 해서 먹을 양식의 많은 부분을 생산하라고 명하셨다(창 2:15).
제리 브리자스 –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누구인가?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우선 만나기가 싫습니다. 그러고 상대방의 약점과 허물이 드러나 보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마음이 지배할 때는 항상 만나고 싶어지며 모든 허물마저도 감추어지는 법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만남은 ‘사랑하는 이들’의 만남이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사랑이 전제될 때 슬픔도 어려움도 같이 나눌 수 있고, 서로를 위해 희생과 봉사만이 따를 것입니다. 사랑하게 되면 미운 일을 해도 예쁘게 보이고, 사랑하지 않으면 예쁜 일도 밉게 보일 뿐입니다. 사랑에는 미움의 눈을 감기게 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설파했듯이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은 성도들의 의무이며 필연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위로하며 격려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저의 목회 신념 세 가지 중의 하나가 ‘사랑’입니다. 성격상 남이 듣기 싫은 소리를 잘하지 못하기도 하지만, 사랑하는 마음처럼 더 이상 소중한 것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술람미 여인에게서는 사랑하는 자 때문에 위험과 두려움이 사라지고 애쓰는 모습만이 나타납니다. 우리의 만남은 사랑하는 자들의 만남이어야 합니다. 이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뜻이며 명령이기도 합니다.
송재식 – 걸어 다니는 진흙 덩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