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8일, 미국 제2순회항소법원은 예배 장소에서 총기 등을 소유하는 것을 금지하는 뉴욕주법을 부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뉴욕 주가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선량한 도덕적 성품이 요구되는 교회보호구역 같은 민감한 장소에서의 무기 소지 금지를 법제화한 것을 항소법원이 뒤집은 것이다. 법원은 “이 법률은 (다른 명시된 민감한 장소들과 함께) 예배 장소에 대해 대부분의 다른 개인 소유 사업체 및 자산과 다르게 적용되는 법률을 채택함으로써, 중립적이지도 일반적으로 적용 가능하지도 않다… 종교 단체 전체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교회가 총기 허가 여부를 (개인이) 스스로 선택하는 권리를 박탈함으로써 어떤 이익을 증진시키는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임명한 항소법원의 존 L 시나트라 판사는 교회를 세속적 사유 재산의 일종으로 보았고, 종교의 역사적 고유성 내지 특수성을 부정한 것이다.
언제부턴가 교회는 시설물 안에 자동판매기와 현금인출기 등을 비치하고, 온라인 헌금을 장려하고, 각종 위락시설을 갖추고, 심지어 교회 이름을 ‘스포츠교회’로 명명하기도 하였다. 교회가 보편적으로 인용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5장에 유․무형 교회를 함께 설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목사들이 유형 교회의 성전성聖殿性을 부정하며 구지 ‘예배당’(예배드리는 공간)으로 명명하고, 사회봉사 및 소통 차원에서 말씀이 선포되는 강단을 사람들이 노래 부르고 춤추는 장소로 내어준다. 이스라엘 광야시대의 성막, 정착 후의 솔로몬 성전, 이스라엘 멸망 후의 각 회당,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을 거쳐 예수님의 부활 승천 후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성전이 되고, 그 성전들이 모인 공동체가 유․무형의 교회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시는 거룩한 장소라는 의미를 지닌 ‘성전’임은 변함이 없는데, 교회 스스로 성전을 집합과 예배의 장소로 격하시키니 세상도 교회와 사유재산 시설물과의 차별성을 인정하지 않게 된 것이다.
2010년 코로나가 발생하면서 죽음의 공포가 세상을 뒤덮을 때 특별히 교회가 주목을 받았다. 국가는 교회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더 가혹한 방역을 강제하였다. 예배 행위가 극도로 제한되면서 ‘온라인 예배와 성찬’이라는 희한한 신앙 예식이 탄생하였다. 아무개 도지사가 직원들을 이끌고 군사작전 하듯이 이른 아침에 어느 교회에 쳐들어 간 것은 교회에 대한 세상의 시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다. 방역 당국은 방역 수칙을 제정 공포하면서 교회의 방역 대상 품목에 비치된 성경을 포함시켰다. 성경(책)을 코로나 바이러스가 옮겨 붙는 물건으로 취급한 것이다. 정부의 공문은 각 교단 총회를 통하여 개 교회에까지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하달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거룩한 책이 거저 글씨가 인쇄된 종이를 제본한 책으로, 예외 없이 단속해야 할 물건으로 취급당할 때 성경이 지닌 신적 신비의 고귀성은 사라지고 말았다. 하나님이 코로나 바이러스와 국가라는 형태에 의해 무참히 능욕당한 것이다.
2015년 12월 2일, 국회는 종교인 과세를 명시한 소득세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면서 2018년 1월 1일부터 시행키로 하였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종교인에 대한 비과세는 관행으로 유지되어 왔으나, 1968년 당시 이낙선 국세청장이 과세형평성을 제기한 후 공론화가 시작되었다. 개신교 내에서는 1987년 기윤실(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출범하면서 성직자의 세금 납부를 주장하였다. 그 후 많은 논란을 거쳐 확정된 것이 지금의 종교인 과세이다. 현재 종교인의 소득은 ‘기타소득’으로 분류된다. 이 법 제정에 한국교회가 기울인 노력에 대한 열매는 참담하다. 사실 여러 부교역자들 및 직원들을 보유한 대형교회는 이런 논란과는 무관하게 진작부터 사례비에 대하여 근로소득세법에 의한 세금을 원천징수하여 세무서에 자진 납부해 왔다. 이 법이 시행됨으로써 국가 세수가 더 늘어날 여지는 거의 없다. 오히려 미자립교회의 목회자들에 대한 정부의 지원 의무만 늘어났고, 따라서 각 세무서 담당자들은 지극히 소극적이고, 오히려 귀찮아하고 부담스러워 한다. 납세의무와 과세형평성이라는 세상의 명분이 종교의 특수성을 잠식해버린 것이다.
2023년 8월 31일, 대법원은 교회 전도사를 노동자로 보고, 임금을 체불한 담임목사에게 벌금 700만원을 선고하였다. 1심은 전도사가 봉사직으로 그가 받는 돈은 은전 성격의 사례비라 하여 무죄를 선고하였으나, 2심과 3심은 유죄를 선고한 것이다. 이 판결 후 기윤실은 긴급 포럼을 개최하여 대안을 모색하였다. 이 자리에서 논의된 것을 요약하면, 교회가 전도사 등 직원을 채용할 때 근로계약서를 철저히 작성해야 한다는 것, 담임목사와 부목사 사이에 동역자 의식을 고양해야 한다는 것, 담임목사는 훌륭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 이치는 상대에게 하나를 내어주면 둘을 요구한다. 전도사에 대한 노동자 인식은 잠시 보류된 부목사에 대한 그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소정의 신학교 교육을 이수하고, 교회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임직된 전도사와 부목사는 성직인가, 아니면 노동력을 제공하고 임금을 받는 노동자에 불과한가? 이것은 기독교 내지 제반 종교에 대한 본질의 문제이다. 종교의 본질,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묻는 문제란 말이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그동안 교회는 스스로 논란을 자초해 왔다. 장로교의 대체적인 헌법에는 “교회 직원” 조항을 두고 있는데, 본인이 속한 장로교단 헌법에도 ‘교회 직원’ 조항에서 전도사와 전도인(권사, 사리집사)은 (유급으로 교회에서 사역하는 경우) 모두 ‘임시직원’이라 명기되어 있다. 강도사와 목사후보생은 준직원이다. 전도사, 강도사, 목사후보생에게 각각 ‘직원’이란 용어를 명확히 표기한 것이다. ‘제4장 목사’에 대하여는 ‘직원’이란 명칭을 사용하지 않는다. 교회의 이러한 규정은 법원이 전도사를 노동자로 판단하는 중요한 근거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교회가 스스로 그 단초를 제도적으로 제공한 셈이다. ‘직원’이란 그 직무를 수행하는 종사자(사무원)란 의미로, ‘근로자, 노동자’의 별칭이기도 하다. 따라서 지금이라도 교회헌법을 고쳐야 한다.
지금까지 개신교의 전례는 전도사, 강도사, 부목사, 목사를 모두 성경에서 말하는 소위 ‘주의 종’으로 인정한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어(소명을 받아) 소정의 과정과 절차를 거쳤다. 이들은 모두 일반 성도들과는 구별되이, 평생을 거룩한 직분(성직자)을 감당하기로 서원한 자들이다. 그런데 성직자들의 세계에도 엄연한 질서가 존재한다. 하나님이 세우신 자연질서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교회 사역에 있어서도 위계질서가 있다. 이러한 질서는 모든 종교에 공통적이다. 교부들이 남긴 글들을 보라. 라틴어로 기록된 최초의 교회 규칙서인 <아우구스티누스 규칙서>를 비롯한 제반 규칙서에는 ‘아빠스’(지도자, 장상)의 훌륭한 모범과 함께 장상에 대한 순명을 특별히 강조한다. “순명에 있어 어렵고 비위에 거슬리는 일 또는 당한 모욕까지도 의식적으로 묵묵히 인내로써 받아들이며, 이를 견디어 내면서 싫증을 내거나 물러가지 않는 것이다.” 오늘의 교회 상황과 다른 점이 있을지라도 ‘순명’이란 위계질서는 변함이 없다. 담임목사와 부교역자들과의 관계는 수평관계가 아니다. ‘동역’이란 말을 여기에 인용할 바도 아니다.
주의 종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 ‘노동자’란 명칭은 모욕이다. 그것은 교회 사역에 대한 신성모독, 교회에 대한 세상의 침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종 예배와 기도회, 성경공부, 금요철야, 늦은 시간의 심방 등에 대하여 연장근로수당, 야간근로수당, 휴일근로수당, 주휴수당 등의 반대급부를 요구하는 ‘노동자’라면 그는 직업을 잘못 선택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당장 그 직을 그만두고 다른 직업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일반 사무직은 사정이 다르다. 또한 전도사, 강도사, 부목사라 할지라도 교회는 그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합당한 처우를 해주어야 한다. 이들에게 봉사만 요구한다면 그것은 몰염치한 것이고, 교회가 그럴 능력이 없다면 애초에 임직하지 말아야 한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하나님의 나라)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 이 말씀은 참으로 심오하여 그 해석이 구구하다. 과연 지금 교회는 침노를 당하고 있다. 소금이 맛을 잃어버리면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히듯이, 교회가 본질을 잃어버리면 세상으로부터 침노를 당한다. 그런데 천주교의 신부나 불교의 승려에 대하여도 법원이 동일한 잣대로 적용할 것인가?
하나님의 뜻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그분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고,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구성하는 그 나라의 백성이고, 그 백성과 그 나라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판단 기준은 딱 하나이다. 그분의 뜻과 말씀에 순종하는 것 말이다.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유업, 최후의 심판과 상벌은 그 속에 모두 함유된 내용들이다. 왕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면 왕권을 잃었고, 나라 백성이 그 뜻에 어긋나면 나라를 잃었다. 하나님의 통치 도구(칼, 기근, 온역, 사나운 짐승)는 당신의 백성을 위함이지, 이방인을 위해 내리시는 벌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는 본질의 맛을 잃어가고 있고, 그 뜻에 반하여 “각각 그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며”(사사기 마지막 절) 살아간다. 코로나 팬데믹과 중동의 전쟁은 이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임을, 매혹적인 모습으로 다가오는 AI와 챗GPT는 미래에 대한 경고임을 교회는 인식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