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30) 생명과 심판의 주

오피니언·칼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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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5:19-30
이희우 목사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자신이 ‘생명과 심판의 주’라고 말씀하신다. 38년 된 병자 고쳐주신 것을 안식일을 범했다고 문제 삼던 유대인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시자 생난리를 치며 아예 죽이려 한다(18절). 하지만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신다. 우리는 예수께서 스스로 ‘생명과 심판의 주’라고 선언하신 말씀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아버지와 하나

“서로 가슴을 주어라/ 그러나 소유하려고는 하지 말라/ 소유하고자 하는 그 마음 때문에/ 고통이 생기나니. 추운 겨울날,/ 고슴도치 두 마리가 서로 사랑했네/ 추위에 떠는 상대를 보다 못해/ 자신의 온기만이라도 전해 주려던 그들은/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상처만 생긴다는 것을 알았네/ 안고 싶어도 안지 못했던 그들은/ 멀지도 않고 자신들의 몸에 난 가시에 다치지도 않을/ 적당한 거리에 함께 서 있었네/ 비록 자신의 온기를 다 줄 수 없었어도/ 그들은 서로 행복했네/ 행복할 수 있었네”

이정하님의 ‘고슴도치 사랑’이다. 사랑하는 사이일수록 거리감이 없어지기는 하지만 너무 가까이하다 보면 자기 삶이 없어지고, 서로 매이면서 불편을 느끼고 상처를 주고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는 것, 그걸 ‘고슴도치 사랑’이라 표현했다.

그래서일까?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은 ‘함께 있으되 거리를 두라’고 사랑의 거리를 요구했다.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말라. 그보다 너희 혼과 혼의 두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두라… 서로 가슴을 주라. 그러나 서로의 가슴속에 묶어 두지는 말라. 오직 큰 생명의 손길만이 너희의 가슴을 간직할 수 있다.”

코로나 펜데믹 시대에 우리는 거리두기를 강조했는데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Edward T. Hall)은 인간관계를 4가지 거리로 분류했다. 친밀한 거리(intimate space)는 0~46cm, 개인적 거리(person space)는 46~120cm, 사회적 거리(social space)는 120cm~ 360cm, 공적인 거리(pubblic space)는 360cm 이상, 친밀한 거리는 가족이나 연인 사이인 반면에 사회적 거리는 친구나 가까운 사람 사이, 그리고 사회적 거리는 사회생활을 할 때 유지할 거리이지만 공적인 거리는 연설이나 강연 그리고 무대 공연 등이 이루어지는 거리라고 했다.

본문에도 거리에 관한 말씀이 나온다.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의 거리다. 예수님은 그 거리가 ‘0’이라 하신다.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19절) 서로 숨기는 게 없는, 유리알처럼 맑고 투명한 사이라는 말씀이다. 예수께서 누차 이 점을 강조하신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20절),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30절).

하나님과 완벽한 일치를 이룬다며 자신과 하나님은 하나라는 말씀,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원하시는지 잘 아신다는 말씀이다. 화내는 것 같지만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한없이 포용적이고 부드러워 보이지만 의와 생명에서 벗어난 우주를 보며 괴로워하는 하나님이시라고 하나님을 너무 잘 안다고 하신다. 두 분 사이에 거리가 없다는 말씀이다.

14장에 보면 예수님의 말씀은 더 선명해진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9절), 빌립이 하나님을 직접 보여달라고 간청했을 때 주신 답변인데 유대인들은 펄쩍 뛰었다. 그들 입장에서는 신성모독이다. 요셉의 친아들이 감히 하나님의 친아들? 말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식일이라는 거대한 율법을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한 마디로 허물어뜨리신 예수님은 본대로, 하나님의 뜻하신 대로 행한다고 주장하신다.

하나님과는 거리가 없음을 상징하는 언어가 바로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표현이다. 요한복음에서만 ‘아버지’란 단어가 118회나 나온다. 공관복음서의 세 복음서를 다 합쳐도 66회밖에 되지 않는 것과 비교하면 엄청나다. 본문에도 가장 많이 나오는 핵심 단어(key word), 8회나 나온다. 아버지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를 상징하는 표현, 가부장적 문화였던 당시에 ‘아버지’라는 표현은 아들에게 가장 가깝다는 뜻으로 사용할 수 있는 최대치의 표현이었다.

물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표현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남성이란 말은 아니다. 하나님은 성을 초월하신다. 또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표현했다고 해서 예수님이 하나님께 종속된다는 뜻도 아니다. 교회사에서 아들의 종속성을 말하던 세력은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메타포’(metaphor), 가장 가까운 거리를 은유적으로 표현했을 뿐이고,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 동등하시다는 사실이다.

생명의 주

예수님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두 가지를 맡기셨다고 한다. 그중 하나가 ‘생명’이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21절).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는 모습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대단한 치유자, 기적술사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다. 예수님은 치유자, 기적술사가 아니라 ‘생명을 주신 분’, ‘생명을 살리는 분’이시다. 치유자인 동시에 ‘생명의 주’가 되신다는 말이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26절)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 살리는 분이시다. 그래서 38년 된 병자가 고침받았다는 사실도 엄청난 일이지만 질병 치유가 핵심이 아니고 ‘영적 생명’이 핵심인데 그 병자였던 사람은 핵심을 놓쳤다.

왜 그런가? 작은 선물에 취해 더 큰 것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질병이나 고난은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통로다. 질병을 통해 우리는 육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고난을 통해 우리는 영원한 행복의 나라를 바라본다. 그래서 질병에서 고침받고 고난에서 벗어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나은 것을 얻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어떤 목사와 회의론자인 이발사가 시카고의 빈민거리를 나란히 걷고 있었다. 그때 몹시 지저분하고 악취가 나는 주변을 보고 이발사가 “만약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저렇게 처참하게 살도록 내버려두십니까?”라고 말했다. 때마침 히피 청년이 그들의 옆을 지나가자 목사는 반문했다. “저 친구 행색 보셨지요. 그렇다면 어찌 당신같이 훌륭한 이발사가 왜 저렇게 내버려두지요?” 이발사는 즉각 “그야, 저 친구가 이발해 달라고 오지 않으니까 그렇죠.” 목사님은 조용히 “하나님도 같은 생각이실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이 하나님께 나아가 그 기회를 드린다면 하나님은 분명 그들의 삶을 바꿔 놓으실 것입니다.” 그랬단다. 예수님은 생명의 주, 무엇보다 생명을 얻어야 한다.

심판의 주

예수님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기신 또 한 가지의 일을 ‘심판’이라 하셨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22절), ‘심판’이 원래 하나님의 고유권한이지만 역할 분담이랄까? 하나님께서 그 권한을 아들에게 위임하셨다는 것이다. 역할 분담과 권한 위임, 서로가 전적으로 신뢰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심판 권한을 이양하고, 위임하셨다고 한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23절), 단순한 부자간의 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주적 심판 권한이 확실히 위임되었음을 강조한 말씀이다.

이 ‘심판’이라는 단어는 본문에서 7회, 두 번째로 많이 등장하는 핵심 단어(key word)다. 선거 때 투표 직전까지 줄곧 듣는 단어이기도 하다. 표로 상대방을 심판해달라는 건데 심판은 오직 하나님이 하시는 거다. 정치화된 심판론에 흔들려 우왕좌왕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선택을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흔히 ‘심판’이라 하면 종말의 때 일어날 일로 여긴다. 종말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던 의로운 자들은 위로와 상급을 받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았던 악인들이나 변절자들은 그에 합당한 형벌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맞다. 그때 우리들의 억울함이나 희생이 신원을 받게 될 것이다. 불의에 대한 응분의 대가가 주어질 것이다. 그게 심판이다. 한 해 농사가 추수로 결판나듯, 우리 인생이나 우주는 심판으로 마무리된다.

그런데 예수님이 여기서 자신을 심판의 주라고 하시는 것은 종말에 심판하신다는 의미보다는 ‘아들’ 즉 자신에 대한 태도가 천국과 지옥을 결정한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생각하지만 ‘심판의 주’이시기도 하다. 침례(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한 것 때문에 우리는 연약함, 순결함만 연상하지만 아니다. 이 양은 세상 죄라는 엄청난 무게를 지고 가는 힘센 양이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공중에서 구름을 타고 오시는 어린 양, 그 입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는데 그것이 검이 되어 원수들을 물리친다고 했다.

예수님은 심판의 주가 되신다. 물론 가혹한 심판자가 아니라 사랑의 심판자, 생명을 주기 위한 심판의 주이시다. 참 감사한 것은 믿으면 그 심판의 날은 공포의 날이 아니라 기쁨과 칭찬과 감사와 영광의 노래가 울려 퍼지는 ‘축제의 날’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그 심판이 이미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고 하셨고,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28절)고 하셨다. 여기서 ‘듣는다’는 표현이 현재형이다. 예수님은 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24절)라고 하셨다. ‘아멘 아멘 레고 휘민’(ἀμὴν ἀμὴν λέγω ὑμῖν), 말씀의 진실성과 신적 권위를 밝히기 위해 ‘아멘 아멘’을 두 번 연발하셨다. 동사의 시제가 중요하다. ‘영생을 얻었고’, 과거형처럼 번역이 되었지만 현재형이다. 가장 중요한 영원한 생명을 지금 얻고 있다는 말씀, 영생을 계속 소유하고 있는 상태를 나타낸다. 또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이건 완료형이다. 과거에 결정되어 현재에 이른 상태라는 말, 심판은 이미 제거되었다. 심판 예외라는 말씀이다. 3장에서도 말씀하셨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함으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18절) 그렇다면 우리는 엄청난 은혜를 입은 셈이다.

이런 요한복음의 종말론을 가리켜 ‘현재적 종말론’, ‘실현된 종말론’이라 한다. 종말이 먼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우리 삶의 한복판에서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기억하라. 예수 믿으면 미래에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천국을 소유한 사람이다. 죄의 짐이 저 천국에서 벗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 땅에서 벗어졌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이 이를 잘 보여준다. 장망성을 떠나 천국 도성을 향해 가는 순례자, ‘크리스천’은 골고다 십자가 아래를 지나다 자기 등에 달려 자신을 힘들게 했던 죄의 짐이 풀어지는 경험을 한다. 이 땅에서 자유함을 얻었다는 말이다.

이게 요한이 복음서를 쓴 이유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20:31) 믿지 않던 자도, 믿던 자도 생명을 얻고 풍성한 삶을 살라는 말씀이다. 천국이 주어져도 천국인지 모르면 무슨 소용이 있나?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과 함께 사는 것이 영생이고 천국이고 행복이다. 이미 죄의 고통에서 놓였다. 두려움에서 벗어나 자유함을 누려야 한다.

급히 병원에 실려갔는데 의사가 위독하니 빨리 약을 먹어야 한다며 처방을 해주면 어떻게 하나? 약만 들고 가면 되나? 약이 있어서 살 수 있다고 말하기만 하나? 아니다. 먹어야 산다. 예수님은 생명의 주, 생명을 주기 위해 오셨다. 믿어야 한다. 또 예수님은 심판의 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셨다. 믿어야 한다. 그래서 자유함을 누리고, 풍성한 삶을 살아야 한다.

코로나 펜데믹 이후 전 세계는 경기 침체에 빠지고 고금리, 고환율에 전쟁과 이상기후로 고통을 받고 있다. 부자유한 현실이 지속되고 있지만 예수께서 주시는 구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오히려 믿음을 더 강화하고, 매순간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그래야 천국을 살 수 있다. 천국은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과 같은 것, 모든 상황과 조건이 변하지 않아도 행복으로 가득한 내 마음, 열정이 있다. 모든 상황이 낙관적이고 우리를 축복하는 듯하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거리가 없다. 이 복이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복이다. 우리는 밭에 보물을 감추고 있는 매우 부유한 사람들. 생명 얻은 자의 기쁨으로 충만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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