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지는 최더함 박사(Th.D. 바로선개혁교회 담임목사,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의 논문 ‘구원론’을 연재합니다.
3. 죽음에 대한 다른 주장들
1) 연옥설
여기서 잠깐 죽음 이후에 대한 다른 주장들의 진위여부를 가려야 할 것입니다. 특히 로마 가톨릭에서 주장하는 ‘연옥’의 존재가 무엇인지 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가톨릭은 믿는 자들이 천국에 곧바로 가는 것이 아니라 연옥이라는 곳에서 일정 기간 동안 정화를 거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로 먼저 자신들만의 성경에 포함된 마카비후서를 듭니다.
“(유다 마카비는) 죽은 자들이 죄에서 놓임을 받도록 하기 위해 그들을 위한 속량(2천 드라크마의 은)을 예루살렘에 지불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죽은 자들이 속량을 받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성경 어디에도 그리스도 외에 죄인의 죄를 속량할 수 있다고 증언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를 속량”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이들이 내세우는 근거로 딤후 1:18의 말씀입니다. 역서 사도 바울은 오네시보로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에 있을 때 나를 부지런히 찾아 만났느니라. (원컨대 주께서 저로 하여금 그날에 주의 긍휼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 또 저가 에베소에서 얼마큼 나를 섬긴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
이 구절에서 로마 신학자들은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에는 오네시보로가 이미 죽은 뒤이고, 바울은 죽은 오네시보로의 속량을 디모데에게 부탁하고 있으므로 이것이 연옥의 근거가 된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오네시보로가 이미 죽었다는 것은 근거가 없는 하나의 가설일 뿐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아들 같은 디모데에게 오네시보로를 포함한 그의 온 집안에 복을 빌고 있을 뿐입니다. 아무튼 억지로 무엇을 꿰맞추다 보면 이렇게 무리수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2) 영혼이 잠잔다는 주장
이것은 종교개혁 당시 주로 재세례파에서 내세운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는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도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그중 고전 15장만 살펴봅니다.
“그 후에 오백여 형제들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고전 15:6)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라”(18)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20)
(이외 마 9:24, 27:52, 요 11:11, 행 7:60, 13:36, 살전 4;13, 5:10 등이 대표적인 구절들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죽음에 대해 의식이 없는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사망 중에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가 누구리이까”(시 6:5)
“죽은 자들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 데로 내려가는 자들은 아무도 찬양하지 못하리로다”(시 115:17) (참조. 사 38:18)
“~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전 9:10)
그러나 성경이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묘사했다고 하여 실제로 잠을 자는 것은 아닙니다. 죽음이 마치 잠을 자는 것처럼 신자들에게는 일시적이라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런 은유를 예수님도 사용하셨습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요 11:11)
다시 증언하지만 신자는 죽는 순간 하나님의 품으로 들어갑니다. 그곳이 바로 낙원입니다. 그곳에는 우리 앞선 허다한 순교자들과 주님의 증언자들이 영혼의 구원을 받고 마지막 날에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계속)
#최더함